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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경북수채화의 뿌리, 경주예술학교

즈음 2020. 12. 17. 11:35

해방 이후 경북수채화의 뿌리, 경주예술학교

 

 

. 경북수채화의 뿌리, 경주미술학교

 

경북수채화가 해방 이전 <대구사범학교> 출신 작가들에 의해 발아기를 맞았다면, 해방 이후엔 <경주예술학교> 출신들에 의해 발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1,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되어 경북도와 분리되면서 대구-경북의 일체감은 차츰 느슨해져 갔다. 따라서 경북만의 수채화계보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경북엔 경주라는 일찍 개화된 도시가 있었고, 그 꼭지점에 손일봉(1906~1985)이 있었다. 경북만의 계보를 따져보아도 그 의미가 희석되지 않을 만큼 손일봉은 큰 봉우리였고, 이인성과 더불어 초창기 한국수채화 화단의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데에 이의가 없다. 손일봉은 1922<경성사범>에 입학한 이후 줄곧 경주를 떠나 있었기에, 대구화단이 수채화의 발생지로의 명성을 쌓을 동안 대구·경북지역과 활발하게 소통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1928자토회’ 3회전에 특별출품을 했는가 하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던 해인 19299월에는 조선박람회-신라전전람회장 장식화를 맡아 7년 만에 화려한 귀향을 한 적도 있었다. 박람회 기간 중에 들려온 제10제국미전입선(세 번째)이라는 낭보는 다시 한번 경주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조선미전경력만 해도 <경성사범> 3학년 때인 1924년 제3조선미전에 입선함으로써, 대구·경북을 통틀어 가장 앞선 기록을 세웠다. 이는 박명조보다도 2년 빠르다. 4학년 때엔 풍경으로 4등상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으며, 이 작품은 일본 궁내성에서 구입했던 7점 중 한 점이 됐다. 1942년에는 일본 북해도 최남단 도시 다코다테에 정착해 있으면서도 고향에서 개최되었던 향토미술전’(경주공립보통학교)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복기는 이 사실을 경주화단 60년의 발자취란 글을 통해 기록해두고 있다. 김복기는 이 향토미술전을 계기로 경주화단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고 보았으며, 손일봉으로서도 뒷날 귀국하여 경주로 복귀하고자 했던 하나의 기억이었을 것으로 최열은 보았다.

 

경북수채화는 대구·경북이 한 울타리였던 시대를 거슬러보더라도 전술한대로 손일봉이라는 뿌리에 다다르게 됨을 알 수 있다. 손일봉은 일본에서 귀국한 1946, <경주예술학교> 초대교장으로 부임하여, 이수창, 박기태, 김인수 등을 1회 졸업생으로 배출했다. 이들은 수채화뿐만 아니라 경북미술 2세대 작가군으로 경북 각지에 서양미술을 전파해 나갔다. 손일봉 역시 1971<수도여사대(현 세종대)> 교수로 초빙되기 전까지 대구·경북의 여러 지역에서 중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정년퇴임 때까지 교육자로서의 길을 함께 걸었다. 이렇듯 해방 이후 <경주예술학교>를 정점으로 하는 일군의 작가들은 해방 이전 <대구사범학교> 출신 작가들과 더불어 경북미술(수채화)의 선구자로서 큰 맥을 형성했던 것이다.

 

