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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작가들의 스승 월계 계삼정

즈음 2021. 4. 30. 14:37

월남작가들의 스승 월계(月桂) 계삼정(1910~1993 평양)

 

 

20126, ‘계삼정유작전이 영주문화예술회관 철쭉갤러리에서 개최됐다. 풍경, 인물, 정물, 동물, 불상, 반구상 등 다양한 소재와 경향을 보여주는 80여 점이라는 적지 않은 작품들이 유족들(장남 계재영)에 의해 공개되었다. 특히 5~60년대 풍기 근교의 풍경화들은 투박한 붓질과 질박함으로 인해 그 시절의 정경이 더욱 정감 있게 다가왔다화가라는 존재 역시 지역의 역사, 풍물 등을 시각언어로 기록하는 사학자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비록 소품이긴 하지만 6.25 전쟁의 상흔을 담은 두 점의 피난민 그림에서는 탈북민이 겪었던 시대의 아픔도 공감하게 된다.

 

정물 캔버스에 유채 45x36cm 1949 계간미술42호(1987년 여름)
아기를 업은 시골 소녀 목판에 유채 245x18cm 1940 계간미술42호(1987년 여름)
독서하는 소녀 종이에 수채 24x21cm 1948 계간미술42호(1987년 여름)

 

계삼정은 한일합방 국치년이던 1910525, 평안남도 평양부 창전리 163번지에서 만석꾼 수안(遂安) 계석홍과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10세까지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눈을 떠 뒤늦게 평양의 <종로보통학교>1927년에 졸업하고, 이어 <광성고등보통학교>19333월에 졸업했다. 고보 학생이던 1931년 제10조선미전에서 첫 입선의 영예를 얻으며 화단에 발을 내디뎠다. 30년대의 평양은 서울 못지않은, 많은 수의 서양화가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삭성회(朔星會)미술연구소와 같은 교습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삭성회미술연구소192571일 천도교 종리원에서 설립되어 김관호, 김찬영, 김윤보, 김광식이 강사로 참여했던, 당시 미술지망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와 함께 각급 학교에서도 미술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기도 했다. 계삼정은 당시 삭성회에 다닌 기록은 없지만 <광성고보> 미술반원으로 자부심을 갖고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계삼정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각 학교마다 미술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습니다. 매년 대규모 교내 전람회가 열릴 때면 평양 유지들이 와서 구경하는 등 성황을 이뤘지요. 그때 미술반 학생들이 평양 중심의 서부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주최의 전국학생미술전람회에는 학교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입상도 하고 그랬지요.”

 

계삼정은 고보를 졸업하자마자 서양화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대학> 예술과를 19377월에 졸업했는데, 일본 유학 중이던 1936일본종합예술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계삼정은 귀국하자마자 평양의 <숭인상업학교> 미술강사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듬해 8월부터는 모교인 <광성고보> 교사로 부임하여 겸임을 했다. 두 학교 모두 19454월까지만 근무했다. 교사로 활동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계삼정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광성고보>에는 사군자와 서예를 잘했던 죽파(竹坡) 윤종식이란 분이 미술교사였습니다. 해강(海岡)에게 사사했었어요. 이분의 뒤를 이어 제가 미술교사로 재직했었지요. 광성에서 황유엽, 최재근, 김승기, 최영림, 변철환, 홍종명, 김창렬 등 좋은 작가들이 많이 배출됐죠. 뒤에 무대미술가가 된 장종선도 그때 미술반이었고...”

 

계삼정은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평남중등교육미술연맹이사(1940.8.1.~1944.3.30.)로 화단활동을 병행했다. 당시 대다수 연맹이사들이 일본인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계삼정과 김두일(金斗一) 단 두 명 뿐이었다. 김두일은 해방 이후 일본에서 조각을 전공했던 사람들이 1946년에 조직한 조선조각가협회회원이었다. 계삼정은 교단을 그만둔 뒤 4개월 만에 해방을 맞고 그해 8월 서울로 이주했다. 이주 상황에 대해 <금계중학교> 개교 4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금계창간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해 두고 있다. ‘1946년 선생은 형 치정씨와 함께 홀로 되신 어머님을 모시고, 4형제가 딸린 가족을 데리고 자유를 찾아 서울로 월남했다.’ 당시 해방 정국의 평양 상황에 대한 증언들로 볼 때, 계삼정은 남달리 빠른 판단을 내린 것 같다. “해방 이후 평양에서 미술가들은 공산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작품, 이를테면, 사회주의 건설상을 담은 그림을 그려야 했어요...”(홍종명), “해방 이후의 미술활동은 미술동맹에서 주관했었습니다. 책임자는 정관철이었고.....미술동맹의 주요사업은 김일성, 스탈린, 레닌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었는데, 20~30호 크기 1장을 그리면 당시 6백원, 7백원을 받았었어요. 그게 어느 정도 수입이 되니까 많은 미술인들이 참여했었답니다....”(김원) 계삼정은 서울에서 교직 자리를 얻지 못했는지, 194810월까지 서울유정공업주식회사소장으로 취업하여 남한에서의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피난길 40x31cm

