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국토를 빚지게 한 야송 이원좌

즈음 2021. 4. 30. 14:31

국토를 빚지게 한 야송(野松) 이원좌(李元佐, 1939~2019)

 

 

야송 이원좌는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 이래 한국산수의 정통성을 현대적으로 재창출했을 뿐 아니라,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작가라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정선이 겸재준(謙齋皴)’을 통해 조선의 실경이자 이상화된 산수인 진경산수를 개창 했듯이, 이원좌 역시 야송준(野松皴)’을 통해 20세기 이후의 한국 산천을 자신만의 진경으로 이상화시켰다. ()은 일종의 터치법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의 산세나 암석의 모양에 따라 창안되었다. ()은 특히 산수화에 있어서는 영혼과 같은, 작가의 개성과 능력을 알아볼 수 있는 요체로 인식되고 있다. 미술평론가 김상철은 야송준이라 부를 수 있는 그의 준법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산천을 아우르는 긴 호흡과, 한 획 속에서 다양한 농담의 변화를 수용함으로써 단조로움을 극복하는 것이 특징 중의 하나라고 짚었다. 서성록 또한 그의 준법은 단번에 그은 것이 아니라 중복과 반복을 통해 준을 구축하기 때문에 기발함을 자랑하기보다는 겉으로는 투박해 보이지만 질박하고 친밀감을 준다.” 고 했다.

 

 

겸재는 부임지마다 그곳의 산수와 경개(景槪)를 그림으로 남겼는데, 야송의 발품은 오히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의 열정에 닿아있는 듯하다. 야송에게 한국의 산수는 종교와 진배없다. 야송만큼 한국의 산천을 사랑하고, 숭배하고, 재현해낸 작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만나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야송은 작가 이전에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냈던 자연인이었다. 그의 면목을 더듬어가다 보면, 그가 왜 화가로 불릴 수밖에 없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먼저 야송은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소탈하고, 거짓 없는 성품답게 자신과 관계를 맺은 모든 이들에게 감사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봉화에서 청량대운도를 그릴 때, 언론사와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미술계 인사들, 지역민들과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 하나 이름을 놓친 이가 없다. 일기장 속에는 이렇게 관계를 맺은 숱한 이름들이 빼곡하며, 한 땀 한 땀 고마움의 마음을 사족처럼 달아놓았다. 자신의 대작들이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염력과 협조 덕분에 탄생되었음을 고백해 두고 있는 것이다. ‘청량대운도화기에도 그런 마음을 고스란히 담았다. 자연 앞에선 천지신명께 예를 올릴 줄 알았고, 사람 앞에선 누구도 차별 없이 친근하게 대했던 그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마운 존재는 금수강산으로 가득한 대한민국에 자신을 점지해준 신이었음을 야송은 일곱가지 은혜로써 꼽고 있다. 이 세상의 만물을 그림으로 마음을 담을 수 있게 허락해준 것이 첫 번째 은혜요, 천재는 못되지만 부지런한 성품을 주어 쉼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에 열중할 수 있게 기회를 열어준 것이 두 번째 은혜요, 믿음으로 성원해준 부모님의 은혜가 세 번째요, 자식들이 오순도순 정답게 살도록 도와준 은혜가 네 번째요, 늘그막에 청송군립야송미술관 관장으로 허락해주어 자신의 그림이 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히 즐거움을 줄 수 있게 해준 은혜가 다섯 번째요, 자신을 전폭적으로 성원해주는 아내를 맞게 해준 은혜가 여섯 번째요, 고려와 조선을 이어온 전통의 수묵산수화의 맥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를 자신에게 준 것이 일곱 번 째 은혜라고 했다.

 

