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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수채의 달인, 박기태

즈음 2020. 6. 11. 16:02

필력중심 인물수채화의 대가, 박기태(1927~2013)

 

 

박기태 울산 출신으로, 19세 때인 1946<경주예술학교>에 입학, 손일봉으로부터 수채화를 배웠다. 학창시절 이수창, 동향의 후배 김인수와 함께 사생을 다니면서 미래를 준비했다. 19485, 1회 졸업 후 이듬해 안동으로 왔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안동중학교>에서 첫발을 내디딘 박기태는 연이어 <경주예술학교> 동기인 이수창과 김인수를 불러들였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안동, 대구, 부산 등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서울을 무대로 한 전업작가로서의 꿈을 다져나갔다. 10년 뒤인 19628<영주여중·>로 자리를 옮겨 영주에서 3년간 근무했다. 이때 개인 화실을 내고 영주의 남 · 여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대구여중·>에서 2년을 더 교직에 머물다가 전업화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교직을 박차고 서울행을 결행했다. 가솔을 이끌고 무작정 상경했을 때의 심경을 직접 들었는데, 그 강단과 결기가 지금도 서늘하다.

 

상경 이전 박기태는 이수창, 김인수와 함께 이미 중앙화단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었는데, 국내 최초의 수채화 단체이자 한국수채화협회의 전신인 한국수채화창작가협회에 스승 손일봉과 함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던 것. 1975년 창립전에 대한 당시 중앙일보 기사가 흥미를 끈다. 기사는 10명의 창립회원들에 대해 줄곧 수채화를 해온 작가들과 유화와 더불어 수채를 즐겨 사용해 온 화가들을 구분했다. 전자에 속한 이들로는 배동신(회장), 박기태, 김인수, 이수창, 강연균, 유재우, 최쌍중, 정문희, 후자엔 박영성과 손일봉(고문)을 꼽았던 것. 기사 말미엔 수채화에 대한 박기태의 인터뷰를 실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기름보다는 물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어 남이 뭐라든 수채화에 집착하게 된다.’ 이처럼 박기태의 수채화에 대한 신념은 동양인의 정서에 맞는 최적의 장르라는 데 있었다.

국전 특선작 '영아' 130.3x97cm 1973 호암미술관 소장 (미술신문 발췌)
미술신문 발췌

박기태는 상경 직후인 ‘67년부터 ’81년 사이 수채화 작품으로 국전에서 열 차례의 입선과 두 차례의 특선을 거머쥐며 서울화단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박기태가 처음 국전에 출품했을 때는 유일한 수채화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수채화로 국전 특선에 오른 것은 대구의 이경희(1949년 제1회 국전)이래 영남작가로는 두번째였다. 1973년 국전 특선작 영아(130.3x97cm)는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했으며, 1976년 국전 특선작 8월의 여인(97x130.3cm)은 문예진흥원에서 소장했다. 이외에도 1984년 작 여인(73x109cm)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우산을 쓴 여인과 우산을 막 펼치려는 모습의 두 여인을 그린 노란 양산(97x130.3cm)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공모전 출품기의 작품들인 노란 양산이나 국전 특선작 등은 박기태 특유의 활달한 필치가 펼쳐지기 전의 수채화들로 유채작품들을 주눅들게 할 만치 탄탄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마침내 박기태는 1981년 도불개인전을 롯데화랑에서 개최한 뒤 프랑스로 날아가 파리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에서 수학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때 중앙일보는 다음과 같이 짤막한 기사를 냈다. 수채화가 박기태씨의 도불 개인전이 11일부터 16일까지 롯데 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박씨는 한국 수채화 협회장을 역임했으며 국전 특선 2회의 경력이 있다. 흰꽃 있는 정물, 여인 A, 자갈치에서39점의 수채화와 소묘 5점이 선을 보였다.”(중앙일보, 1981.03.11.)

 

박기태의 인물 모델들은 거의가 젊은 여성들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20074, 포항 양포로 낙향한 이후 인물화를 거의 그리지 못했던 것과 무관치 않다. 양포를 찾았던 후학 최도성이 오다 보니 할머니들이 많으시던데 왜 모델로 쓰지 않으세요?”라는 농에도 대꾸는커녕 아예 못 들은 체했다. 돌아오면서 친구인 이수창이 함께 갔던 후학들에게 농담을 했다. “그 사람 호를 내가 지어주었는데, 조개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바위가 해암(海巖) 아닌가.” 이처럼 박기태는 자신의 활달한 필치에 걸맞는 대상으로 젊은 여성들을 택했고, 그것은 곧 작가 자신의 미적 욕구의 다름이 아니었다. 2001, 대구에서 개최됐던 二水展 창립-한국수채화22인전 도록에 작업노트를 남겼는데, 이를 통해 작가의 예술관을 보다 뚜렷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여러 사람의 모델을 쓰고 그림이 되었을 때 보면, 작품의 얼굴 윤곽, 몸의 선 같은 것이 어딘가 닮아있다. 결국 나의 이상적인 선으로 그려졌다고나 할까.” “모델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그려진 그림이 아름다운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미인을 그릴려고는 하지 않는다.” “처음 계획한대로 그림이 완성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가 만드는 인물화는 적어도 완성했을 때 이렇게, 라는 구상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인체의 오묘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화가는 정물이나 풍경화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인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박기태는 생전 20여 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중 20014, 인사동 상갤러리에서 개최했던 개인전을 최상의 전시회로 꼽았다. 1980년대부터 그려 왔던 수채화와 드로잉 60여 점을 출품했다. 작가 스스로도 "이렇게 공들인 전시는 처음"이라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이 전시를 기획했던 신혜영 큐레이터는 서문에서 언뜻 강렬한 붓질과 다소간의 여백 때문에 미완성인 듯 느껴질 법한 작품 같지만, 세련된 색감과 농익을 대로 농익은 화가의 손놀림을 포착하는 순간 수준 높은 시각 체험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운을 뗀 뒤 여느 수채화와 뚜렷이 구별되는 박기태만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것은 시원스레 여백을 남기면서도 짙은 색상의 면을 칠할 때는 단번에 그어버린다는 것이다. 색면으로 묘사된 공간이며, 인체의 머리칼이며, 의복 등은 그어버린다는 표현에 알맞게 순간적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기법은 이미 완숙한 소묘력을 바탕하지 않는다면 작품의 성실도가 매우 떨어져 버릴 가능성이 있다.” 10년 전인 1991년 개인전 때 서문을 썼던 박래경 역시 신혜영의 통찰과 궤를 같이 한다. “수채화 중에서도 그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특히 불투명 화법이며 농도가 짙은 색채와 긴장된 그의 선은 그러한 화법의 특징을 강렬하게 풍겨주고 있다. 따라서 화면 하나하나에는 속사하는 듯한 재치를 통해 강한 색과 선이 팽팽한 생동감을 이루고 있다.”

