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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물화의 큰 산맥, 김호걸

즈음 2021. 4. 18. 20:23

인물화의 큰 산맥, 김호걸(金虎杰, 1934~ 영주) 

 

 

김호걸은 1934년 영주시 이산면 두암고택장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서울로 유학을 떠났으나 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으로 내려와 <이산국민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 <경동중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4학년 때 6·25전쟁이 터져 또다시 고향으로 피난을 내려오게 됐다. 그리하여 <경동중학교>에 적을 둔 채 당시 영주지역 유일의 <영주농고>를 졸업했다. 당시 <영주중> 소속의 이동수라는 분이 겸임교사로 미술과목을 가르쳤다고 한다. 김호걸은 걸출한 재능과 학업성적으로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했고, 1957년 졸업했다. 이후 <경복고><경동고>에서 10년간의 교사 생활을 한 뒤 지금까지 전업작가의 한 길만을 걸어오고 있다.

 

김호걸의 근성과 장인기질은 어린 시절부터 단련되어왔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2014, 서울 한전갤러리에서 개최된 영주를 그리다행사 뒤풀이장에서 작가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를 옮겨본다. 해방 직후 <이산초등학교> 5학년 때 부석사로 소풍을 갔다왕복 100리가 넘는 길을 교사와 아이들이 걸음으로 오갔다고 한다. 6학년 땐 수학여행으로 2박3일 간 소백산 초암사엘 갔다. 부석사보다 더 먼 길이라 밤중에야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절에서 제공해준 주먹밥 하나씩을 받아들고 해발 1,421m의 국망봉 정상을 밟았다길을 내가며 올라야 했던 고된 산행이었다. 하산 시엔 학교에 심기 위해 어린 소나무들을 캐서 등짐을 지고 내려왔다고 한다. 이번에도 어두워진 뒤에야 절에 도착했다. 현재 <이산초등학교> 소나무 울타리는 그때 소백산에서 가져와 심었던 것들이다 피난내려올 때도 13일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일행이 없었더라면 하루 미리 도착할 수 있었을 거라며, 그때의 상황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더듬었다. 글쓴이로는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일들이었지만,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김호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현재 김호걸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신미술회, 한국인물작가회, 한국풍경화가회 뿐만 아니라 고향 후배들의 모임인 영주미술작가회에도 2002, 이두식과 함께 고문으로 동참했다. 김호걸은 끼리끼리문화를 싫어하여 동향 모임이나 동문회 같은 것을 멀리했지만, 노년의 김호걸은 향수의 빗장마저 걸어 잠그지는 못한 모양이다. 후배들의 곁에 바짝 다가선 김호걸은 그 존재만으로도 저절로 죽비가 됐다. 꼬장한 영주 선비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이런 일화도 있다. 언젠가 국립현대미술관 측에서 본인의 작품을 기증받아 전시관을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자 무상기증은 할 수 없으니 사서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풍경화나 정물화만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여타 작가들과는 달리, 전시회도 마음대로 열 수 없던 시절을 감내해 왔던 자존심을 그렇게 내비친 것이다. 미술관만 지어주면 전작품을 내놓겠다는 여느 작가들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2014 영주미술작가회 30주년 기념전 출품작 60.6X45.5cm
2014 영주미술작가회 30주년 기념전 출품작 31.8X40.9cm

 

영주미술작가회 30주년 기념전(갤러리 경북)