 

서울 46x34cm 유채 '고 계삼정화백 유작전' 도록

 

계삼정은 이후 풍기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는데, 좌우익 간의 사상투쟁이 극심했던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하곤 정감록의 제1승지인 풍기를 떠올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인이 노변 행상, 보따리 행상으로 겨우 가계를 꾸려나가는 동안에도 계삼정은 교육자로서의 본성을 재가동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계삼정이 터를 잡은 풍기로 찾아드는 친인척 때문에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50120, 마침내 마을 공회당을 빌려 호롱불을 밝히고 야학을 개설했다. 어려움을 이겨낸 끝에 1951725, 마침내 <금계고등공민학교> 설립인가를 따냈다. 그러나, 전시 상황 중에 군 작전 상 교사가 헐리고,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에 의해 책걸상이 모두 없어지는 난관에 부딪쳤다.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19521229, 마침내 금계학원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으며, 19533143학급의 <금계중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이듬해 314일 첫 졸업식을 거행하면서, 학생들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실은 태부족하고, 교사 초빙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풍기에 주둔하던 부대장 강원채가 계삼정을 찾아왔다. 장군 강원채는 <숭인상업학교> 시절 제자였으니 강원채의 도움으로 교실 5칸을 신축하게 됐다. 강원채는 후일 대구시장이 되었을 적에도 학교림 107정보를 구입하는데 결정적인 지원을 해주며 사제 간의 정을 이어갔다.

 

 

60호P 금계중학교소장

계삼정은 그림을 팔아 부족한 학교 경영자금에 보탰으니 화업 또한 교육사업의 연장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5912, 계삼정은 첫 개인전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개최했다. 작품은 모두 28점으로 인물, 풍경, 정물 등이 골고루 포함되었는데, 특히 희방사’, ‘희방폭포등 구체적 지명이 적시된 작품들도 여러 점 출품됐다. 남쪽으로 넘어올 때 북한에서 제작했던 작품들은 거의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으니, 대부분 풍기에서 제작된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리플렛 서문은 박영선(1910~1994 평양)이 썼는데 소개의 말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나의 죽마지우이고 화우인 계삼정씨를 소개합니다. 일찍이 동경 일본대학 예술과를 거쳐 작가로서 일본화단에 데뷔하여 종합미전에 역작을 출품하야 찬사를 받은 것은 기억에도 새로운 바이지만 씨는 교육자로서 20여 년간 투신하고 있으며 현 화단에 중견작가들 중에는 씨의 지도를 받은 제자도 적지 않다. 특히 농촌에서 자신 중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이바지하는 한편 화도에도 꾸준히 정진하고 있음은 진실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씨의 화풍은 불란서의 전원화가 밀레를 방불케 하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농촌생활에서 체험하는 화취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찬사를 보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박영선은 계삼정과 동갑내기로 <평양고보>를 나와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를 졸업했다. 계삼정과 박영선은 출신 고보는 달랐지만, 일본 유학 때는 <가와바타화학교(川端画学校)> 입학동기였다. ‘조선미전에도 첫 입선을 함께 했다. <가와바타화학교>는 계삼정이 1961년 영주에서의 개인전 리플렛에 <가와바타화학교>를 수료했다는 경력을 적시해둠으로써 1년 수료했음이 드러났다. 박영선은 1936년에 졸업했는데, 계삼정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니혼(日本)대학>으로 적을 옮겨 박영선보다 1년 늦게 졸업했다. <가와바타화학교>1909년에 동경 분쿄구에 설립된 사립학교로 창설자는 화가인 가와바타 교쿠쇼이다. 교명은 가와바타의 성에서 취했으며, 태평양 전쟁 중에 폐교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박영선, 배동신, 박고석이 이 학교를 나왔으며, 정현웅과 구본웅도 이 학교를 거쳐 갔다. 김인승, 김경승 형제와 오지호는 이 학교에서 기초를 닦은 뒤 <동경미술학교>에 들어 갔다. <일본대학>1889년 개교한 <니혼법률학교(日本法律学校)>가 모체로 1903년에 <일본대학>으로 개칭한 일본을 대표하는 사립대학이다. 예술학부의 전신인 미학과는 1921년에 설치되었다. 김환기, 이우환(철학)이 이 학교 출신이다.

