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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수채화의 계보

즈음 2020. 11. 14. 15:16

 

대구수채화의 계보

 

근대기 대구는 경북뿐만 아니라 영남의 중심지였다. 일제시기 지방으로서 평양과 더불어 미술인구가 가장 많았던 곳이기도 하다. 대구의 서양화단은 처음부터 수채화로 시작했으며, 한국근대미술의 시작과 그 맥을 같이 했다. 이상정(1897~1947)-서동진(1900~1969)-이인성(1912~1950)-이경희(1925~2019)로 이어지는 수채화 계보는 1920년대부터 대구서양화단을 형성시킨 주맥이었다. 1926박명조(1906~1969)가 대구작가 중 처음으로 조선미전에 입선한 뒤 이상정에 이어 대구에서 두 번째로 서양화개인전을 열었으며, 이듬해엔 서동진(1900~1969)수채화개인전을 개최하면서 대구는 한국수채화의 출발선상에 위치하게 되었다. 1930향토회가 조직되는 등 대구는 민족주의와 예술의 순수주의를 아우르는 근대미술 사상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수채화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이인성과 박명조 등 천재성을 지닌 작가들을 발굴했던 서동진은 이후 정치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고, 이인성 못지않은 천재적 자질을 갖췄던 김용조(1916~1944)는 아깝게도 20대에 요절했다. 박명조의 사촌으로 선전을 통해 역량을 인정받았던 박재봉 또한 만주로 떠난 뒤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던 이인성마저 1944년 서울로 올라감으로써 대구수채화 화단은 마침내 적막해지고 말았다. 서울에 입성한 이인성은 이듬해 <이화여자중등학교>(현 이화여고) 미술교사로 근무하며 미술부를 창설했으며, 1947년에는 심형구가 주임으로 있던 <이화여자대학교>의 서양화부에 시간강사로도 출강했다. 그해 8월에는 좌익성향의 조선미술동맹을 탈퇴하고, 김인승, 박영선, 남관, 이봉상, 손응성 등과 함께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중앙화단의 실세로 자리를 굳혀나갔다. 1948년에는 성북동에 국화회 회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수채화와 유화를 지도했으며, 동년 6자유신문사후원으로 동화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처럼 순항하던 이인성은 한국동란의 와중에 경찰이 쏜 총탄을 맞고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이는 대구화단사의 가장 충격적인 일로 기록될만한 사건이었다.

서동진  자화상

 

이인성   계산성당  1930년 경  35.5x4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렇듯 해방 이전 한국수채화 화단의 뜨거운 감자였던 대구는 해방 이후엔 이렇다 할 수채화의 맥을 형성하지 못하고 개별적인 기량에만 의존하는 듯이 보였다. 1949, 해방 이후 처음 개최되었던 국전에서 <대구공고> 교사였던 이경희가 포항의 부두로 특선을 했을 때 심사위원이었던 이인성은 긴 문장으로 호평을 했다. 당시 한강 이남에서 서양화 특선으로는 유일했던 일이어서 언론사에서도 대서특필을 했다. 이는 대구화단의 경사기도 했지만 대구가 여전히 수채화의 본고장임을 널리 알린 쾌거였던 것이다. 독학 화가 이경희를 수채화가로 당당히 인정한 첫 국전의 심사위원이 바로 이인성이었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했지만, 이경희는 19505, 문교부에서 실시했던 전국교육대회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인성을 보았으며, 사적 대화는 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경희는 동란 이후, 강홍철, 오석구, 김수명, 이복, 김진태 등과 함께 팔공회라고 하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으며, ‘대구미술협회의 부회장을 맡는 등 화단활동이 활발했으나, 수채화 장르에 대한 독립적 의미를 굳이 부여한 것 같지는 않다. 이경희는 수채화만 고집한 것이 아니라 유화도 병행하며 국전 첫 회부터 꾸준히 출품을 했다. 그러나 1962년 제11회전 때 국전 추천작가가 됐을 때의 출품작이 수채화였을 정도로 수채화에 대한 애착은 지대했다.