야송은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삶의 고비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해결할 수 있게 그림이 팔렸다. 그러므로 야송에게 그림은 안빈낙도(安貧樂道)였다. 한창 인기가 있을 때도 그림을 팔아 돈을 만드는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1975년 첫 개인전 때의 출품작 새알산하효도’(62x127cm 24)를 비싼 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는데도 야송은 팔지 않았다. 이 작품은 훗날 야송미술관 소장품으로 남게 됐다. 야송은 끈기의 화신이었다. <오성중> 시절 자신의 부족함을 일깨워준 선배에게 보답하듯, 아니 선배를 뛰어넘기 위함이듯 습작하고 습작했던 작품이 천 단위를 넘었다. “2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는 8절 또는 4절 크기의 수채화가 1,700장에 이르렀다. 나도 놀라고, 형도 놀랄 지경이었다.” 야송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저는 그림 그리는 것이 지겹다거나 싫증 난 적이 없어요. 그려도 그려도 항상 즐거운 겁니다.” 야송은 또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의 스케치북을 본 사람이면, 그의 수많은 대작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지를 알고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의 볼펜 선은 동서양의 방법론을 아울렀을 뿐만 아니라, 화고(畫稿, 에스키스)로서의 원대한 구상이 선 하나하나에 스미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2010, '경북수채화협회'(당시엔 영남수채화작가회) 초대전이 끝난 뒤, 야송으로부터 방명록 한 부를 건네받았다. 각종 소감과 사인으로 꽉 채워진 방명록 뒷장에는 야송이 직접 기록해 둔 단체관람이나 하루 방문객 수 등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의 치밀함은 가히 습관에 가까운 것이었다.

 

야송은 어린 시절을 청송 부내면 지경리에서 보냈다. 7살 때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의 재능을 꿰뚫어 보았던 아버지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부인에게 이렇게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 아이는 그림에 특별난 재주가 보이네. 그러나 종이 수십 트럭을 쓴 뒤에야 그 재주가 피어나는 법인데, 아비 된 나는 이 아이에게 단 한 장의 종이도 사주지 못했네. 그게 한이네. 자네가 내 한을 풀어주시게. 이 아이가 종이를 요구하면 빚을 내서라도 소원을 들어주시게.” 아버지의 유언 덕분이었는지, 이후로 종이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고마움을 알게 해준 마음은 이렇듯 부모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야송은 중학교를 대구에서 다녔다. 1955, 칠성동 북문수용소란 판자촌으로 이사를 했다. 야송의 어머니는 단지에 뜨거운 국수를 담아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면서 국수장사 했다. 야송 또한 낮에는 우산공장에 나가 일을 하며 야간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원좌야 칠성동 물탱크 있는 마을에 한 학생이 그림을 아주 잘 그리더라. 니 한번 만나볼래? 니 자랑을 쪼매 했더니 만나자 카더라.” 그가 바로 <대건고> 학생 정주호(정일)였다. 이후 일요일이나 여가가 날 때면 중학생인 야송은 정주호를 쫒아 수채화를 배웠다. 주로 쏘다녔던 곳이 범어동 일대와 동촌유원지, 앞산유원지, 배자못 부근, 산격동 언덕 등지였다. 이젤을 놓고 그림을 그리는 정주호가 부러웠던 야송은 나중에 다리가 부러진 이젤을 얻게 되자 그것을 고쳐 쓰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애지중지했다. 밤에는 잠든 어머니나 누이동생의 모습을 그렸고, 밥그릇이나 쟁반 등 정물화도 그렸다. 일주일에 평균 8절 크기의 그림을 열 대여섯 점씩이나 그려대니 정주호가 못말리는 원좌라며 혀를 내둘렀을밖에. 2년 뒤 그동안 그렸던 8, 4절 수채화가 1,700장에 이른 것을 보고 자신도 놀라고, 선배도 놀랐다던 이야기는 전술한 바와 같다.

 

학창 시절 때 그린 만화
드로잉

이즈음 각종 실기 대회에 참가하면서 김응곤, 이광희, 김익진, 김의일, 권수현, 장진필, 김정자 등 선배들과 이광달, 손수광, 박현기, 박차상, 민태일, 김준기, 이경직, 소병선, 김동길, 문곤 등의 또래들, 이두호(만화가), 조만식 등 후배들을 두루 알게 됐다. 가끔씩 사생 모임을 가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모임을 주도했던 이는 선배 김응곤이었다. 야송은 <오성고>로 진학했고, 1958년에 창립된 미우회(美友會)’에 참여했다. ‘미우회1961년까지 활동했던, 대구에서 두 번째로 결성을 본 학생동아리로 초대 회장은 <대구공고> 3학년이었던 김응곤이었다. 김응곤은 1982년에도 토우회‘(1982~1987) 창립에 앞장섰는데 야송은 그때도 함께했다. 이들의 연은 20073, 대구에서 가졌던 옛 화우 반세기 회상전‘(생존 작가 25명 참여)을 야송이 관장으로 있는 군립청송야송미술관 초대전으로 이어갔으며, 2009년에는 노옥(露玉) 김응곤(1937~ 대구) 초대전도 이끌어냈다.