 

박영선은 국전첫 해인 1949년에 초대작가에 올랐고,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한국화단의 중진으로 활약하던 중에 친구인 계삼정이 개인전을 개최하게 되자 흔쾌히 서문을 써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계삼정 주변엔 물심양면 도움을 주는 친구와 제자들이 많았으며, 존재감을 드높일 수 있었다. 계삼정의 존재는 <안동사범>의 이수창에게도 전해져, 수업 때 제자들에게 영주에 대가가 한 분 와 계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수창은 60년대 말 계삼정을 추종하는 일군의 지역 미술교사들과 함께 영주에서의 전시회에 동참하기도 했다.(임천수 회고)

 

1961년에는 두 번째 전시회(12.25~1962.1.5.)를 영주치과 2층 영보다방에서 개최했다, 이때도 서문은 박영선이 맡았다. 전반부는 예전 서문과 같으나 후반부엔 영주대수해의 피해를 언급하며 영주군민의 정신적 위로가 될 전시에 대해 격려와 치사를 드린다고 되어 있다. 이번엔 자신의 지위를 국전심사원 박영선이라고 표기했다. 출품작은 모두 25점인데, 첫 번째 개인전 때의 출품작 제목과 동일한 것도 여러 점 발견된다. 제목이 같은 다른 작품인지, 동일 작품인지는 알 수가 없다. 겹치는 제목은 모자(母子)’, ‘희방사’, ‘희방폭포’, ‘등이다. 이 전시는 1956년 손일봉개인전(영주중앙초 강당) 이래 지역에서의 두 번째 전시로 기록 된다.

 

19716월에는 <광성중학교> 동창회, <숭인상업고등학교> 동창회, <금계중학교> 동창회가 공동 주최한 회갑기념전(6.1~6.6)을 국립공보관에서 개최했다. 이 전시회를 주관한 문하생들로 최영림, 한남석, 홍종명, 김희찬, 장종선, 김창구 등이 이름을 올렸다. 당시 대작이라 할 만한 크기의 감자밭’(40F) 외에도 ’(30F), ‘금선정’(20P) 등이 큰 작품에 속하며, 대체로 10호를 기준으로 조금 더 크거나 작거나 한 사이즈의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50점이 리플렛에 적시되어 있는데 제목 아래 줄을 긋거나 또는 와 같은 표시, 또는 굵은 펜으로 큰 네모를 둘러쳐 놓거나 여백 면에다 이름과 숫자 등을 메모해 놓은 것 등으로 보아 작품들이 거의 팔렸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감자(10F)’, ‘감나무(6F)’ ‘금선정(10F)’, ‘비선대(4F)’ 등 미처 인쇄하지 못한 작품명도 상당수 손글씨로 가필되어 있었으며, 거기에도 같은 표식들이 기입되어 있었다. 이 중 감자라는 작품은 국무총리 김종필이 사갔다고도 한다. 판매 대금은 학교 운영에 투자되었으며, 계삼정은 이후에도 개인전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19784, 신세계미술관 개인전에 이어, 19825월에는 미국 LA 3·1미술관 초대전을 가졌다. 이때 몇 점의 작품이 사기를 당해 되돌려 받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다. 김예순은 선생은 만년에 이르러서도 붓을 놓지 않으셨는데 잘 보이지 않아 색만 바른다고 하시며 추상화를 그리셨다.”고 말년의 계삼정을 회상했다. 지역에서조차 잊히져 있던 계삼정의 작품이 지역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4년 영주미술작가회(회장 송재진) 20주년기념전 때였으며, 초대작품은 40호 크기의 유화 수확이었다. 이 그림은 1961년 개인전 때 나락 베기라는 제목으로 출품했던 동일 그림으로 여겨진다.

 

 

계삼정은 소재 불문 다양한 장르를 두루 섭렵했던 작가이며, 유작 또한 100여 점 넘게 유족 들이 소장하고 있다.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는 물론, 동물화, 종교화, 추상화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창작열과 실험정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계간미술에 실려 있는 세 점의 작품은 풍기정착 이전이거나 정착 초기의 아카데믹한 작풍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다. 거칠고 투박한 터치의 풍기 개척시대 작품들과 대비를 이룬다. 개척시대의 계삼정은 40대 이후로서 학교 경영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의 그림의 의미는 목적성과는 달리 휴식처이자 무한한 자유의 독립지대였으리라. 표현주의적 화풍, 자유분방한 발상, 달필의 경지는 그러므로 결코 우연히 발생된 것이 아님을 공감하게 된다.

수확 40F
삼가동 계곡 41x32cm

 

풍기 등두들 44x32cm

 

추상 정물 72x60cm
석굴암
사천왕상 53x73cm

    

얼굴 38x45cm
닭 가족 10p

 

                    

참고 문헌

1) 신념을 위해 몸 바쳐온 의인, 금계창간호(2013), 편집부

2) 김복기, 개화의 요람 평양화단의 반세기, 계간미술42(1987년 여름)

3) 이구열, 기획특집/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새로운 민족미술 창조의 열정과 이념의 분출출처: 손신규, 2008.07.08. http://blog.daum.net/sonchansung/5359590

4) 임천수(1946~ 상주)60년대 후반 <영광여중고>에 근무했다. 기억에 따르면, 당시 영주다방(상호보다는 지역일 가능성)에서 계삼정(금계중), 이수창(안동사범), 김관(영주중), 김정숙(영주여중), 본인 등 5명이 전시회를 한차례 개최했다고 한다.(2020, 2018, 2016년 등 몇 차례 중복 채록)

5) 김예순(안동. 서양화가)의 회고. 김예순은 풍기 출신으로, 한 동안 계삼정을 따랐다.

6) 『고 계삼정 화백 유작전팜플렛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