박명조   시골길  18x56.5cm  연도미상  개인소장
이경희    온실 앞   76x106cm  1953   개인소장

195611, 이경희는 한국 최초의 수채화단체인 현대수채화협회 창립전(동화화랑, 서울)의 맴버가 되었다. 고화흠(1923~1999 회장), 최덕휴(1922~1998 홍성), 임직순(1921~1996 괴산), 이규호(1920~서울), 이종무(1916~1993 아산), 장리석(1916~2019 평양), 유경채(1920~1995 해주), 이준(1918~ 남해) 등 당시 화단의 중추적인 작가들이 망라된 단체에 이름을 올리게 됐던 것이다. 신항섭은 창립맴버들의 면면이 말하고 있듯이 당시 화단에서 지명도가 높은 작가들도 수채화를 병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친목 성향에 머물렀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는 이후 8회의 전시회를 이어나갔다. 이들 중 오리지널 수채화작가라고 할 만한 이는 이경희와 고화흠 뿐이었다. 이경희가 대구를 대표하여 참여했다면, 고화흠은 전북을 대표했다. 이즈음 손일봉(1906~1985 경주)은 경북의 <영주여중고> 교장으로 재직하며 화단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지만, 1956년 자신의 두 번째 개인전을 <영주중부초등학교> 강당에서 개최하는 등 화가로서의 본성을 지켜 나가고 있었다.

 

50년대가 다 지나갈 즈음까지 대구에서 기성 작가들에 의한 단체결성은 여전히 감감했지만, 대구수채화화단을 책임질 어린 싹들은 교육현장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1956년 대구 시내의 남·여 고등학교 학생들의 연합써클인 대구학생화우회를 필두로, 1958미우회, 1962미구회, 1963젊은 ART’ 등이 결성되며 활기찬 활동들을 펼쳐보였다. ‘대구학생화우회의 지도교사는 <신명여중고> 미술교사였던 장석수 였으나, ‘미구회창립 때는 이복(대건고), 강홍철(영남고), 이경희(경북여고), 박기태(대구여중고) 등이 지도교사로 참여했다. 후일 대구수채화협회를 창립하거나 맴버로 활동하게 될 정일, 김응곤, 박찬호, 고찬용, 정세유, 성병태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던 학생화가들이었다.

 