서구문화의 소산인 누드화가 처음 국내에 등장했던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일본 유학생 2호 김관호가 조선인 최초의 누드화인 해질녘으로 일본 제전에서 특선상을 수상했다. 벌거벗은 두 여인의 뒷모습! 이렇게 시작된 누드화의 여정은 유교문화 속에서 이런저런 편견과 불화의 과정을 겪어가며 현재에 이르렀다. 작품이 팔린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이런 여정 속에서 전업화가로 누드화를 과반세기 천착해왔다는 것은 어린 시절 걷고 걸었던 그 먼 길과 다를 바가 없다. 바퀴에 얹혀 쉽게, 빠르게 달려온 것이 아니라 오직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왔던 길인 것이다. 어린 시절의 그 옹골졌던 걸음처럼 김호걸의 예술세계는 이렇게 완성되어 왔다. 걸음이 인생의 기본인 것처럼 김호걸은 철저한 소묘정신을 강조한다. 그림에서 소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래서 불문가지다. 노년기에 접어들면서는 풍경사생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지만, 소묘에 대한 믿음, 투철한 작가 정신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생하던 어느 무렵의 일화는 김호걸의 장인 기질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예로 회자된다. 뙤약볕 아래에서 함께 작업하던 제자가 허덕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김호걸은 이렇게 다그쳤다. “저기 아름다운 산과 녹음, 물을 그리려면 우리는 여기 뙤약볕 아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아름다움을 즐기러 온 사람들은 저곳에 있지만, 아름다움을 만들려고 온 사람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김호걸은 인물화가로 각인되어 있지만, 1977년 신미술회 사생회 때부터 지금까지 풍경화를 병행해왔다. 마침내 2019, 86세의 김호걸은 8번째 개인전을 풍경화만으로 개최했다. 고전적이면서 인상파적인 화풍의 풍경화들은 연륜의 깊이만큼 풍화의 느낌을 선사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김호걸은 40세 되던 해인 1974, 한국신미술회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신미술회는 한국사실화가회청파회소장파 작가들, 그 외 동참작가들이 의기투합하여 한국적인 사실주의 확립을 위한다는 취지로 동년 68일에서 14일까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초대 회장은 박득순이며, 김서봉, 김숙진, 김영창, 김인승, 김창락, 김형구, 나건파, 박석환, 박영선, 박연도, 박영성, 박재호, 박희만, 손일봉, 양달석, 이동훈, 이병규, 이의주, 이종무, 이종우, 임직순, 장두건, 조병덕, 최쌍중 등 26명이 참여했다. 면면에서 보듯, 한국화단의 중추적인 작가들이 망라된 단체였다. 후에 안동의 류윤형, 울진의 홍경표 같은 후배들도 참여하게 된다. 김호걸은 1976년 첫 개인전을 서울 문화예술진흥원에서 개최한 이래 1988년까지 6차례의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심화시켜 나갔다. 1980년에서 1989년의 한국현대미술대전’,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누드미술 80년전등 권위 있는 전시 때마다 초대되기도 했다. ‘88년에는 한국인물작가회창립 회원으로 자신이 추구해오던 예술세계가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90년대엔 춘희, 유리, 수희, 연희등과 같은 모델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건강한 누드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는데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인물화는 80년대부터 코스튬이나 누드, 무희를 소재한 그림 등에 붙여왔다.

 

2003년에 한국의 누드 미학 2003이 개최됐다. 김호걸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을 한 화면에 조화시킨 하모니즘 창시자 김흥수와 함께 특별 초대되어 전시의 주제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디스플레이 됐다. 이두식, 구자승, 신제남 등 총 66명의 작가들을 '사실주의(Realism)', '초현실주의(Surrealism), '표현주의(Expressionism)', 'Eroticism-1(평면)', 'Eroticism-2(입체)', 'A medium & An Image' 6개의 섹터로 나누었는데, 인간 존엄성과 가치관을 재발견하고 한국 누드화의 역사적 변천을 점검하기 위함이라는 주최 측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에로티시즘이라는 카테고리에 대한 큐레이팅의 미숙이 지적되기도 했다. 2005, 70대의 김호걸은 롯데화랑-AVENUEL에서 일곱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20132월에 롯데백화점 본점 갤러리가 기획했던 화가의 여인, 나부(裸婦)-한국 근현대 누드걸작선 1930~2000’에 초대된 김호걸은 1983년 작 여인누드를 출품했다. 한창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80년대 작품이기에 완벽한 데생력과 여체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잘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이인성의 초록배경의 누드(1935)에서부터 권옥연의 부인상(1951), 이림의 나부(1952), 한묵의 나부(1953), 박영선의 아뜰리에(1957), 장리석의 해녀(1971), 손상기(1949~1988)화가와 여인(1978), 김흥수의 누드(1980), 박득순의 나부(1986), 이만익의 누드(1995) 41명의 작품 50점이 출품되어 시대별로 누드화의 변천과정이 조망됐다. 김호걸의 누드화는 “....여성 몸매의 아름다운 곡선에 포커스를 맞춰 탐미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흔하지만 나는 누드의 단순한 곡선의 아름다움보다는 탄력 있는 근육과 생동감 넘치는 야성적인 인상에서 더 강한 감동을 받는다. 생동감 있는 삶의 현장에서 누드를 그리려는 것이 나의 작품세계라 하겠다고 한 장리석의 견해에 부합되고 있다.

