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최초의 모더니스트, 권진호(1915~1951)
‘대구미술100년전’ 도록을 몇 장 넘기다가 ‘권진호’라는 생소한 작가 앞에 문득 손길이 멈췄다. 출생지 ‘영풍’이라는 글자가 눈길을 확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근대기 영주 출신 작가 한 분과 조우케 된 순간이었다. 당시 ‘영주현대미술50년사’를 전시도록이나 경북예총지 등에 약사(略史)로 발표하며 지역미술사 정리에 매진하고 있던 터라 새로운 광맥을 발견한 듯한 흥분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후 틈틈이 권진호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안동사범 11회 동기회 카페’를 발견하게 됐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셨던 권오규 선생의 부친이었다는 사실도 확인케 되었다. 카페엔 선생이 그린 수채화들이 소개되어 있었고, 부친 또한 화가였다며 부전자전을 예찬하는 기사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져났다.
권진호는 영주 부석면 임곡(숲실) 태생으로 지역 최초로 서양미술을 접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미술가가 되기 위한 최적의 우회로였던 사범학교 대신 <대구농림학교>를 선택했다. 부농이었던 부친의 바램과 더불어 일본인 담임교사는 미래가 보장되었던 기술계 학교로의 진학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교사의 말 한 마디가 절대적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권진호는 농림학교 재학 시절 미술부 활동을 했는데, 졸업반 때인 1934년, 제13회 ‘조선미전’에 수채화 '계림의 초춘'을 출품하여 입선의 영광을 안았다. 함께 입선했던 대구작가들은 <대구사범>에 재학 중이던 금경연(1915~1948 영양)과 김용조(1916~1944), 최화수(1902~?) 등이었다. 이를 계기로 권진호는 자신의 진로를 바꾸게 되었으며, 졸업 후 <대구사범> 강습과에서 훈도자격 6개월 단기 코스를 밟게 됐다. 이처럼 아들의 진로변경에 대한 결정을 인정해준 계기가 바로 ‘조선미전’ 입선이 아니었던가 싶다. 당시 ‘조선미전’ 입선에 대해 일반인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동경에 있던 이인성이 1935년 『신동아』에 발표했던 「조선화단의 X광선」이라는 짧은 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이인성은 자신의 부친이 ‘한시와 서도를 주장하면서 그림에는 절대 반대를 외치며 몽둥이를 들고 말렸으며 경제문제로도 어려움을 겪었으나 ‘조선미전’ 입선에 오르자 이해해 주었다‘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았던 데서 추측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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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교직으로 진로를 바꾸었다는 것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으로 전환됐다는 의미기도 했다. 당시 교원 수가 부족했던 상황 속에서 권진호는 곧장 고향 <부석공립보통학교>로 발령을 받게 됐다. 1936년, 서둘러 대구를 떠나게 되었던 권진호는 대구화단에서 그만 잊히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림 그리는 일에 소홀함이 없이 방학이면 한 달 내내 화구를 싸들고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고 하며, 술을 좋아하여 어떤 날은 마음에 든 술집 아가씨를 집으로 데리고 와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근 채 몇 시간이고 누드화를 그렸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아야만 했던 아내의 심경이 헤아려진다. 권진호는 도시에서 화구들을 어렵게 구해 쓰면서도 학창 시절에 다루지 못했던 유채에 대한 공부를 이 때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작으로 남겨진 인물 유화들은 영주시기에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여겨지는데, 누드화 역시 유화로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겨진 누드화는 한 점도 없지만, 풍금을 배경으로 한 '소녀' 연작들은 여러 점이 전한다. 소녀 그림들을 반복해 그렸다는 것은 제작 장소가 학교 교실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권진호는 수정과 가필이 용이한 유회구의 특성을 이용해 인물화에 도전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남아있는 작품 모두가 60호 이상 대작들이다. 소재도 한복 입은 모습뿐만 아니라 양장을 입은 모습, 두 사람을 마주 배치한 것 등 다양하다. 초기작에서는 경직된 자세, 얼굴의 표정이나 비례의 부조화 등 어드바이스의 부재를 느끼게도 되지만, 후기작으로 갈수록 단점이 보완되어 ‘엿장수’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소녀’와 같은 작품에서는 작가의 개성을 발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작가가 얼마나 치열하게 습작에 매진했는가에 대한 해답인 것이다. 3여 년 간의 절치부심한 결과는 1939년 제18회 ‘조선미전’에 출품한 유화 ‘소한(小閑)’이 입선됨으로써 보상받았다. 이듬해 역시 유화 ‘손거울’로 연속 입선하는 저력을 이어갔다. 이후 더 이상의 출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던 것 같다는 유족의 증언으로 볼 때, 전시 체제 하에서 물자나 교통 등 열악했던 시골살이의 한계가 원인이 아니었던가 추측해 보게 된다. 해방 이후 권진호는 <옥대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부석에서 단산으로 이사를 했으며, 한국동란 와중이던 1951년, 36세의 나이로 그만 급사하고 말았다. 유족은 사망 원인을 급성 장티부스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화가 사후 유품이 된 대형이젤은 영주치과 의사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하는데, 큰아들의 치료비와 맞바꾸었다고 하니 일종의 물물교환을 한 셈이 됐다.
