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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전 대구사범 출신 화가들 외

즈음 2020. 11. 14. 16:04

해방 이전 대구사범 출신 화가들

 

<대구사범>1920년대까지 일제강점기 하에서의 중등미술교육을 도맡았던 국내 3대 사범학교 중 하나였다. 당시 사범학교나 <경성제1고보>는 모든 이가 선망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교였다. 한국 최고의 근대교육기관이었던 관립 <경성사범>1921년에, 관립 <평양사범><대구사범>1929년에 신설되면서 심상과가 설치되었다. . . . 

 

대구 수채화 화단의 성립에는 서동진이 1927년 개설한 <대구미술사>의 역할이 컸으며, 경북 지역은 <대구사범> 출신들이 그 원류를 형성했다. <대구미술사>는 상업미술 전문가게로 인쇄를 겸업하는 곳이었으며, 이인성과 김용조(1916~1944)가 제자로 입사했다. 당시 <대구미술사>는 대구지방 작가, 시인, 화가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서동진은 안으로 <대구미술사>를 통해 국내 화가들을 양성했으며, 밖으로는 대구 주재 일본인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대구의 서양화를 활성화시켰다. 서동진은 이상정의 제자로 대구에서 두 번째 미술교사기도 했는데 <교남학교>(현 대륜 중고등학교)<계성학교> 양대 사학에 미술교사로 재임했다. 1926년부터 약 10년 간 무보수로 <교남학교>에 근무하면서 <계성학교>에도 일시(2년간) 근무했는데 그 기간 중에 <대구미술사>도 겸업했던 것이다. <대구사범>은 서동진이 설립한 <대구미술사>보다 2년 늦은 1929년에 관설되어, 미래의 유망주들이 한창 공부하며 조선미전을 통해 그 싹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로 금경연(1915~1948 영양), 권진호(1915~1951 영주), 김수명(1919-1983 왜관), 강홍철(1918~2011 경산), 최현태(1925~1994 경주), 박재봉 등이다. 박재봉은 대구에서 양화 개인전을 처음으로 가졌던 박명조의 사촌으로 <대구사범> 교사 타가야나기 타네이쿠(高柳種行)의 제자이며 조선미전에도 몇 차례 입선했다. 일제강점기 때 만주로 이주했다가 끝내 귀국하지 못한 불운한 화가였다고 한다. 금경연(4), 김수명(6), 최현태 등은 5년제 심상과 출신들이며, 권진호와 강홍철은 5년제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로 둘 다 <대구사범> 강습과를 수료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재학 중 조선미전에 입선함으로써 교직과 더불어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이들이었다. 권진호 역시 학창시절 미술부 활동을 했으며, 졸업반 때 조선미전에 입선을 함으로써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최현태는 심상과 졸업 후 교향인 경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했으나 1948년에 <경주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은 이래 42년간 교직과 화업을 병행해나갔으며, <경주예술학교>를 발족시키는데도 일조했다.

 

졸업 이후 경북지역을 벗어났던 작가로는 박봉재(1913~1988 예산)가 있는데, 1931조선미전입선과, 1932全鮮중등학교미술전람회에서 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에 올랐다. ‘전선중등학교미술전람회19297월경 <경성치과의전문학교> 미술부가 주최하고 경성일보가 후원했던 전람회로 중등부로서는 처음으로 개최된 전람회였다. 심사위원은 현직 일본인 도화교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전람회는 국내 학생미술전람회로서는 가장 권위 있는 행사였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이 전람회에서 입선한 작품 모두 조선미전의 입상작품과 거의 같은 수준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박봉재는 <대구사범> 재학 시절 조선미전에도 4회나 입선했던 수재였다. 해방 이후 30년간 생계를 위해 절필했다가 1977년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지면서 화업을 재개했으며, 1980(68)에 국내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때 수채화 100호 대작 등 40점을 출품해 화제를 모았다. 화풍의 가장 큰 특징은 형광색과 파스텔톤의 색감이라고 할 수 있다. 1981년에는 일본화단에서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일본수채화전에 출품한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으나 외국인에게는 수상하지 않는다는 회의 관례 때문에 수상이 보류되었다는 구두통지를 받은 일도 있다한다. 현재 한국수채화협회에서 주관하는 한국수채화공모전 봉재미술상을 제정해 고인을 기리고 있다.

