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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임'의 예술, 수채화가 조광래

즈음 2020. 6. 11. 16:13

삭임의 예술, 수채화가 조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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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그리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흉중의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려고 하는 것은 의지의 차원이고, 끄집어낸다는 것은 실천의 영역이다. 의지는 미완의 그릇에 불과하지만, 실천은 그릇을 완성시킨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조광래는 지붕과 벽체가 없는 화실에서 풍경화를 그렸고, 갇힌 곳에서는 소묘나 정물화를 그렸다. 그린다는 행위의 쉼 없는 반복은 손의 기억을 독려하는 일이다. 수천점이 넘는 그의 그림들은 손이 기억해 낸 결론들이다.

 

보이는 실경은, ‘보는 진실때문에 그려진다. 화가는 그림이 될 것 같지 않는 일각에서 구도를 본다. 이인성의 계산성당 같은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이다. 조광래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풍경화들도 그렇게 그림이 됐다.

 

풍경엔 작가의 마음이 녹아있다. 순간의 느낌이 그를 그 자리에 주저앉게 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보는 진실을 담았다. 무엇을 그렸는가, 어디를 그렸는가, 어떻게 그렸는가 이전에 그 그림을 그릴 때의 작가의 기분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그림은 차분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는가하면, 어떤 그림은 불필요해 보이는 선들로 화면이 어지럽다. 그것은 대상의 관찰에 집중했다기보다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못한 순진함의 발현이기도 하다. 이렇듯 감정을 추수해온 그림들이 집안 창고에 수천점이 쌓였다.

 

조광래는 자신이 사생하는 이유와 바램을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나는 자연과의 교감을 원한다. 사생의 참뜻은 자연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그림 속에 여운과 아쉬움을 남기고 싶다.” 아쉬움을 남기고 싶다라는 이 구절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이런 마음가짐은 거의 도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2001二水會창립전(5.22~31, 대구 동아갤러리)을 겸한 한국수채화 22인 작품집에서 조광래는 사생을 떠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심경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여행을 한다. 나의 심상이 거기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길이 있어서 길을 떠난다지만 나는 나의 심상이 거기에 있어서 길을 떠난다. 그 길 위에서 풍경을 그린다. 내가 멈춰선 그 자리는 어김없이 나의 심상이 요동쳤던 곳이다. 거기에는 모양 없는 조약돌 하나만이 덩그렇게 놓여있더라도, 주인을 잃은 폐선이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내 심상의 결정체가 된다. 그 순간이 나에게는 또 다른 나와 조우할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내가 떠나야만 만날 수 있기에 나에게는 영원한 타자일 수도 있는, 그 자연의 모습을 찾아, 나의 모습을 찾아 오늘도 어김없이 길 위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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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래의 주된 화어는 경험의 축적을 통해 이룩한 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획들이 얼기설기 일으켜 세우는 집이며, 길이며, 나무며, 산이며, 점경인물들이, 집이며, 길이며, 나무며, 산이며, 점경인물들로 비쳐진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야송 이원자는 붓이 속을 썩이더니만 60이 넘어서자 고분해지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조광래의 붓 끝에서 떨어져 나온 획들은 제멋대로 자유분방한 것 같지만, 큰 틀로서의 질서에 다름이 아니다. 붓이 속을 썩인 적도 없고, 고분해 진 것 같지도 않다. 조광래는 오랜 습작기를 거치며, ‘삭임의 미학을 준비했다. 한결같은 방법적 스타일이나 무한반복처럼 느껴지는 현장에의 여정. 이는 손의 기억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손의 기억은 작가의 관점이나 습관마저도 스스로 베껴내는 힘을 가졌다. 게을렀던 자들은 손의 기억은 고사하고 남의 손같은 당혹감에 시달리기 일쑤다. 생각은 깊어졌지만, 손은 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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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래의 그림은 꿰뚫어지게 바라보기보다는, 지나치듯 보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편하고, 자극적이지가 않다. 그러면서도 뒷걸음치게 만드는 그 뭔가가 있다. 그 끌림의 정체가 바로 속삭임이다. 고함이나 떠듦이 아니라 소곤거림인 것이다. 그 말을 문득 엿듣고 싶어진다. 소곤댄다는 것은, 겸손함이나 예의로 읽힐 수도 있으나, 자신감의 결여로 비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속삭임이란 삭임없이 취해지는 태도가 아니다. 삭힌 그 무엇이 예감될 때, 그림을 똑바로 응시하게 된다. 비로소 망막 위에 머물렀던 이미지가 더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조광래는 긴 세월 무명으로 살아왔다. 작품에서만 아니라 태도조차 삭임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손일봉은 조광래에겐 스승의 스승이 되는 분이다. 그 손일봉이 제자들에게 잔재주를 부리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 뜻을 스승 이수창이 전했다. “선생께서는 재치 있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다. 기술이 있는 건 좋은데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지 그 기술이 표면에 드러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선생에게서 지조를 배웠다. ‘늙어가지고 젊어지려 빨간 넥타이를 매지 마라. 꾸준히 자기 영역을 끝까지 관철해 나가줌으로써 뒤에 따라오는 사람한테 도움을 주게 된다. 중간에 변절해 버리면 가치가 없다.’ 선생은 만년까지 변함없이 한결같으셨다.”