 

김호걸은 매우 난처하게 여기는 일이 두 가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노래를 부르라는 것과 글을 쓰라라는 것. 못한다거나 안 하겠다고 하면 더욱 하라고 하니 참으로 난처했으리라. “왜들 그럴까? 절름발이가 억지로 뜀박질하는 자벌레 같은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은 아닌지. 청탁자의 말대로 말하듯 쓰면 된다는데, 말하기가 싫은데, 말할 것이 없는데, 말할 줄 모르는데...... 어쨌든 짐스럽기 짝이 없다. 언젠가 간청에 못이겨 원고지 몇 장을 메우고 아침에 읽어보니 참 가관이다. 그야말로 횡설수설이다. 찢어서 불에 처넣으면 딱 좋을 것이었다. 모델을 놓고 몇 십번씩 지우고 다듬고 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서인지 도저히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가차 없이 성냥물을 붙여 한 줌의 재로 만들고서야 겨우 마음이 가라앉는 게 아닌가. 그래서 환쟁이하고 글쟁이가 따로 있는가 보다. 얇고 매끄럽고 맑고 싱싱하고......불룩한 덩어리들, 황홀한 끔틀거림, 그런 것들에 취해있는 나에게 원고지를 들이대니 앞이 캄캄할 뿐. 그래도 청탁자의 말대로 글 잘 쓰면 환쟁이가 아니지하는 생각으로 벙어리의 변으로 모자라는 원고를 채운다.

 

그리기만 하세/ 벙어리가 되어/ 그리기만 하세/ 언어는 시인에게 바치고/ 우리는 칠이나 하세/ 벙어리가 되어/ 그리기만 하세/ 빛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그리기만 하세

 

위 글에서 보듯, 김호걸의 작업은 지우고, 다듬는 고된 과정을 거쳐 탄생 된다. 그 기본이 데생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정신만으로 그릴 수 없다. 손이라던가 붓같은 실제적인 경과를 거쳐서 그것은 실현된다. 끝없은 되풀이로서의 소묘력(뎃상)을 연마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 이며, 이렇게 탄생한 누드는 싱싱한 신체성과 건전한 존재의 기술인 것이다. 젊은 시절 김호걸의 작업초점은 풍경보다는 인물이며, 인물 가운데서도 무희 등을 소재로 한 여인상이고, 여인상 가운데서도 나부였다. 그라시 기법으로 그려진 김호걸의 인물들은 심미적으로 승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화면을 갈고 또 닦아 균제미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김호걸의 예술은 여전히 싱싱한 젊음 속에 살아 있다.

 

주)

1. 송재진, 한국 누드인물화의 개척자 김호걸, p155, 흔적과 기억, 송재진 영주·경북미술 순례기나무아트, 2016

2. 김학민, 블러그 길거리 밖의 화가운영자

3. Light and Space, 인사아트프라자 2019.2.27.-3.11. Light and Space화집 발간기념전

4. 2003. 6.27~7.14,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5. 한묵, 콜라주 작업을 주로 하는 작가가 평생 단 한 점만 그렸다는 누드이다.

6. 도재기(기자), [문화내시경]한국 근현대 누드걸작선, 주간경향 1013, 2013 02/19

7. 김호걸, 벙어리의 변, p123 계간미술161980년 겨울

8. 윤준상, 김호걸의 누드’, 정신과 육체의 차이, 6회 개인전 평문 1988, 출처김호걸 화집2005

9. 그라시기법: 글레이즈(Glaze). 이미 발라둔 물감 또는 바탕 칠 위에 투명한 물감을 오일에 녹여 옅게 칠하는 기법, 또는 그 옅은 물감의 막

10. 전규태(문학박사), 심미적 고혹미에의 의지, 3회 개인전 평문, 1979, 출처김호걸 화집2005

 

2014 인사동 '갤러리 경북' 개관특별전 개막식 축사

                                        

2014 인사동 '갤러리 경북' 개관특별전 출품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