 

또 전주 출신 김용봉(1912~1994)<전주고보>를 나와 <대구사범>을 졸업한 뒤 전북미술의 밑거름이 된 인물이다. 1949국전에 입선했으며. 1937년 이래 1990년까지 전주, 군산, 남원 등지에서 개인전을 13회나 개최했다. 1950녹광회(綠光會)’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1968년에는 전북미협회장을 엮임했다. <동래공립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출신으로 1930년대 서진달(1908~1947 대구)과 함께 이치이 다메지로(一井爲治郞)에게 서양화를 배우고 <대구사범>으로 진학했던 이로는 김종필이 꼽힌다. 또 한 사람 북한 화가 한상익(1917~1997 함남 함주)<대구사범> 강습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상익은 재학 중 겨울방학 때인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1943<동경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했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이순종, 김정수 등과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1월 함흥으로 월북하여 <평양미대> 교수와 조선미술가동맹위원을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대구사범학교>는 전국각지에서 수재들이 모여들던 학교였고, 일본인 교사의 지도하에 미술수업을 받은 학생들이 일선학교 교육자 겸 서양화가로 배출되던 요람이었다. 경북미술(수채화)의 선구자로서 한 맥을 형성했던 <대구사범> 출신들은 경북미술(수채화)의 역사를 1930년대까지 끌어올린 선구자 그룹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금경연과 권진호는 경북북부권에 정주했던 화가들이었지만 둘 다 30대의 나이로 요절하는 비운을 맞으면서, 뒤에 기술될 <경주예술학교> 출신들과의 상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2014, 경북수채화협회(회장 송재진)에서 경북수채화의 뿌리와 맥전을 통해 유작 일부나마 한 자리에 모이게 했던 것이 경북권에서 처음 시도됐던 재평가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채화가 친근하게 수용되었던 이유

 

이중희이여성(1901~? 이쾌대의 친형)사계산수도(1934, 종이에 채색, 4, 30,5x56cm, 이쾌대 유족 소장)에서 표명된 수채화적 요소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산수화이긴 한데 주목되는 점은 미약하게 원근법이나 입체감 표현을 가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서양화 기법으로 인해 이런 그림이 당시로서는 서양화로 분류된 것 같다.” 이어 초기서양화 발아단계에서는 전통그림과 동떨어진 이질의 서양화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시서화 일률사상이라는 왕조시대 사대부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양반문화로서 시문 · 글씨 · 그림 등이 복합된(멀티화 된) 이들의 문화양태 속에서 신문화로서 서양화의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 상태였다.” 고 진단했다. 이처럼 종이와 물그림이라는 친연성은 신문물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선구자들이나, 이를 감상했던 일반인들조차 동일한 감정을 느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해방 이전 <대구사범> 출신들이 주로 수채화에 집중했던 이유가 전통서화를 가장 닮은 장르로 이해하여 친근감을 가졌기 때문으로 보이며, 그런 연유에서인지 이들의 작품 속에는 수묵화풍의 심상적 기풍과 서양화 초기 단계의 고졸성이 한 특징을 이룬다. 이들이 활약했던 1930년대는 한국수채화의 초기시기로 수채화의 발전과정에 대한 단초가 들어있다. 미술평론가 김영동은 김수명의 화론에서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에 제작된 김수명의 수채화에는 수묵화적인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는 전통서화에 익숙했던 정서가 남아있었던 까닭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경우는 금경연(1915~1948 영양)과 권진호(1915~1951 영주)의 작품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미술평론가 서성록한국수채화작가회 30주년 기념전(2016.9.28.~10.3 조선일보미술관)에 부치는 글에서 수채화가 한국 작가들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유화물감보다 재료가 저렴하고 취급이 간편한 요인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동양화에 익숙했던 국내화가들이 물을 사용하는 매체의 속성 상 별 불편 없이 수채화를 색깔 있는 수묵화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수채화를 수회로 인식하고 유화에 뒤지지 않는 독립된 장르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편 조은정은 단순히 전통회화와 닮았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손일봉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손일봉의 수채화 기법은 담채기법과는 다른 서양식 수채화 기법을 고루 섭렵한 결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손일봉이나 근대기 화가들의 수채화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동양화와 유사하여 선택한 장르는 아니었다. 이는 다양한 수채화 기법의 사용에서도 볼 수 있거니와 손일봉이 채택한 소재에서도 증명된다.” 그럼에도 손일봉은 수채화를 그릴 때 수묵화 하듯이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고 하니 전통회화의 장점을 수채화에 접목시킨 작업태도를 지니고 있었음은 간과할 수 없다.

 

