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57

영주 최초의 모더니스트, 권진호

영주 최초의 모더니스트, 권진호(1915~1951) ‘대구미술100년전’ 도록을 몇 장 넘기다가 ‘권진호’라는 생소한 작가 앞에 문득 손길이 멈췄다. 출생지 ‘영풍’이라는 글자가 눈길을 확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근대기 영주 출신 작가 한 분과 조우케 된 순간이었다. 당시 ‘영주현대미술50년사’를 전시도록이나 경북예총지 등에 약사(略史)로 발표하며 지역미술사 정리에 매진하고 있던 터라 새로운 광맥을 발견한 듯한 흥분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후 틈틈이 권진호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안동사범 11회 동기회 카페’를 발견하게 됐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셨던 권오규 선생의 부친이었다는 사실도 확인케 되었다. 카페엔 선생이 그린 수채화들이 소개되어 있었고, 부친 또한 화가였다며 부전자..

artist 2021.08.17

경북화단의 시발점, 손일봉(1907~1985 경주)

경북화단의 시발점, 손일봉(1907~1985 경주) 손일봉은 경주 월성 태생으로, 지방 출신으로는 드물게 1928년 를 졸업했다. 재학시절인 ‘25년~‘28년 사이 선전(鮮展)에 입선 1회, 특선 3회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거두며 미술분야에서도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1928년 졸업 후 부설 보통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자칫 초등교원으로 머물 뻔 했던 손일봉의 재능을 아까워했던 일본인 교장의 추천으로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1931년 일본여성 미키코(石川幹子)와 결혼을 했으며, 1934년에 동경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중이던 ‘28년~‘31년 사이 일본 제전(帝展)에서도 4회나 입선했다. 졸업하던 해 서울 대택상회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손일봉은 동경으로..

artist 2021.06.11

근원(近園) 김용준(1904~1967 선산)

근원(近園) 김용준(1904~1967 선산) 90년대 초 글쓴이가 모 사립 여중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을 때, 가장 마음이 통했던 분이 국어과 임선생이었다. 임선생은 겸손이 몸에 밴 사람으로, 호 또한 우곡(愚谷)이었다. 늘 책을 가까이했던 임선생은 학교 도서관을 자신의 별장인 냥 아끼고 사랑했다. 공립학교로 나온 지 일 년쯤 되던 해였다. 우곡과 둘만이 스모노 안주에 관한 한 원조를 자부하던 수생집 골방에다 전을 폈다. 얘기가 한창 무르익어가던 도중에 우곡이 슬그머니 일어나 방을 나갔다. 화장실에 가나보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얄궂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불현듯 우곡이 돌아왔다. 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그 사이 몇 백 미터나 떨어진 스쿨서점에 다녀온 거였다. 불쑥 건..

artist 2021.05.20

월남작가들의 스승 월계 계삼정

월남작가들의 스승 월계(月桂) 계삼정(1910~1993 평양) 2012년 6월, ‘계삼정유작전’이 영주문화예술회관 철쭉갤러리에서 개최됐다. 풍경, 인물, 정물, 동물, 불상, 반구상 등 다양한 소재와 경향을 보여주는 80여 점이라는 적지 않은 작품들이 유족들(장남 계재영)에 의해 공개되었다. 특히 5~60년대 풍기 근교의 풍경화들은 투박한 붓질과 질박함으로 인해 그 시절의 정경이 더욱 정감 있게 다가왔다. 화가라는 존재 역시 지역의 역사, 풍물 등을 시각언어로 기록하는 사학자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비록 소품이긴 하지만 6.25 전쟁의 상흔을 담은 두 점의 피난민 그림에서는 탈북민이 겪었던 시대의 아픔도 공감하게 된다. 계삼정은 한일합방 국치년이던 1910년 5월 25일, 평안남도 평..

artist 2021.04.30

국토를 빚지게 한 야송 이원좌

국토를 빚지게 한 야송(野松) 이원좌(李元佐, 1939~2019) 야송 이원좌는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 이래 한국산수의 정통성을 현대적으로 재창출했을 뿐 아니라,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작가라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정선이 ‘겸재준(謙齋皴)’을 통해 조선의 실경이자 이상화된 산수인 진경산수를 개창 했듯이, 이원좌 역시 ‘야송준(野松皴)’을 통해 20세기 이후의 한국 산천을 자신만의 진경으로 이상화시켰다. 준(皴)은 일종의 터치법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의 산세나 암석의 모양에 따라 창안되었다. 준(皴)은 특히 산수화에 있어서는 영혼과 같은, 작가의 개성과 능력을 알아볼 수 있는 요체로 인식되고 있다. 미술평론가 김상철은 “야송준이라 부를 수 있는 그의 준법은 ..