 

손일봉 - 이수창 - 조광래 3代 작품

 

겸재 정선이 임지를 옮길 때마다 그 지방의 산수를 그림으로 기록했듯이 조광래 역시 그 전철을 밟았음은 당연지사다. 한 마을의 장면을 각도를 달리해서 여러 장 그리기도 했다. 조광래의 삶의 궤적처럼, 그가 그린 그림들은 하나 같이 리얼리티로 충만하다. 조광래는 하늘같은 스승과 도발하는 후배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낄 때가 있었다. 언젠가 후배 류윤형이 말했다. “형님은 아마추어고, 나는 프로 아니껴.” 류윤형이 교직을 박차고 전업작가의 대열에 합류했을 때 무심코 내뱉었다고 생각되는 말이다. ‘전업작가라는 타이틀이 자부심을 견인해주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류윤형은 선배의 곰삭힘의 여정을 간파하진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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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윤형은 선배의 수채화를 보람으로 여겼다. 수채화의 본고장임을 자처하는 대구에서 전시회를 열어보라고 강력히 권유했다. 안동 수채화를 알리라는 메시지요, 요구기도 했다. 조광래는 이를 받아들여 1984, 대구 중앙화랑에서 필생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 이경희, 강근창 등 선배 화가들이 격려해 주기 위해 참석했다. 동년 5월에는 강근창의 수채화개인전이 개최된 바 있었다. 같은 안동출신이지만 강근창과 조광래의 화풍은 판이하게 달랐다. 조광래와 달리 강근창의 화풍은 포스터칼라를 도입하는 등 색채화가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당시 대구 수채화 화단은 1983년 강근창이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수채화로 특선에 올라 성가를 드높이고 있었으며, 강근창의 주도로 대구수채화협회가 창립되어 있었다. 안동 출신으로 대구수채화를 견인하고 있던 강근창과 달리 토종화가 조광래의 수채화가 대구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손일봉에서 비롯된 수채화 화풍이 이수창과 김인수에 이어 조광래로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각인되었으리라 본다.

 

한국수채화작가회 창립 맴버였던 이수창은 애제자 조광래의 추천을 고려했던 적이 있었다. 이 문제를 박기태와 함께 숙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수채화 흐름이 제자에게 오히려 누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고 했다. 그런 결정의 이면에는 수채화에 추상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조형을 견인해 가는 이두식이라는 존재와 모더니티로 포장된 신진들의 자유분방함에 대한 괴리감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다 함께 창립했던 원로 작가들마저 하나 둘 세상을 등지고 있는 것도 부담이 됐을 것이다. 로컬 아티스트 이수창은 전통의 수호자로서 한국수채화 화단에 대해 우울한 경종을 던지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2001, 박기태와 이수창은 조광래를 추천하여 한국수채화작가회전에 출품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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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래는 집 나이로 1939년생이다. 6남매라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안동사범> 병설중 1학년 때는 권장에게, 2학년 때는 임규삼, 3학년 때는 이수창에게 배웠다. 그러나 집안 형편은 그를 사범학교 졸업에 머물게 했다. 당시, 현 예화방 근처 널찍한 적산가옥에 <안동중> 국어교사였던 권영호가 화실을 내고 그림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집안엔 온실까지 있었다. <안동사범> 2년 선배인 강근창, <안동농고>를 다니던 2년 후배 권영렬, 5,6년 선배였던 오상목 등이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정작 <안동중> 미술교사였던 박기태나 <안동사범>의 이수창, 김인수 등은 화실을 대자연 속에다 차렸다. 그들은 애옥살이를 하던 처지였다. 조광래는 이들 스승들을 쫒아 사생에 매달렸다.