 

 

야송은 그림에서 ()‘의 역할을 으뜸으로 쳤는데, ’사생(스케치)11가지 중요성에 대하여라는 글을 써놓기도 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생은 인생사라는 그림의 바탕이다.

2. 세월이 흐른 뒤엔 문자가 아닌 형상의 일기가 된다.

3. 자연이 함축하고 있는 만상(萬相)의 교훈이 곧 자신의 고유한 인품임을 인지하게 된다.

4. 지명(地名)에 대한 이해와, 노거수(老巨樹)나 고성(古城) 등에서 겸손을 배운다.

5. 사생첩은 그림의 변화과정(개인의 역사)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으로서도 가치를 지닌다.

6. 사생첩은 당시의 관계사를 떠올리게 하고, 창작의욕을 일깨워준다.

7. 수천 장의 스케치는 곧 삶의 여정이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사람만의 세계이다.

8. 스케치는 그린 이의 마음의 결정, 능력, 의욕, , 열정, 인생관, 성격까지도 스며져 있다.

9. 자연엔 선이 없다. 그러나 그림으로의 멋은 분명하게 처리했을 때의 선()밖에 없다.

10. 스케치는 하늘의 뜻과 사람들의 협조와 땅의 은혜로서 이루어짐에 대한 깨달음이다.

11. 스케치는 생생한 현장의 기록, 오랜 세월 뒤에 그 현장을 증언해주는 역사의 기록이다.

 

야송은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의 수채화에서도 굵고 가는 필선의 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했던 크로키 또한 선의 의미와 효용성을 일찍부터 깨닫게 해준 요인이겠다. 천장씩 묶은 스케치북 5권을 앞뒤로 그렸으니 한 권에 2천 장씩의 크로키를 남긴 셈이다. 많게는 하루에 30~50장까지도 그릴 때가 있었다고 한다. 1961<홍익대>로 진학, 서양화로 출발했음에도 동양화로 방향을 튼 것은 전술한 대목들로 하여 필연 같기도 하다.

 

1967<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한 야송은 서울 소재의 <광희중학교>, <연서중학교>, <관악고등학교> 등지에서 12년간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수묵산수에 빠져들수록 직장에 매여 있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1979, 신사동 2층집에 화실을 개설하고 교사직을 전격 사임했다. 오직 산수화만이 태어나 해야 할 당연한 소임으로 재각인됐다. 수묵산수에 천착하면서 크로키는 더이상 손대지 않았다. 그러나 크로키로 다져진 손의 기억은 볼펜스케치라는 개성적인 드로잉으로 유턴, 산수화 화고(에스키스)라는 독창적 쟝르로 변용되었다. 야송은 단호했다. 그림이 마음이나 행동에 짐이 된다고 생각하거든 즉시 그림을 떠나시오!

 

야송에겐 산수화수석‘, 그리고 이 인생의 전부처럼 보였다. ’망우물(忘憂物)‘이란, 중국 진()나라 때 도연명(陶淵明)의 음주시(飮酒詩)에서 비롯됐다. 도연명의 시구절에 의해 근심을 잊게 해주는 최고의 물건에 술이 올랐다. 그러나 애주가인 야송의 망우물은 술이 아니라 산수였다. 자신의 그림 속에서 신선처럼 노닐며 마시는 것이 술이었을 뿐이다. 수석은 야송에게서 방 안 산수였다. 수석을 모으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도 그렸다. 이 그림들은 한동안 수석협회지에 연재되기도 하고, 병풍그림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야송과 산수는 동심일체,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자 분신이었다.