개인 소장

박기태는 성공한 작가로서 기존 미술계 분위기에 영합치 않으며 자존심을 지켜나갔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미술평론가의 평문 제의를 과감히 물리치는가 하면 유명 화랑의 초대전 요청도 작품가격이 안 맞는다며 뿌리쳤다고 한다. 1983년에는 호남수채화의 태두 배동신(1920~2008 광주), 전상수(1929~)와 함께 3인전을 신세계화랑에서 개최했으며, 동갑인 전상수와는 2인전도 열었다.

 

이 무렵의 박기태는 중앙 수채화 화단에서 확실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전성기였으며, 이수창과 김인수와도 중앙무대에서 자주 어울렸다. 이들 안동수채화 3인방은 한국수채화 화단의 초창기를 장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중앙에서의 인맥이나 학맥의 부재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박기태는 한국수채화를 대표하는 양대 단체인 한국수채화협회대한민국수채화작가협회공히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작고하기 전 몇 해 전부터는 경북수채화협회의 최도성이 자신의 소장품으로 대신 출품해 가며 중앙화단과의 소통을 지켜주었다.

 

말년의 박기태는 친구인 이수창을 많이 의지했다. 자신이 고문으로 있던 경북수채화협회회원들이 이수창과 함께 1년에 한 두 차례씩 자신의 작업실(포항 양포)을 찾아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회원들은 조광래, 최도성, 송재진이었다. 최도성은 직접 작품을 구매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컬렉터를 대동하여 작품들을 사주기도 했다. 20133, 박기태는 30호 크기의 작품 70여 점을 새로 발견했다며 보러오라는 전갈을 해왔다. 그 때 즉각 응해주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러울 따름이다. 동년 101, 이수창의 입원과 별세(625) 소식도 모른 채 친구가 연락이 안된다며 서운해 하던 박기태는 그 자신, 친구 뒤를 따라 먼 길을 나서고 말았다.

 

 

 

주)

1) 한국수채화협회 : 1975. 9.13~19 안국동 미술회관에서 창립전을 가진 ‘한국수채화창작가협회’가 그 전신. 손일봉(고문), 배동신(회장), 박기태, 이수창, 박영성, 김인수, 유재우, 최쌍중, 정문희, 강영균 등 10명 참여. 현재의 명칭은 1980년 제5회전부터 사용. 역대 회장으로는 (1,2대는 회장 없이 운영),  3,4,5대 1980~1987 박영성, 6,7대 1988~1993 안영, 8대 1996~1998 박철교, 9대 1999~2001 임흥빈, 10대 2002~2004 전성기, 11대 2005~2007 전호, 12대 2008~2010 전성기, 13대 2011~2013 윤정년, 14대 2014~2016 유정근, 15대 2017~ 2019 박유미, 16대 2020~ 소훈

2)대한민국수채화작가협회 : 1983년 전주의 고화흠을 주축으로 전북미술회관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던 ‘수채신작파’가 그 전신. 1993년 제11회전(조선미술관) 때부터 전국단체로 확대. 1994년 6월, 광주남도예술관에서 개최되었던 제14회전 때부터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 2009년 문화관광부에 사단법인 등록(초대 이사장 윤길영)

3) 중앙일보, 1975.09.15. 창립전 1319일 안국동 미술회관

4) '한국수채화22인전·二水展 창립전 한국수채화22인작품집(예술문화사/2001) 전시회: 2001.5.22~31 동아갤러리 전관. 참여작가: 박기태, 성백주, 황규응, 이수창, 전상수, 이철명, 윤완기, 박광식, 전호, 박찬호, 안영, 구자승, 손장섭, 송용, 조광래, 홍정자, 정우범, 이중희, 이종만, 조혜숙, 이경희(1949~서울대 조소과. 한국수채화작가회 회원), 김재학.

5) 신혜영(갤러리 상 큐레이터), 진정한 인물 수채화의 회화성, 박기태수채전2001.4.28.~5.7

6) 박래경, 재인용 한국서양화대관(미술공론사/ 1992)

7) 한겨레신문 2001.04.20()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