오광수는 30년대는 향토적 소재가 특히 만연하던 시대이며 향토적 소재로서 소녀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그들이 착용하고 있던 한복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권진호 역시 그러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본격적으로 인물화에 치중했던 시기는 탈대구 이후 독학시기라고 하겠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 「소녀」는 어느 정도 완숙기에 접어든 후기작이다. 이 그림은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했던 ‘근대를 보는 눈’에 출품되었었는데, 미술관에서 응급보존처리를 한 뒤에야 전시가 가능했을 정도로 작품상태가 열악했다고 한다. '근대를 보는 눈 : 한국근대미술 유화'는 세 개의 파트로 나뉘어 전시됐는데 권진호의 작품은 ‘대구지역 유화가들’ 코너에 소개됐다. 함께 전시된 작가로는 금경연, 김수명, 김용조, 박명조, 배명학, 서동진, 서병기, 서진달 등이었다. '그룹 활동과 이념의 다양성’ 파트엔 손일봉, 황술조, 주경, 송병돈 등 38명이, 이인성은 구본웅, 오지호와 함께 ‘특별전’에 초대됐다. 도록엔 권진호의 「정물」과 「소녀」, 금경연의 「경주 안압지 풍경」 순으로 수록되었는데, 권진호의 「정물」과 금경연의 「경주 안압지 풍경」은 수채화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권진호의 정물 「어항」(47x62cm, 1937)은 영주 시절에 그렸는데 불투명기법을 연상케 할 만큼 어둡고 둔탁한 색조로 인해 유화처럼 묵직한 느낌을 주지만 구도가 안정되고 완성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작품은 1926년 제5회 ‘조선미전’에 입선했던 장윤천(수원)의 수채화 작품 「어항」과 함께 도화교과서에서 보이는 사물 배치와 음영법 등에서 표현 형식의 유사함을 보여준다. 더불어 ‘조선미전’에 출품했던 손일봉의 여러 정물 작품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아진다. 권진호는 미술관련 기사들을 스크렙하면서 특히 손일봉에 대한 자료를 많이 모았다고 했다. 유화 '소녀'는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 기획전에 다시 한 번 초대 출품된 뒤, 미술관 측의 요청으로 동년 3월5일에 전격 기증됐다.
권진호의 수채화는 풍경화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위의 정물화 말고도 또 한 점이 전한다. 1933년 작으로 <대구농림> 시절 그린 「바이올린이 있는 정물」이 그것이다. 담채풍의 맑은 색감으로 사물 간의 시점이나 형태감을 탐구했다기보다는 구성미에 주안점을 둔 것 같은 발랄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2021년 대구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 '대구근대미술전-때와 땅' 전시 때 출품작 '두 소녀'를 미술관에서 매입할 때 기증했다.