경주에서 <경주예술학교>가 태동된 의미는 이중희가 대구미술을 논하면서 대구정신으로 명명한 애국·애족적 의식을 가진 지역 최고의 지성인들이 최초의 문화예술담당자였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경주의 지성인들은 광복 이후 경주문화협회를 결성하고 194655, 지방 최초로 <경주예술학원>을 창립했다. 정식 4년제 미술교육기관은 아니었지만, 당시 신문은 미술부의 학생이 37명이었고 9월에 대학으로 승격될 예정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인해 휴교와 운영주체가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마침내 음악과가 폐쇄되고 미술과만 남게 되었다. 194812, 세 번째 운영주체인 만송재단이 학교를 양도한 이후에야 첫 졸업식이 이뤄지게 됐다. 만송재단은 1949426일 학무국으로부터 3년제 승격 인가를 얻고 510일부터 12일까지 경주박물관에서 졸업작품전을 열면서 11일에 제1회 졸업식을 개최하게 되었다. 졸업장을 받은 사람은 총 열 한명으로 김인수, 박해룡, 사공침, 이경희(대구의 이경희가 아님), 이수창, 조남표, 조희수(1927~경주), 박기태, 최동수, 박재호(1927~2015 경주), 배원복(1926~2015 포항) 등이었다. 그 중 경북수채화의 원류가 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박기태(1927~2013 울산), 이수창(1929~2013 의성), 김인수(1930~1991 울산)였다. 함께 입학했던 이수원(울산)1년 중퇴를 했으며, 고향 울산으로 돌아가 초대 울산미협 회장을 엮임하는 등 그 역시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박재호는 졸업 후 <서라벌예술대학>을 거쳐 <계명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며 배움에 대한 열망을 완수했다. 고향에 착근한 이후 <근화여중·> 교사, <영남대><동국대경주캠퍼스> 강사 등을 역임하며 경주화단의 디딤돌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19703, 4대 경주미협 회장에 취임한 이래 19822월까지 10여년 넘게 단체를 이끌기도 했다. 197910월에 시작된 신라미술대상전탄생에 일조했으며, 첫 번째 공모전을 주관했다. ‘73년부터는 제8대 예총경주지부장을 겸하면서 ’7911대까지 경주예술 전반을 조율했다. 1984안동미협과 협력하여 경북미협을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아 경북미술의 초석을 놓은 것도 그의 몫이었다. 1954년 첫 개인전 이래 ‘79년까지 경주와 대구에서 6회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65년부터 ‘79년까지 국전에도 10회 입선했다. ’신미술회회원으로 활동했던 박재호는 작가노트에서 신라 불교미술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자신의 작업임을 적시했다. 개성이란 대상에서 어떤 성격을 발견하는 것이며, 자신 역시 경주화가로서 불교미술을 현대화하는 것이 개성의 발현으로 믿었다. 1981년 경북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88년에는 경북도전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고희를 맞아서는 시집 비단 그림을 출간하여 문인으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경주예술학교>는 사상문제와 재정난 등으로 결국 폐교가 되고 말았는데, 초기 예술학원 설립에 관여했던 주경(1905~1979)의 회고는 학교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경주지역 선각자들의 상실감이 어땠을 지에 대해 되짚어보게 한다. 그중에서도 끝까지 학교를 지켜내려 애썼던 김준식(1919~1882)의 마음이 가장 혼란스러웠을 법하다. 주경은 공립 <경주여중> 설치의 명을 받고 초대교장에 부임하게 된 뒤, 이 학원의 해산을 막기 위해 좀 더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지 못했던 자신을 후회했다. "이 무렵 어느 단체에도 있었던 좌익계의 세력이 예외 없이 그들의 마수를 예술학원에도 침투시켰음을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다." "3년간이나 예술학원을 운영해 오던 그들도 감당할 수 없는 운영난에 그만 손을 놓고....1만여 평의 옛 구역 자리를 국가에 반납하고는 모두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어렵게 졸업했던 몇 몇 분들에 의해 경북수채화의 맥이 경북 북부지역으로 뻗어나가게 되었음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일이며, <경주예술학교>라는 존재 역시 한국미술사에서 간과하지 못할 한 페이지를 담당했다고 믿는다.

 

. 시대의 우울

 

손일봉은 뒤에서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시대의 격랑 속에 자신의 재능이 오히려 핍박 받는 운명에 부대끼기도 했다. 자의든 타의든 시대를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분명 시대의 우울이며 한국화단사의 흑역사 임에 틀림없다. 해방 공간에서 친일반공이라는 화두는 화가들을 결코 떼어놓지 않았다.

 

손일봉의 <경주예술학교> 제자인 김인수(1930~ 울산)와 조희수(1927~ 경주)의 예에서도 절박했던 시대의 우울을 만날 수 있다. 김인수가 안동에 정착하기 전, 부산에서 문신(1923~1995)이 운영하던 아미서비스센터에서 잠시 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전 안동미협 회장 신동국에 따르면, 아미서비스센터란 미군들에게 그림을 그려 팔기 위한 작업장이자 판매소였다고 했다. 신동국은 ’8512월부터 익년 2월까지 문신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했던 전력이 있다. 신동국의 부친이 문신과 친구 사이로 조각을 전공했던 아들을 조수로 의탁했기 때문이었다. 신동국이 사립공채에 합격해 안동 <성희여고>로 떠나게 되자 문신은 1년만 하고 되돌아오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문신 작업실에서 기숙하며 일하는 동안 신동국은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아미서비스센터에 김인수를 받아들인 일화 역시 그 때 들었던 한 토막이었던 것이다.

