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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경북수채화의 뿌리, 경주예술학교

해방 이후 경북수채화의 뿌리, 경주예술학교 가. 경북수채화의 뿌리, 경주미술학교 경북수채화가 해방 이전 출신 작가들에 의해 발아기를 맞았다면, 해방 이후엔 출신들에 의해 발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1년,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되어 경북도와 분리되면서 대구-경북의 일체감은 차츰 느슨해져 갔다. 따라서 경북만의 수채화계보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경북엔 경주라는 일찍 개화된 도시가 있었고, 그 꼭지점에 손일봉(1906~1985)이 있었다. 경북만의 계보를 따져보아도 그 의미가 희석되지 않을 만큼 손일봉은 큰 봉우리였고, 이인성과 더불어 초창기 한국수채화 화단의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데에 이의가 없다. 손일봉은 1922년 에 입학한 이후 줄곧 경주를 떠나 있었기에, 대구화단이 수채화의 발생지로의 ..

study 2020.12.17

해방 이전 대구사범 출신 화가들 외

해방 이전 대구사범 출신 화가들 은 1920년대까지 일제강점기 하에서의 중등미술교육을 도맡았던 국내 3대 사범학교 중 하나였다. 당시 사범학교나 는 모든 이가 선망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교였다. 한국 최고의 근대교육기관이었던 관립 은 1921년에, 관립 과 은 1929년에 신설되면서 ‘심상과’가 설치되었다. . . . 대구 수채화 화단의 성립에는 서동진이 1927년 개설한 의 역할이 컸으며, 경북 지역은 출신들이 그 원류를 형성했다. 는 상업미술 전문가게로 인쇄를 겸업하는 곳이었으며, 이인성과 김용조(1916~1944)가 제자로 입사했다. 당시 는 대구지방 ‘작가, 시인, 화가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서동진은 안으로 를 통해 국내 화가들을 양성했으며, 밖으로는 대구 주재 일본인 화가들과 교류하면..

story 2020.11.14

대구수채화의 계보

대구수채화의 계보 근대기 대구는 경북뿐만 아니라 영남의 중심지였다. 일제시기 지방으로서 평양과 더불어 미술인구가 가장 많았던 곳이기도 하다. 대구의 서양화단은 처음부터 수채화로 시작했으며, 한국근대미술의 시작과 그 맥을 같이 했다. 이상정(1897~1947)-서동진(1900~1969)-이인성(1912~1950)-이경희(1925~2019)로 이어지는 수채화 계보는 1920년대부터 대구서양화단을 형성시킨 주맥이었다. 1926년 박명조(1906~1969)가 대구작가 중 처음으로 ‘조선미전’에 입선한 뒤 이상정에 이어 대구에서 두 번째로 서양화개인전을 열었으며, 이듬해엔 서동진(1900~1969)이 ‘수채화개인전’을 개최하면서 대구는 한국수채화의 출발선상에 위치하게 되었다. 1930년 ‘향토회’가 조직되는 등 ..

story 2020.11.14

골목, 현재진행형의 삶의 현장

골목, 현재진행형의 삶의 현장 1 서울 종로의 ‘피맛길’이나 문경의 ‘토끼비리’는 우회의 길입니다. 우회의 길은 샛길이며, 잔도(棧道)같은 벼랑길입니다. 하지만 간섭이 부재하는 길입니다. 몸이 고단한 만큼 마음이 가벼워지는 길입니다. 거리낌 없는 바람이 부는 길입니다. 대로변을 걷는 것이 괜히 부담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다가다 주고받는 가벼운 눈인사라도 번잡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차량들이 모두 몰래카메라 같다는 망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골목길이 마냥 좋습니다. 몸속에도 길이 있습니다. 숨길이 있고, 핏길이 있고 밥길이 있습니다. 이 모두는 목숨길입니다. 목숨과 목숨을 잇는 길은 도리의 길이며 신과 이어지고자 하는 길은 구원의 길입니다. 강릉의 바우길, 지리..

story 2020.08.31

[아침광장] 아침 햇살이 비추는 창가에 앉아

[아침광장] 아침 햇살이 비추는 창가에 앉아 김경숙 기획자(ART89) 승인 2019년 07월 24일 16시 16분 지면게재일 2019년 07월 25일 목요일 19면 김경숙 기획자(ART89) 1990년대 ‘비 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그 시절(대학교) 제목만으로도 나의 마음을 흔들었던 영화로 생각되지만, 줄거리는 뚜렷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영상과 함께 흐르는 노래가 기억에 남아있다. 강인원(작사·작곡), 권인하, 김현식(노래)이다.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고 지니고 나와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 요즘 수채화의 매력에 빠져있다. 종이에 발라지는 물감의 모호함도 좋고, 색의 투명함도 좋다. 서양회화 전통의 수..