 

청량대설도 143x362cm 2003

 

1975, 야송은 첫 개인전 때 전지 24매의 <새알산하효도>를 출품해 대작 작가로서 이목을 끌었다. 이 작품을 높은 가격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나 끝내 거부하고 작가소장으로 남긴 이야기는 이미 기술해 놓았다. 대작 작가, 다작가라는 야송 특유의 아이덴티티가 세인의 뇌리에 각인된 시점이 1979년에 있는 제3회 개인전이었다고 하겠다. 야송은 전시를 앞두고 하루 20시간씩 창작에 매진했으며. 전지 12장 크기의 부동대전도를 비롯, ‘화암군선도’ ‘선유심경도160점의 대작을 선보였다.남들에게는 일생 동안의 제작량이 될지도 모르는 많은 작품을 가지고 한꺼번에 전시를 연 야송의 대담한 시위를 주위에선 놀라워한다.’(매일경제 1979.11.22.)는 기사는 당연한 탄성일 수밖에 없겠다. 메인 전시회장이 세종문화회관이었지만, 작품에 공간을 맞추다보니 엘칸토 예술극장 미술관, 그로리치 화랑, 희화랑, 미화랑 등 5개소에서 분산 전시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국토는 야송에게 빚을 졌다고 글 제목에 붙였다. 야송은 명소를 그리지 않았다. 풍경의 일각만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명제에 지명이 붙었어도 그 지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강줄기와 산맥들을 관계사처럼 엮어 화면 위에 펼쳐놓았다.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그린 1993년 작 주왕운수도(周王雲樹圖)’(1200x240cm)는 주왕산 팔경 스케치 수 십장을 적재적소에 재구성하여 한 그림으로 만든 것이었다. 육안으로는 절대 감싸안지 못할 산의 전모가 야송식 시점이동 방법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주왕산으로 각색된 것이다. 여기서 야송 산수화의 개념도가 그려진다. 시점 이동 방식에 대해 야송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서양의 그림은 고정시점으로 원근감을 강조하지만, 동양의 그림은 무비카메라로 휘둘러 촬영을 하듯 시점 이동을 해가면서 그린다. 그로 인해 좌우로 길게 그리거나 아래 위로 길게 그릴 수도 있다. 그리하여 시점을 좌우로 이동시켜서 그린 그림을 현판식이라 한다면, 상하로 이동시켜서 그린 그림을 족자나 병풍 형식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점을 이용하여 우리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특유의 야송 산수화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시점 이동 산수화를 신항섭은 1999년 상갤러리에서 개최되었던 야송 회갑전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새로운 시각에 의해 펼쳐지는 한국의 산하가 우리 앞에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필연적이다. 수십 리나 걸어가면서 보아야 될 경치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므로 대상에 대한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주왕운수도 1170x240cm 1993
청량대운도 46x6.7m 1992

청량대운도(淸凉大雲圖)’ 역시 주왕운수도식으로 국토의 확장성이 장엄되어 있다. 그림 안에는 멀리 문수지맥과 덕산지맥의 출렁임 사이로 낙동강이 구비치고 그 안에 청량산을 펼쳐놓았다. 이처럼 야송의 산수는 웅장하다 못해 감격스럽다. 웅장하지만 아기자기하다. 아기자기한 까닭은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산천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현장에서 기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청량은구도(淸凉殷邱圖)’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관은 경탄을 그칠 수 없다. 이제 4차원 포장을 하느라 강변은 어수선하지만 보는 즐거움, 그리는 재미에 시간을 잊는다.’라고 적어놓았다. 서성록은 그의 그림이 큰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정겹고 유장한 것은 그림에 얽힌 소소한 이야기들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꿰뚫어 봤다.

 

이런 지극한 산수화들은 대게 볼펜스케치라는 선행작업을 거친 것들이다. 스케치북에는 그림과 함께 메모들이 어우러져 보는 재미, 읽는 재미를 더한다. 아들 이은도는 아버지의 메모 습관에 대해 이렇게 받아 적어두고 있다. “여태껏 전국을 다니며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명산들을 스케치한 양이 2만 장 정도 분량이 되는데, 세월이 흐르고 몇 십 년 후에 보면 스케치한 기억이 안나는 경우가 많아 스케치북에 그 당시 기억을 적어두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점경인물 표현에 대해서는 사람이 들어가면 자연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고,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더 실감 나게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야송의 산수에는 관념이 배제된다. 실경을 통해 산수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야송의 모든 작품은 그러므로 실경이 바탕된, 야송의 속을 거쳐나온 진경화인 것이다. “그림은 반드시 스케치해 온 것을 토대로 확대하고 변형한다는 원칙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림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스케치 작이고, 골격을 이루는 것은 데생의 정확도에서 시작된다.”라는 야송의 신념이 현대산수화의 필연성처럼 읽히는 것은 서양미술의 토대 위에 전통을 접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청청두솔암 22x34cm 2003

 