 

<안동사범> 9회 졸업 후 초등교사 생활이 시작됐다. 60년대 초 조광래는 입대를 앞두고 예천의 <유천국민학교>에 근무했다. <안동농고>시절 박기태에게서 그림을 배웠던 1년 후배 김수진과 함께 ‘62년 예천 백조다방에서 수채화2인전을 개최했다. 김수진은 농고를 졸업한 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경안여상>에서 실기교사를 전전하며 그림을 놓지 않고 있었다. 둘 다 수채화 매니어였다. 둘은 갱지 앞 뒤 면에다 손 글씨로 안내장을 만들었다. 세로로 접은 리플렛에는 각각 12점씩의 작품 명제를 기입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20대 초반의 제자들을 위해 30대 스승이었던 세 사람-박기태, 이수창, 김인수-이 격려사에 나란히 이름을 올려놓은 일이다. 참으로 흐뭇하고 갸륵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 전시회를 주선해 주었던 이가 예천 백병원 의사였는데, 조광래의 그림 한 점을 구입해주었다고 한다.

 

1971년 조광래는 중등고시검정에 합격했다. 검정 합격 이후, <영남대> 중등교원양성소 제2과정(방학 중 학기제)에 등록했다. 지도교수 장석수로부터 자격이 있는데 왜 왔는가라는 말을 들었다. 조광래는 스스로를 좀 더 담금질을 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강사였던 이경희는 조광래의 그림을 칭찬했다. 중등학교 초임 발령지는 <예천중>이었다. 거기서 미래의 예천작가들인 권사극, 임환재, 최도성 등을 만났다. 특히 최도성(예천예총 초대회장)이 애제자였다. 3년 동안이나 담임을 맡아 그림을 가르쳤다. 3년 동안 최도성이 습작했던 수채화가 천 장을 넘겼다. 스승이나 제자나 오로지 사생 마니아의 길을 함께 걸었다.

 

이후 조광래는 안동미술의 수호자로의 한 길만을 걸었다. 동료가 없는 수채화가라는 외로운 길이기도 했다. 1987년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후배들이 경북수채화연구회라는 것을 만들었을 때, 4회 때부터 평회원으로 참여하며 버팀목이 되어 주기도 했다. 1979<안동교대> 1기생인 류윤형의 주도로 유화그룹 토전이 만들어졌을 때 선배인 조광래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유화 그룹이라는 의미가 작용했겠지만, 한 뿌리의 선배 입장에서는 서운할 법도 없지 않았다. 십년이 지난 1989년에 가서야 조광래도 참여했으며 이어 회장을 맡기까지 했다. 조광래 역시 유화와 아주 담을 쌓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틈틈이 인물이나 풍경 등을 유화로도 제작했다. 이는 이수창, 김인수가 <안동대학> 제자들에게 유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과 일맥상통한 점이 없지 않다. 다만 이분들은 유화를 통해 수채화 예술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역설적 의미가 강했을 뿐이다.

 

1998, 조광래는 환갑의 나이에 영남수채화작가회의 초대회장을 맡았다. 위로는 고문이 세 분이나 됐다. 박기태, 이수창은 직계 스승이기도 했지만, 박기태가 영입해 온 성백주는 연고도 없는 분이어서 조광래의 입장에선 데면데면한 입장이기도 했다. 여느 지방 같았으면 자신도 고문의 위치에 서 있을 연배기도 했다. 이후 70세를 넘긴 조광래는 후배들의 청을 받아들여 비로소 고문직을 수락했지만, 스승과 함께 한다는 것에 늘 긴장하며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2008년에는 영남구상전에 동참하며 오로지 안동미술경북수채화의 발전에 헌신해 왔다. <안동여중> 교장을 끝으로 교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조광래는 오로지 수채화 한 길만을 묵묵히 걸어오고 있는 안동미술계의 산증인이다. 이제 조광래는 안동미술인들의 최고 연장자로서 안동미협경북수채화협회의 고문으로만이 아니라, 안동미술의 살아있는 역사로서 재평가 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남은 일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작가의 예술혼을 재조명하고, 안동미술의 긍지로 삼는 일만 남았다

 

1958년 안동사범학교 입학식
탄지에서 김인수 교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케치하는 조광래
포항 양포 바닷가에서 한복 차림으로 스케치
경북수채화협회 20주년 기념전 및 조광래 고문 팔순기념 특별전 작품 선별 작업. 최도성, 송재진, 조광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