이렇듯 우리의 정서에 쉽게 수용되었던 서양의 수채화가 실은 동양산수화에 자극을 받아 태어났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서성록은 아돌프 라이히바인중국과 유럽 : 18세기에 있어 지적 및 예술적 접촉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했다. “수채화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감정에 부합하여 풍경을 새롭게 묘사하기 위해 태어났다. 더욱이 이 매체를 사용한 최초의 수채화가가 영국인 로버트 코즌(1752~1797)이라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이 화가의 풍경화 채색법이 중국미술을 빼닮았음은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코즌은 갈색과 회색을 기조색으로 삼고 빛 효과를 내기 위해 청색과 적색 터치를 주었으며, 먹으로 윤곽처리를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다른 색과 마찬가지로, 먹을 펜이 아니라 붓으로 착색시켜, 심지어 세부묘사에서조차 중국 산수화 수법에 걸맞는 화법을 발전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상주의의 선구자 윌리엄 터너(1775~1851) 역시 자신이 선보인 톤이 동양의 수묵톤과 동양화론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이며, 영국의 위대한 풍경화가 게인스보로(1727~1788)도 후기 작품 속에서 동양의 영향을 짙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수묵화와 서양의 수채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드로잉이 전제된 것이 수묵화라면 페인팅이 전제된 회화가 수채화이기 때문이다. 수묵화는 채색을 가미하더라도 수묵의 기본은 훼손되지 않지만, 수채화는 모노톤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수묵의 정신과는 그 지향점이 다르다. 물성에 대한 실용의지나 합리성을 화면 위에 적용하려는 의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색채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드로잉이라면, 수채화에서의 드로잉은 역설적이게도 색채로부터 출발한다. 색면과 색면을 이어주는 악센트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분해된 면처럼 흩어져서 존재하다가도 색채 위를 날렵하게 떠다니며 형상을 조율해 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묵화의 정신과도 일통한다고 보겠다. 수회라는 큰 틀에서 보면, 수채화는 글로벌 회화로서의 비전과 보편성을 갖춘 이미 세계적으로 정착된 양식인 것이다.

 

한국수채화, (西)로 뻗는

 

대구 경북이 한국수채화의 뿌리이며 시작점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부터 한국수채화의 흐름은 사실상 호남으로 넘어가게 되었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배동신(1920~2008 광주)이라는 걸출한 수채작가가 출현했는가 하면, 강연균(1941~ 광주)과 같은, 형식을 뛰어넘어 시대의식을 담을 줄 아는 멀티 수채화가 또한 출현했던 것이다. 이는 탐미적 수준에 머물고 있던 수채화의 형식을 내용의 영역까지로 확장시켰다는 의의가 크다. 강연균에 대해 이태호남도의 땅과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고향의식5월항쟁 이후 뚜렷이 변화된 현실의식을 앞세운 작가임을 적시했다. 대구에서는 1957년 이경희가 첫 개인전(대구 미국문화원 U.S.I,S)을 가졌지만, 광주에서는 배동신이 해방 직후인 1946, 광주-전남 역사상 최초의 수채화개인전을 광주도서관에서 개최했다. 1950년에는 강용운(1921~2006 화순)이 광주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반구상 수채화 작품들을 여러 점 발표했다. 이로써 강용운은 양수아(1920~1972)와 함께 추상미술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수채화로서 다양한 실험을 했던 화가들은 주로 호남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이 지속적이며 영향력이 확대되어 한국수채화 화단의 족적으로 남겨지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1953년에는 고화흠(1923~1999 구례)이 전주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55에는 박철교(1935~)가 학생 신분으로 전주공보관에서 수채화전을 개최했다. 이듬해에도 광주 YMCA홀에서 개인전을 이어갔다. 대전에서도 이인영(1930~ 부여)’57년과 ‘59년 수채화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정영복(1937~ 공주)’57년 청양문화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방점을 찍게 되는 것은 19681월에 광주 Y살롱에서 창립전을 연 수채화창작가협회일 것이다. 배동신(회장), 진양욱(1932~1984 남원), 최쌍중(1944~2005 담양), 박철교(부회장), 강연균, 우제길(1942~), 박상섭, 김기섭, 김충곤, 명창준, 양규철, 윤완기, 최종섭, 허병, 홍진삼 17인이 참여한 그야말로 호남수채화의 맥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배동신에 대해 한국수채화의 전통은 과거에 이인성, 손일봉, 이경희 등 경북 출신들이 이어왔다. 그러나 배동신의 출현으로 한국수채화의 영역을 넓히고 중앙집권적 문화에 쐐기를 박았다.”고 평하고 대상의 본질을 찌른 그의 시각의 정확성은 세부적 묘사를 생략한 대담한 구도 속에 여실히 실현해내고 있다고 극찬했다.

 

19831월에는 전술한대로 전주에서 수채신작파가 창립됐다. 고화흠(1923~1999), 김용봉(1912~1996), 허병(?~?)을 중심으로, 이형구, 한소희, 이복수, 전병하, 박민평, 소광석, 이중희, 이종만 15명이 참여했다. 이 단체의 탄생 주역이자 전북수채화의 창설자인 고화흠에 대한 전병하(1925~2011 논산)의 회고가 흥미롭다. "고화흠씨가 나보다 1년 선배요. 나는 <강경상업고등학교> 다닐 때 미술 선생님한테 배웠고, 고 선배는 일제시대 수채화 지도를 받았어요. 둘 다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 실력이었죠. 그런데 1980년인가. 고 선배가 김용봉 선생이 수채화 그리는 게 어렵다고 하니까, 단체 하나 만들자 그러대요. '수채신작파전(水彩新作派展)' 이란 이름도, 글씨도 다 그가 만들었죠." 이중 김용봉은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사범>을 졸업했던 전북화단의 좌장급 인사였다. 이렇듯 무게추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져갔음을 알 수 있다.   소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