회갑 전까지는 붓이 속을 썩이더니만, 회갑을 넘긴 뒤에야 붓이 눈치를 보기 시작하더라던 야송. 아들 이은도는 그 시점을 이렇게 술회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아버지의 그림에는 변화가 생긴다. ‘회갑전 이후가 되니, 붓이 살살 나의 눈치를 본다. 예전에는 나를 애먹이고,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던 붓이었는데 슬그머니 장난기 같은 심술을 내어 붓을 뉘이기도, 휘두르기도 하고, 중봉으로 측필인 냥 붓을 못살게 굴어도 내가 붓을 잡고 서 있으면 붓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스스로 그림을 만들어 놓는다.’ 이 시기에 아버지는 자신을 작품 속에 슬그머니 넣기도 하고, 화기의 내용도 많아지기 시작한다.” 야송은 60세 이후에는 이처럼 붓을 의인화하며 희롱하기에 이른다. 여유와 운치에 더해 해학마저 더해진 것이다. 야송의 회갑전에서 신항섭은 이렇게 썼다. “붓을 곧추세우는 중봉필법, 형세를 잡는 데는 반드시 중봉을 이용한다. 그래서 그의 선을 자세히 보면, 선의 가운데가 비어 있다. 붓끝이 평평해지거나 갈라지는 탓이다. 그러기에 그의 선은 강한 듯하면서도 유연하고, 유연한 듯하면서도 강하다. 화가의 생각과 감정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전달하는 것은 붓끝이다. 모든 힘은 붓끝에 응집한다. 따라서 붓을 뉘이거나 꺾이게 되면 붓끝에 모인 힘이 분산하고 만다.” 이게 육순 이전의 야송이 필을 대했던 태도다. 이렇듯 강직했던 야송도 육순을 넘기면서부터는 유연해져 갔던 것이다. 분명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야송은 죽어 청량산의 신선이 되었을 법하다. 생전 청량산 8곡 병풍’(50x134cm, 1997), 한 폭에 2개의 원화(圓畵)를 배치한 청량산 168곡 병풍(23x23cm, 1985)’ 등 많은 청량산도를 남겼지만, 화룡점정의 순간은 바로 19921022일에 일어났다. 길이 46m, 높이 6.7m의 초대작 청량대운도가 우뚝 일어서던, 바로 그 날. 야송은 작품을 구상했던 1989년부터 청량산 12봉을 수시로 섭렵하며, 수 백 장의 볼펜스케치를 시점이동 방식으로 꼼꼼하게 기록했다. 3년간이나 선행했던 대운도의 화고(畫稿)가 마감되던 날, 축융봉에서 산신제를 올렸다. 봉화 읍내의 외지지 않은 장소에 380평 널찍한 빈 창고를 빌릴 수 있었다는 것도 천지신명의 도움이라 생각했다. 바닥엔 400장의 화선지가 펼쳐졌다. 1992424, 7m 대나무 막대 끝에 목탄을 매달고 스케치 시연으로 시화식을 거행했다. 이로부터 야송은 삼계리 창고 안에서 6개월 동안이나 두문불출했다. 그림 위에, 비계인냥 사다리를 눕혀놓고 그 위에 쭈그려 앉아 그림을 그렸다. 식사 시간마저 아끼려던 작가에게 아내가 밥을 입속에 떠 넣어주기까지 했다. 동년 1022, 야송은 감격한 나머지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얼굴까지 오체투지 낙관했다.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한 1,700여자의 화기도 적어 넣었다. 야송의 나이 54세 때였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자랄대로 자랐다. 이때부터 야송은 그 모습 그대로 외모라는 트레이드마크 하나를 더 몸에 걸치게 됐다.

 

청송군 진보면 신촌리 소재의 야송미술관2005429일에 개관한 경북도내 최초의 군립미술관이다. 2000년 폐교가 된 <신촌초등학교>를 군에서 사들여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했다. 당시 1층엔 각종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했고, 2층엔 야송의 작품들을 상설 전시해 놓았다. 교실 두 칸짜리 전시관엔 한쪽 벽면 전체를 꽉 채운 두 점의 그림이 시선을 압도했다. '88올림픽' 유치를 기념하여 그렸던 ‘87년 작 무릉하운도‘(1,165x240cm), '정도 600'을 기념 하여 그렸던 ’91년 작 주왕운수도’‘(1,165x240cm)가 그것이다. ‘무릉하운도는 홀대받고 있던 동양화 예술의 우수성을 과시해보려는 의도와 더불어 수묵예술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작가의식의 산물이었다. 이 두 점의 대작은 청량대운도의 기세에 눌릴 법도 했지만, 이들은 이들대로 미술관의 아이콘으로 손색없는 위세를 떨치고 있다.