artist 2021.04.30

한국 인물화의 큰 산맥, 김호걸

인물화의 큰 산맥, 김호걸(金虎杰, 1934~ 영주) 김호걸은 1934년 영주시 이산면 ‘두암고택’ 장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서울로 유학을 떠났으나 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으로 내려와 를 다녔다. 졸업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 에 적을 두었으나 4학년 때 6·25전쟁이 터져 또다시 고향으로 피난을 내려오게 됐다. 그리하여 에 적을 둔 채 당시 영주지역 유일의 를 졸업했다. 당시 소속의 이동수라는 분이 겸임교사로 미술과목을 가르쳤다고 한다. 김호걸은 걸출한 재능과 학업성적으로 회화과에 입학했고, 1957년 졸업했다. 이후 와 에서 10년간의 교사 생활을 한 뒤 지금까지 전업작가의 한 길만을 걸어오고 있다. 김호걸의 근성과 장인기질은 어린 시절부터 단련되어왔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2014년, 서울 ..

artist 2021.04.18

Drawing, '생각의 놀이터' 展

드로잉, 생각의 놀이터 세계적 화상이자 드로잉 콜렉터 얀 크루거는 ‘드로잉은 인간의 첫울음’이라는 다소 자의적이고도 확증적인 말을 했다. ‘유화는 분식할 수 있고, 겹겹이 덧칠할 수도 있고, 다시 그릴 수도 있지만, 드로잉은 눈속임이나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드로잉은 작가의 깊은 내면세계, 원시성과 닮아있다.’라고 드로잉 예찬론을 펼쳤다. 우리나라에도 정신과 의사이자 『화골』의 저자 김동화라는 분이 그런 생각의 동조자이다. ‘작가의 예술적 발상과 창작의지가 담겨 있어 작가의 내면이 가장 잘 드러나며 작가의 진정한 실력은 드로잉에 있다.’고 맞장구를 친다. 과연 드로잉이 그만한 가치와 공감의 지평을 확보하긴 한 것일까. 일단은 개인의 심미안이나 선호심리에 기인한다고 쳐놓자. 그렇지만 드로잉의 가치와 가격이..

artist 2021.02.18

경북미술사 - 경북북부지역 구상미술의 선구자 류윤형

경북북부지역 구상미술의 선구자 류윤형(1946~2014) 2020년 12월, 류윤형 회고전 ‘시간 속을 흐르는 자연의 빛’전이 안동문화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됐다. 문득, 영주시민신문에 연재했던 ‘영주미술기행’ 류윤형 편이 떠올랐다. 이 글은 다시, 2016년에 출판한 ‘기억과 흔적, 송재진의 영주 · 경북미술 순례기’에 실렸지만 너무 간략한 스케치여서 이번 기회에 명암도 뚜렷이 하고 색도 입혀보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글쓴이의 기억과 경험치를 최대한 발휘하여 고인의 생전 모습을 기려보고자 한 것이다. 새로 썼다고는 하나 그 바탕엔 예전 글을 분산시켜 재배치했으며, 다만 개작 수준의 살붙임을 했다는 것만으로 다소간 위안으로 삼는다. 류윤형은 생전 글쓴이에게 동문전을 추진해보라는 당부를 여러 차례 했었다. 꽤 ..

artist 2020.12.23

영양미술의 뿌리, 금경연

대구사범학교와 화가 금경연(1915~1948 영양) 1 해방 이전 경북화단의 발아기를 책임졌던 작가들 중 국내파로는 출신들이 단연 손꼽힌다. 은 1920년대까지 일제강점기 하에서의 중등미술교육을 도맡았던 국내 3대 사범학교 중 하나였다. 당시 사범학교나 는 모든 이가 선망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교였다. 한국 최고의 근대교육기관이었던 은 1921년에, 과 은 1929년에 관설되면서 ‘심상과’가 설치되었다. (경북대 사범대 전신)은 전국 각지에서 최고의 수재가 모이는 학교로서 면내 소학교 전체에서 1, 2등을 해야만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졸업하면 당시 엘리트 직업인 교사직이 보장되는데다 5년간 학비가 전액 면제되기 때문에 빈곤층이 절대다수였던 조선인들의 입학경쟁이 치열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에..

artist 2020.07.07

'삭임'의 예술, 수채화가 조광래

‘삭임’의 예술, 수채화가 조광래 1 그림은 그리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흉중의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려고 하는 것은 의지의 차원이고, 끄집어낸다는 것은 실천의 영역이다. 의지는 미완의 그릇에 불과하지만, 실천은 그릇을 완성시킨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조광래는 지붕과 벽체가 없는 화실에서 풍경화를 그렸고, 갇힌 곳에서는 소묘나 정물화를 그렸다. 그린다는 행위의 쉼 없는 반복은 손의 기억을 독려하는 일이다. 수천점이 넘는 그의 그림들은 손이 기억해 낸 결론들이다. 보이는 실경은, ‘보는 진실’ 때문에 그려진다. 화가는 그림이 될 것 같지 않는 일각에서 구도를 본다. 이인성의 계산성당 같은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이다. 조광래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풍경화들도 그렇게 그림이 됐다...

artist 2020.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