같은 영남권이지만 부산의 수채화단체 결성은 대구와 호남보다도 빠른 ‘786월에 황규응(1928~2004 기장), 안세홍(1939~2011 양산) 등이 주축이 되어 부산수채화협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5, 부산 로터리화랑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다. 한 달 전인 4월엔 한국수채화협회에서 네 번째 전시회를 한국수채화가협회전이라는 명칭으로 덕수화랑에서 개최했으며, 회장 박영성은 <서울예고>에서 <인하대> 미술교육과 교수로 전임했다. 그 해 한국수채화협회를 탈퇴했던 박기태와 전상수는 공교롭게도 같은 장소에서 수채화2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도쿄 <다마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이우환(1936~ 함안)도 진화랑에서 수채화와 드로잉전을 개최하며 70년대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처럼 70년대는 수채화에 대한 붐이 경향을 대표하는 두 도시로 확대된 해였다. 또한 전국 5개 지역의 교육대학이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며 미술학과가 설치되는 등 지방의 미술교육이 한층 강화되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단체결성이 전국적인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831월에 <원광대> 교수였던 고화흠은 선 · 후배들과 함께 전주에서 수채신작파를 창립하고 전북예술회관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마산에서도 동년 4류시원(1928~2014), 안재덕(1956~1992), 이상남(1941~), 김태홍(1946~), 조현계(1946~) 5명이 동서화랑에서 경남수채화협회 창립전을 열었다. 좌장이라고 할 류시원은 67년부터 ‘75년까지 <안동고><안동여고>에서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귀향한 지역의 최원로급 인사였다. 대구에서도 동년 5, 강근창(1937~ 안동), 정일(1940~2005), 이묘춘, 최영조, 박찬호, 백경원, 성병태 등이 대구수채화협회를 창립했다. 이로써 한동안 잊히었던 대구수채화의 자존심을 되찾을 구심점이 만들어졌으나, 그러나 좌장이 되어야 할 이경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구수채화협회가 창립되었던 ‘83년엔 강근창이 이경희의 뒤를 잇는 국전의 수상자가 되었다. 대구광역시교육청 중등장학사의 신분으로 제2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부인상'으로 특선을 받은 것이다. 여세를 몰아 강근창은 이듬해 대구 태백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서울에서는 박기태가 호남수채화의 태두 배동신, 동갑내기 전상수와 함께 신세계미술관에서 3인전을 개최(1983)하는 등 한국수채화화단의 실세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대구수채화협회는 2회전부터 수채화 한길만을 고집하는 고찬용나원찬(울산), 윤정방 뿐만 아니라 이국봉(이경희의 자) 등 전도유망한 서양화가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90년대 초까지 김응곤, 김일동, 손문익, 정세유, 이일남, 김재오, 이원영, 김성균, 이영희, 김상용, 송재진 등 세대와 지역 간 스펙트럼을 넓혀가며 대구수채화의 맥을 확장시켜 나갔다. 19925, <대구미술관>이 개관 1주년을 기념해 박기태, 이수창, 전상수를 초대하여 수채화원로작가초대전을 개최했다. 대구의 대표적인 작가 이경희가 빠졌던 것은,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붓을 꺾고 이 해부터 칩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1993, 10주년을 맞아 전국단체로 세를 확장하려던 수채신작파부산수채화협회와 함께 대구수채화협회회원들이 다수 합류했다. 그 첫 전시가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개최되었으며, 이듬해 12회전은 서울(문예진흥원), 대구(동아미술관), 전주(전북문화회관)에서 순회 개최되었다. 1994년은 대구수채화협회창립맴버였던 박찬호가 회장으로 추대된 해라 중앙수채화화단과의 연결고리는 더욱 단단해졌으며, 1995년에도 광주 남도예술회관에 이어 대구동아미술관에서 전시가 이어졌다. 이해 수채신작파대한민국수채화작가협회로 개칭하고, 기존의 한국수채화협회와 대등한 위치로 스스로를 격상시켰다. 동년, 12회 대구수채화협회전에서는 손일봉과 함께 제자 3인방(박기태, 이수창, 김인수)의 작품이 초대됐다. 이는 그동안 소원했던 대구-경북 수채화의 일체감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뜻깊은 전시회였다. 손일봉과 이수창은 풍경을, 박기태는 인물, 김인수는 정물화를 출품했는데, 대구수채화협회 회원들의 다양하고도 자유분방한 화풍에 반해 보다 아카데믹한 사실주의 화풍으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20015월에는 매우 의미있는 전시와 단체결성이 대구에서 있었다. 이름하여 한국수채화22인전 · 二水展 창립전이다. 참여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지역별, 세대별 안배가 눈에 띄며 무엇보다 당대 수채화화단의 대표급 작가들을 총망라했다는 자부심이 읽힌다. 창립 맴버는 박기태, 성백주, 황규응, 이수창, 전상수, 이철명, 윤완기, 박광식, 전호, 박찬호, 안영, 구자승, 손장섭, 송용, 조광래, 홍정자, 정우범, 이중희, 이종만, 조혜숙, 이경희(대구의 이경희가 아님), 김재학 등이었다. 이 전시는 비록 일과성의 행사로 끝나고 말았지만, 행사를 주관했던 박찬호의 포부와 자긍심이 어땠는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대구수채화협회는 아마추어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는 등 외연을 넓혀갔지만, 기존 작가들이 대다수 이탈하는 등의 내홍을 겪게 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초창기 맴버는 몇 사람에 불과한 실정이 되었다. 한편으론 초창기맴버였던 나원찬은 '울산수채화협회'(2003)를, 송재진은 '경북수채화협회(당시엔 영남수채화작가회, 1998)'를 창립하며 독립해 나갔지만, 대구야 말로 영남지역의 수채화 화단의 산실이었음을 상기하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주)

1) 이중희, ‘초창기 대구미술의 형성 p58 대구미술100년사(근대편) 대구미술협회 2016

2) 이상정(1897~1947 晴南 혹은 汕隱),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철저한 민족주의자. 대구의 전통사학 <계성학교>(현 계성중고등학교)의 제1호 미술교사. 1921년 대구 최초로 서양화개인전 개최. 1923벽동사라는 서양화연구소 개설.-이중희, 대구미술100년사(근대편), 민족 저항시인 이상화의 친형. 1918년에 입학한 서동진(이상화와 동기)이 제자

3) ‘향토회’ 1930~1935년까지 6회전 개최. 당시 조선화단의 명제였던 향토색론을 충실히 실천했으며, 민족적 색채가 강했던 대구화단의 본격적인 서양화 단체.

4) 윤범모, ‘수채화의 정착과 대구화단의 형성p79 계간미술1981년 가을(19)

5) 최은하(관훈갤러리 큐레이터) , ‘근대 한국 수채화의 전개2001 홍익대석사논문 요약본

6) 이중희, ‘대구의 초기 수채화단 성립과 1930년 향토회 발족배경p35 한국근현대미술사학232012 상반기

7) 김영동, ‘사생에 기초한 조화로운 세계상 원로작가초대전 이경희도록 대구문화예술회관,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