 

불세출의 역작 청량대운도는 전시될 공간을 만나지 못해 오랫동안 수장고 신세를 면치 못했다. 2013926, 마침내 미술관 부지 안에 전용전시관이 개관됐다. 이름하여 청량대운도전시관. 야송은 전용전시관이 만들어지기 전에 나름대로의 디스플레이를 꿈꿔보기도 했다. 작품이 움직이도록 설계하여 누워서도 감상할 수 있게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벽면을 둥글게 배치하는 방식도 고려해 볼만 했다. 그러나 마침내,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청량대운도는 수장고를 벗어났다. 청송에서 제일가는 문화예술 관광자원으로 각광 받게 된 것이다. 글쓴이는 청량대운도를 보고 나서 방명록에 이런 감상문을 남겼다. ‘청량은 본디 봉화에 머물러 있지만, 그 혼은 이곳 청송에 옮겨와 앉았다. 바야흐로 청량산은 두 군데가 되었으니 몸을 보았다면 이곳 청송에서 그 혼을 느껴봄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야송은 고희전 때 욕심일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77세의 야송 희수(喜壽), 88세의 야송 미수(米壽), 93세의 야송 망() 백세전을 진행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를 점지한 신이시여, 보살펴 주옵소서.”하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그러나 8순전을 마친 야송은 이듬해 4, 야송의 쓰임이 다른 곳에 있었던지 신은 그의 염원을 더 이상 허락치 않았다. 살아있는 자들의 탄식만이 청량대운도의 메아리가 되어 웅웅거릴 뿐이었다.

 

20209, ‘1회 청송야송미술대전이 개최됐다. 야송의 회화 정신을 기리기 위해 청송군에서 개최한 전국공모전이었다. 야송의 회화 정신이란 장인 기질사생 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느 해와 달리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고통을 받는 비정상적인 일상 속에서 한국화, 서양화(수채화), 서예 단 세 분야를 공모했음에도 전국적으로 200 점이라는 적지 않은 작품들이 응모됐다. 대상은 한국화 '주왕산용추폭'으로 낙점되었는데, 지필묵의 특성과 선염법, 여백의 조화 등이 잘 어우러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록 한국화 분야에서 대상이 나왔지만, 특정 주제나 쏠림현상이 없는 순수회화의 무경계성이 확인된 공모전이란 평가를 받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야송의 회화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가 되고도 남음이 아니랴.

 

참고 문헌)

1) 김상철(미술평론가), 산수에 살고지고-야송의 육화된 산수경, 고희전 도록

2) 서성록(미술평론가), 이원좌의 수묵청량산도, 청량산박물관, 2016 ‘야송 이원좌 청량산 실경산수화 특별전

3) 송재진, 흔적과 기억, 송재진 영주·경북미술 순례기, 나무기획, 2016

4) 이하석(시인), [스토리의 보고 청송 15] 한국 산수의 웅혼한 기운을 탁월하게 살려낸 야송 이원좌화백, 영남일보, 2015.10.5

5) 김태곤, 1950년대 대구 학생미술운동의 전개와 성과, 옛 화우 반세기 회상전팜플렛, 옛화우반세기회상모임, 2007.3.2-3.7(KBS대구방송총국전시실), 3.9-4.10(청송야송미술관)

6) 백지홍(월간미술세계 편집장), 홀로 선 소나무, 야송 이원좌, 야송 이원좌 8순 기념전도록, 2018

서성록(미술평론가),이원좌의 수묵청량산도, 청량산박물관, 2016 ‘야송 이원좌 청량산 실경산수화 특별전

7) 김종욱(수필가),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야송 이원좌의 작품세계와 삶, 고희전 도록, 2008

8) 신항섭(미술평론가), 자연에 대한 이해와 역동성, 회갑전 도록, 1999

9) 이은도, 나의 아버지, 야송 이원좌 화백을 지켜보고, 함께 하며..p8, 야송 이원좌 8순 기념전도록,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