 

<경주예술학교>에 적을 두었던 이들은 결단코 학교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했다. 재학 당시 경주는 제2의 제주도라 불릴 만큼 좌우익 간의 갈등과 대결이 극심했던 곳으로, 특히 <경주예술학교>를 설립했던 이의성(음악)의 동생들과 음악과 교수들이 월북했던 까닭에(음악과 폐지) 대학 자체가 용공세력의 본거지로 낙인찍혀 버렸기 때문이다. 이후의 살얼음판 같던 시절을 감내해왔기 때문이었을까, 당시 <경주예술학교> 출신들은 자신의 전력에 대해 함구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망각했다고 믿기까지 했다고 한다. 경주의 최용대가 <경주예술학교> 사료 발굴 차 울산의 이수원을 찾았지만 대담에는 실패하고, 대신 울산 출신 화가 김상원(1957~ )의 기억을 채록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경주예술학교> 졸업 후 고향 울산에 돌아와 있던 김인수는 <경주예술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프락치로 몰려 울산경찰서에 붙들려 갔다. 내일이면 사형에 처해질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 내몰렸다. 때마침 도경찰국장 순시가 예정되는 바람에 김인수는 브리핑 준비에 차출되어 밤새 차트제작에 매달렸다. 그의 노고를 인정한 서의 간부 한 사람이 혹 다시 붙들리게 되더라도 절대로 자신의 이름을 대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생할 수 있었던 김인수는 한국동란 중 군작전과에서 복무를 했으며, 후에 무공훈장까지 받게 되었다. 문신이 운영하던 <아미서비스센터>에 머물렀던 시기는 울산에서 도망쳐나온 직후였는지, 아니면 제대 후 안동으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때였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함께 <경주예술학교>를 졸업했던 경주의 조희수(1927~ 경주)도 밀양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4년간 교직에 머물다가 우연히 알게 된 군인의 소개로 1953년 국방부에 근무하게 되어 서울에서 터전을 잡았다고 했다. 이 이야기에 대한 구체적인 기사가 있어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조희수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밀양으로 가 <밀주국민학교>에서 4년간 임시직으로 일했는데.....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 학교는 군병원이 되고 병원장의 추천으로 군복무로 미술관련 업무를 하게 된다. 장교 한 사람이 국방부에 추천해 1953년부터 근무했고, 1956년 국전에 출품한다.” 이처럼 군무원이 되었다는 것은 곧 자신의 신분을 확실하게 세탁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쟁 통에 종군화가단이 꾸려진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 미완의 그릇, 손일봉(孫一峰 1907~1985)

 

손일봉(孫一峰 1907~1985)에 대한 중앙평단의 시각은 여전히 냉랭해 보인다. ’조선미전을 통해 각광받던 신예였으나, 새로운 사조를 외면한 채 인상주의나 사실주의에 매몰된 친일 성향의 작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동시대의 화가 오지호(吳之湖, 1906~1982)와 비교를 해봐도 폄하된 작가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제자 이수창은 영남의 손일봉, 호남의 오지호라는 말을 남겼지만, 한국미술사 속에서의 손일봉의 위상은 현재까지도 보류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윤범모는 조선미전참가여부 사실만 가지고 항일 혹은 친일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고 했다. 최열은 총독부가 국가 규모의 공모전을 만든 것은 식민지 화단의 상징이요 식민지 미술활동의 현실이었다며, 그 기구에 참가 또는 불참 여부가 곧장 민족 또는 친일 미술활동을 가르는 잣대가 아니며, 잣대의 알맹이는 어떻게 참가했으며 어떻게 참가하지 않았는가에 있다고 하였다. 특히 황국신민의 일원으로 반도총후에서 성전에 회화봉공했던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 등은 해방 직후 결성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친일활동작가라고 하여 제외되었으나 후에 화단의 지도급인사로 부상되어 커다란 영예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손일봉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일본땅에서 교직자로 안주했다는 이유만으로 회화봉공했던 화가들 이상으로 혹독한 외면을 받은 것이다. 그만큼 역량과 비중이 컸던 작가였기에 그에 대한 배신감이 더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심증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손일봉은 19462월 귀국 후 고향 경주에서 교육자의 길을 다시금 잇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일본 땅에 있었기 때문에 일제 말기 친일부역자로 이름을 올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역설적인 생각 또한 보태게 된다. 손일봉의 작품 속엔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고 협력했던 특정 주제와 내용이 담긴 그림을 찾아볼 수가 없다. 비록 귀국이 늦어져 중앙화단으로부터 국전 참여나 교수직 등 기득권 대우를 받을 기회는 상실되었다손 치더라도 손일봉은 창작활동 그 자체에 무게를 두고 스스로 정진했다. <경북대학교> 박남희(1951~2016 대구)교수는 손일봉의 공직생활 기간을 2기로 분류하며, 이 시기를 붓을 꺾고 공직생활에만 몰두했던 예술적 공백기가 아님을 강조했다. <영주여고> 교장시절인 1956, 초라했을망정 <영주중부국민학교> 강당에서 생애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는가 하면, 가가호호 방문하여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설득하며 자녀를 입학시키도록 해 지방여성교육의 토대를 세웠던 일화는 손일봉의 상록수정신을 읽게 한다.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 시절 <오타니고등여학교> 미술부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언제든지 찾아와 그림을 그리게 했던 일화 역시 그 연장선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처럼 손일봉의 예인적 자질 속엔 인류애적 보편성과 교육자적인 본성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마인드는 당시의 우리나라 현실에 비추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할 것이다.

