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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현재진행형의 삶의 현장

즈음 2020. 8. 31. 21:05

골목, 현재진행형의 삶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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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의 피맛길이나 문경의 토끼비리는 우회의 길입니다. 우회의 길은 샛길이며, 잔도(棧道)같은 벼랑길입니다. 하지만 간섭이 부재하는 길입니다. 몸이 고단한 만큼 마음이 가벼워지는 길입니다. 거리낌 없는 바람이 부는 길입니다. 대로변을 걷는 것이 괜히 부담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다가다 주고받는 가벼운 눈인사라도 번잡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차량들이 모두 몰래카메라 같다는 망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골목길이 마냥 좋습니다.

 

몸속에도 길이 있습니다. 숨길이 있고, 핏길이 있고 밥길이 있습니다. 이 모두는 목숨길입니다. 목숨과 목숨을 잇는 길은 도리의 길이며 신과 이어지고자 하는 길은 구원의 길입니다. 강릉의 바우길, 지리산의 둘레길, 소백산의 자락길 등은 자연과 함께 하려는 상생의 길입니다. 놀멍쉬멍 걷자는 올레나, 물길 따라 걷자는 무레길은 제주사람들의 생각의 길입니다. 이처럼 이름 붙여진 모든 길들은 사람들의 입맛대로 역사와 경관, 웰빙을 한 밥상에 차려냅니다.

 

도회치고 달동네가 없을 리 없겠습니다. 골골마다 달빛 낮은 마을들이 살고 있습니다. 골과 골은 단절되지 않고 실핏줄 같은 걸음길을 이어냅니다. 골넘이를 하는 동안 가감 없는 삶의 모습과 맞닥뜨릴 수 있으니 올레의 의미가 없다고도 할 수 없으나, 골넘이 길은 놀멍 쉬멍 가는 길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길이 아닙니다. 골넘이 길은 관광자원도 아니고, 개발된 트레킹 코스도 아닙니다. 발걸음이 잦아서는 오히려 곤란해질 것 같은 길입니다. 인기척이나 개 짖는 소리에도 선뜻 미안함으로 잰 걸음을 부려야하는 길입니다.

 

 

2

 

골목 안에는 창문 크기만한 대문이나 무심코 노크를 할 것 같은 쪽창이 다닥합니다. 집들마다 시멘트반죽으로 제멋대로  요철을 만들어놓은 듯하면서도 삶의 지혜와 요량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과거를 여행하듯 현재진행형의 삶들을 직시합니다. 마구잡이로 앵글을 들여대기란 아무래도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은 나의 위로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폭이 상관없는 길, 막다름이 버젓한 데가 골목일 것입니다. 막다른 집은 막다른 골목이자 막다른 광장입니다. 거기에 밀실이 있습니다. 골목은 밀실로 회귀하지만, 밀실로부터 비롯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소설가 최인훈은 광장은 밀실이며 밀실 또한 광장이라고 했습니다. 대중의 밀실이 광장이요, 광장은 개인의 밀실이라는 것입니다.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잇는 골목은 통로라는 의미 이상의, 소통과 소외를 동시에 감수해야 하는 공간입니다.

 

골목은 빛바랜 시간들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바랜 빛들의 안식처이기도 합니다. 그늘 깊은 골목일수록 먹향이 짙습니다.

 

 

3

 

이어령 선생은 저서 디지로그에서 서양은 넣는 문화요, 동양은 싸는 문화라고 했습니다. 가방이 대세가 되자 보자기가 퇴출되었듯이 길을 만든 다음 집을 짓는 서양식 사고가, 생겨있던 집들 사이로 길을 텄던 우리의 의식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동네마다 삶의 우회처럼 달동네를 이루며 느린 시간의 보폭을 유지해 오고 있는, 그러나 이제 걸음들이 오르내렸던 그 곳까지 바퀴라는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길이 펴지고 넓혀지는 동안 이웃들의 얼굴 주름도 함께 펴졌으면 좋겠습니다.

 

서천이 바라보이는 웃동네, 뒤새 오르막길을 그렸습니다. 오르막길 그 너머는 하늘입니다. 언덕 너머는 누구에게나 미지의 세계여야 하겠지요. 어지러울 정도로 얽히고설킨 전선줄은 골목이, 동네가 열외의 공간이 아님을 역설합니다. 삶의 현장성을 조형화하는 또 다른 장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금, 기억의 원형을 더듬으며 골목들을 바라봅니다. 보존이냐, 개발이냐 라는 선택의 창이 아니라, 오로지 존재의 창을 통해서. 여전히 바퀴가 닿지 않는, 걸음의 오르막을. 그 막다름의 종점에서 안도하고 있을 어떤 마음을 짐작해보려 합니다.

 

기억장치가 작동 중에도 명멸되어가는 현상들은 사람이라는 시간일 것입니다. 빠르게 풍화되고 있는 건물이나 골목길들이 가리키고 있는 사람의 시간! 제어 없는 변화 앞에서 오히려 낯설게 안주하고 있는, 기억의 두레박으로 퍼올려지는 존재의 우물물임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골목은 타자의 시계로 나의 시간을 재는 또 하나의 통로임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