art news 2020.07.14

영양미술의 뿌리, 금경연

대구사범학교와 화가 금경연(1915~1948 영양) 1 해방 이전 경북화단의 발아기를 책임졌던 작가들 중 국내파로는 출신들이 단연 손꼽힌다. 은 1920년대까지 일제강점기 하에서의 중등미술교육을 도맡았던 국내 3대 사범학교 중 하나였다. 당시 사범학교나 는 모든 이가 선망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교였다. 한국 최고의 근대교육기관이었던 은 1921년에, 과 은 1929년에 관설되면서 ‘심상과’가 설치되었다. (경북대 사범대 전신)은 전국 각지에서 최고의 수재가 모이는 학교로서 면내 소학교 전체에서 1, 2등을 해야만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졸업하면 당시 엘리트 직업인 교사직이 보장되는데다 5년간 학비가 전액 면제되기 때문에 빈곤층이 절대다수였던 조선인들의 입학경쟁이 치열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에..

artist 2020.07.07

녹비홍수(綠肥紅瘦), 이인성의 ‘해당화’

술을 남자처럼 사랑했다는 송나라 때의 여류사인(詞人) 이청조가 지은 ‘여몽령(如夢令)’ 구절 중에 ‘녹비홍수(綠肥紅瘦)’라는 표현이 나온다. 간밤에 내린 비에 잎은 무성하지만 꽃은 야위었을 거라는 뜻이다. 신록이 녹음으로 옮겨가는 계절의 변화 앞에 청춘의 쇠락을 예감하는 섬세함을 읽을 수 있다. 여몽령이란 악보의 명칭이며 서정적인 운문에다 운율을 더한 노래를 일컫는다. 사를 음미하는 동안 저절로 그림이 그려진다. ‘옛말에 詩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詩’라고 했다. 하지만 ‘녹비홍수’의 어감 속에서는 소리마저 응축된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게 된다. 여몽령의 전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어젯밤 비는 성기고 바람은 세찼지 (昨夜雨疏風驟) 푹 잤는데도 술기운은 가시지 않아 (濃睡不消殘酒) 발을 ..

story 2020.07.03

1940 ~ 1960년대 영주 역대 미술교사 및 학생 일람

1980.4.1 영주시 승격 기념 모듬두레전(덕풍예식장) 축사 김창홍 역대 미술교사(교장) 및 학생 일람 학 교 (개교일자) 비 고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 영주농업학교(1943.5.5) 영주농업중학교(1946) 영주농고(1952) 영주종고(1964) 영주공고(1978) 영주제일고(2001) -1946.9.1. 영주농업중학교로 교명변경 -1951.8.11. 영주농업고등학교로 교명변경 -1952.11.15. 영주중학교 분리 -2001.3.1. 영주중앙고와 통합. 인문계고로 전환 교사 학생 교사 학생 교사 학생 안상갑 서창환 (1946) 이동수(겸임) 김호걸(서울대 '53학번) 마진부 (‘62.10.18~’63.2.28 영주중에서 겸무) 김창홍 (‘61 홍익대 서양화) 공고시절 후배들을 위해 방..

study 2020.06.11

'삭임'의 예술, 수채화가 조광래

‘삭임’의 예술, 수채화가 조광래 1 그림은 그리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흉중의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려고 하는 것은 의지의 차원이고, 끄집어낸다는 것은 실천의 영역이다. 의지는 미완의 그릇에 불과하지만, 실천은 그릇을 완성시킨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조광래는 지붕과 벽체가 없는 화실에서 풍경화를 그렸고, 갇힌 곳에서는 소묘나 정물화를 그렸다. 그린다는 행위의 쉼 없는 반복은 손의 기억을 독려하는 일이다. 수천점이 넘는 그의 그림들은 손이 기억해 낸 결론들이다. 보이는 실경은, ‘보는 진실’ 때문에 그려진다. 화가는 그림이 될 것 같지 않는 일각에서 구도를 본다. 이인성의 계산성당 같은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이다. 조광래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풍경화들도 그렇게 그림이 됐다...

artist 2020.06.11

인물수채의 달인, 박기태

필력중심 인물수채화의 대가, 박기태(1927~2013) 박기태는 울산 출신으로, 19세 때인 1946년 에 입학, 손일봉으로부터 수채화를 배웠다. 학창시절 이수창, 동향의 후배 김인수와 함께 사생을 다니면서 미래를 준비했다. 1948년 5월, 1회 졸업 후 이듬해 안동으로 왔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에서 첫발을 내디딘 박기태는 연이어 동기인 이수창과 김인수를 불러들였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안동, 대구, 부산 등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서울을 무대로 한 전업작가로서의 꿈을 다져나갔다. 10년 뒤인 1962년 8월 로 자리를 옮겨 영주에서 3년간 근무했다. 이때 개인 화실을 내고 영주의 남 · 여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에서 2년을 더 교직에 머물다가 ‘전업화가’의 꿈을 실현..

artist 2020.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