 

손일봉은 정년퇴임한 뒤 서울로 올라간 1974, 뒤늦게 국전 초대작가가 되었으며, 1975년에는 신미술회창립에 참여하는 등 뒤늦게 예술가로서 만개했다. 손일봉은 화우나 후배들에게 北海道 이후 30년 헛되었던 세월을 어찌 되찾겠느냐고 마음 속 회환을 자주 토로했다고 한다. 그만큼 예술가로의 자기회복에 대한 의지와 다짐이 절실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하겠다. 손일봉은 4년간의 서울 생활을 마치고 대구로 낙향하여 1979한유회를 창립하고 후배들에게 한국적 유화의 기치를 내세웠다. 그 자신 세계를 연구하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던 거장의 모습을 온전히 전수했던 것이다. 손일봉은 19851129, 이목화랑에서 개최됐던 신지식 판화 개인전개막식에 참석했다가 졸도,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타계했다. 장례식은 <남도초등학교>에서 미협장으로 엄수됐다. 이처럼 작고하기 전까지의 15년이 손일봉을 한국화단의 거목으로 각인시킨 후반기 삶이라고 하겠다.

 

만년의 손일봉은 거의 유화에만 천착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수채화라는 매체를 결코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의 화가적 생애를 통틀어보아도 유화와 수채화의 비중은 거의 등가의 가치임을 알게 된다. 화가의 시작점인 조선미전연특선의 작품들 모두 수채화였음은 물론이고, 해방이후 한국수채화화단의 초창기 단체마다 그 이름을 올려놓았다. 심지어 스승의 수채화에 감화를 받은 박기태, 이수창, 김인수는 평생 수채화가라는 자부심을 버리지 않았을 정도로 손일봉의 수채화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경북수채화의 맥이라는 명제도 손일봉-이수창-조광래로 이어지는 화풍 속에서 그 계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 논고에서는 전술했던, 일본체류에 관한 에피소드에 대해 좀 더 부연해 보기로 한다. 손일봉은 동경 <우에노미술학교(上野美術學校)>를 졸업한 뒤 1931년 미키코(幹子) 여사와 결혼하여 북해도(北海道)에서 8년간 교편을 잡았다고 되어있다. 왜 손일봉은 해방을 맞아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북해도에 눌러앉은 것일까? 귀국이 늦은 것에 대해 이구열(1932~2020 연백)당시로서는 대단한 기록이던 제전 연 입선의 비범한 신예작가로 주목을 받는 가운데 1934년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였던 손일봉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변방인 북해도로 가서 미술교사 생활로 안주하며 일본에 계속 머무르게 됨으로써 작가적인 자기도약의 정체는 물론, 서울의 민족미술계와의 유대도 필연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책으로 귀결되게 하였다.”고 했다.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교수 김창락(1924~1989 성주) 역시 귀국 후 한 때는 지난날의 선전과 제전 등에서의 활약으로 인하여 친일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화단에서 다소 소외된 입장에서 지나게 되었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김창락은 후에 손일봉이 중등학교를 정년퇴임하자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세종대학교>에 초빙교수로 추천했다. 대구 <계성학교>시절 스승이었던 서진달(1908~1947 대구)의 전임으로 직접 배우지는 못했지만 늘 존경하던 작가였기 때문이었다고 했다.(김영동)

 

손일봉이 북해도로 간 이유에 대해 홋카이도립 하코다테미술관 학예과장 이우치 카쓰에는 손일봉의 차녀 손도자의 말을 빌어 이렇게 증언했다. “....순조롭게 도쿄에서 화가로서의 지위를 구축해나갔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하코다테의 여학교로 취직하게 된 것은 남동생 분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큰 형인 손일봉 화백을 찾아 도쿄에 도착했던 동생이 손일봉 화백과 만나기 전에 징용되어 버렸고, 아무래도 홋카이도 유바리 지역 탄광에 있는 것 같아 동생을 찾기 위하여 홋카이도에 취직했다고 합니다......손일봉 화백의 노력으로 동생은 징용에서 해방돼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손일봉 화백은 그대로 하코다테의 <오타니고등여학교>에서 계속 교편을 잡았습니다.” 손일봉은 1937년 봄 하코다테의 불교계 사학인 <오타니(大谷)고등여학교>에 취임하여 1943년 가을까지 근무했다. 이후 함께 근무했던 와타나베 코유의 주선으로 공립학교인 <하코다테공업학교>에 정시제교사로 채용되어 더욱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었다. 1년 정도 근무했을 즈음, 해방(일본 패망)이 되었고 일본 국적이 아닌 자는 공립학교 교원자격이 부적합하다는 부령에 따라 실직을 하게 되었다. 어렵게 버티던 손일봉은 1946131일 식구들(아내와 자녀 3)과 함께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아내 미키코는 한국행에 대해 몹시 불안해했으며, 이 상황을 원망스러워하기까지 했음을 와타나베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손일봉은 비록 조선인이었지만 <동경미술학교> 출신이라는 긍지를 갖고 당시 쉽게 채용될 수 없었던 중등학교 교원으로서 대접받으며, 또한 존경받는 화가로 살아왔었다. 귀화를 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귀국을 위해 준비하던 당시의 상황을 와타나베는 이렇게 묘사했다.

 

가재도구를 실은 무거운 짐이 5개 있었습니다. 너무 무거워 제가 선생님께 2~3개는 포기하고 출발하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한 개는 등에 묶어서 짊어지고 1개는 그 위에 올리고, 양손으로 1개씩 들고 1개는 입에 물어서 배와 열차를 탈 것이니 괜찮다고 답하셨습니다.”

 

2014,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기획한 영남의 구상미술전은 손일봉이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현장을 기록했던 그림 다수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성과를 거뒀다. 전시를 기획했던 학예사 박경숙은 이번 전시의 백미는 유일하게 지역출신 종군화가로 활동하였던 손일봉의 1951년 포항 형산강 전투를 기록한 작품과 병사들의 드로잉 시리즈’”라고 하면서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굴곡진 역사를 그대로 반영한 작품으로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전쟁기록화이며 이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우리 근대미술사에서 자료의 공백 상태로 남겨진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형산강 전투’(1951. 33.5x50cm, 재생지 위에 수채)는 속필로 그린 수채화지만, 포탄이 떨어지는 물기둥 사이로 상륙작전을 펼치는 국군의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펜과 연필, 담채로 그린 병사 시리즈’ 4점 역시 그림을 그리는 모습과 수류탄을 던지는 자세, 총을 맨 병사 등 다양한 상황을 정확한 데생력을 바탕으로 그린 소묘들이다. 당시, 많은 화가들이 종군화가단에 참여했던 것은 생활고를 해결할 방편 외에도 신분에 대한 안심효과도 작용했다. 손일봉의 경우 <경주예술학교> 시절 좌익학생들에 의해 친일인사로 몰려 교장 직에서 쫒겨 났던 전력이 있다. (이애선은 재단의 경영난으로 인한 급료문제로 보기도 한다.) 이렇듯 당시의 화가들에겐 사상문제만큼 민감하게 대처할 일은 달리 없었을 것이다. 전쟁 와중에는 더더욱 반공이라는 사상적 해명이 적극적이어야 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소백

 

                                         손일봉,  '형산강 전투'  포항시립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