권진호가 남긴 그림들은 1930년 <대구농림>에 갓 입학한 때부터 해방 무렵까지의 15년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투박한 붓질, 과감한 생략, 수묵화를 연상케 하는 단색조의 색감 등이 초기의 수채화풍이라면, 유채를 시작했던 영주시절에서는 양감과 구조 등 보다 서양화적인 화면으로 이행했다고 하겠다. 근래 권진호의 연도 미상의 풍경 수채화 한 점이 발굴되었는데, 미술평론가 김영동은 근경, 중경, 원경을 차례로 배치하는 공간 구도나, 인물의 전체 모습을 점경으로 넣는 방식 등이 서화 작품과 닮았다고 품평했다. 이 그림을 사생했던 장소에 대해선 박명조가 ‘조선미전’에 출품했던 ‘배수지 부근’(1932)과 ‘배수지의 언덕’(1935)이 연상된다고 했는데, 사생화라는 점에서 권진호가 대구를 떠나기 전인 1936년 이전 작품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늘과 땅을 동일 색조로 처리하여 화면 전체가 여백처럼 느껴지도록 한 점에선 전통회화에 관심을 가졌던 해방 이후 수채화풍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권진호는 ‘을축 신춘(己丑 新春, 1949) 진호 시필(試筆)’이란 자필 병풍도 남겼다고 한다. 권진호의 수채화 중 몇몇 작품은 안동의 수채화가들이 불투명화법을 구사했던 ‘자보루지’여서 흥미롭다. 요즘엔 찾아보기 힘든 마분지의 일종인데 한 면에 붉은색을 먹여 놓아 일본식 명으로 자보루지라고 불렀다. 막지인데도 불구하고 오래 되어도 변색이 되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 바로 이 그림이 자보루지에 그린 것이다.
권진호가 대구화단에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1976년 동아쇼핑갤러리 개관기념전으로 개최되었던 '대구근대미술전'을 관람하던 권오규(당시 38세, 대구의 초등학교 근무)가 “작품들이 모두 아버지 그림과 비슷하네”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옆의 어떤 이가 듣고는 부친도 화가였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부친이 <대구농림> 출신의 권진호라고 하자 깜짝 놀라며 자신도 <대구농림>을 나왔으며 아버지를 잘 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권진호는 다시 대구화단에 알려지게 됐고, 미술평론가 권원순은 권오규의 자택을 방문하여 소장작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때 말을 걸었던 사람이 권진호의 1년 후배였던 강홍철로 짐작된다. 권원순은 1993년 대구문예회관과 (주)문화방송이 공동주최한 ‘향토작고작가유작전’을 통해 권진호를 알렸다. 그때 함께 소개되었던 작가로는 서동진, 최화수, 황술조, 주경, 박명조, 손일봉, 배명학, 서진달, 이인성, 금경연, 김용조, 소삼령, 김수명, 장석수, 나재수, 백태호, 조신수, 이복, 권진호, 정경덕 등 20명이었다. 권원순은 새로 발굴된 작가와 작품으로 권진호, 최화수, 정경덕과 더불어 김호룡의 소품 2점을 꼽았다. 이때 선보였던 권진호의 작품은 유화 대작 ‘엿장수’와 ‘소녀’, 그리고 수채화 ‘정물’, ‘대구 거리’ 등 4점이었다. 권원순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선전' 작가 최화수, 권진호, 정경덕의 작품을 처음으로 발굴, 우리 미술사를 재정립하게 됐다며, 권진호의 경우 선전 입선이라는 공식기록 외에 작가적 활동이 전무 했으나 이번에 발굴된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음이 밝혀졌다”고 평가했다. 이 때 전시작 중 ‘대구 거리’가 대구문예회관에 기증됐다. 굵은 붓터치로 투명수채의 맛을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는 '대구 거리'는 1930년 <대구농림>에 갓 입학했던 시기인 15세 때 그린 것으로, 그림 속에는 여러 행인들과 함께 한복을 입은 조선 소녀와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의 뒷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상가마다 걸려있는 국기가 일장기가 아니라 태극기라는 점이 특이한데 이는 해방 후에 가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009년엔 미술평론가 김영동이 책임큐레이터로 ‘대구의 근대미술’展을 기획했다. 이로써 권진호는 대구근대미술인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됐다.
권진호의 유작 상황은 금경연(영양)의 경우보다는 많이 나은 편에 속한다. 기록이나 증언으로 보자면 두 사람 다 다작가였음을 알 수 있는데, 권진호의 경우엔 작품들이 일실된 정황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둘째 아들 권오규가 <영주중학교> 1학년이었을 무렵(1954년, 권오규는 당시 미술부원이었다.), 미술 교사 이동수(예천 출신으로 수학 교사였다고 하며, 미술을 상치했다고 보아진다)가 단산 집으로 찾아와 부친의 유작전을 열어주겠다며 소달구지로 작품들을 가득 실어갔다고 한다. 유작전은 <영주중부국민학교>(현 영주중앙초) 강당에서 개최되었는데, 전시회가 끝난 뒤 작품을 제대로 돌려주지 않아 대부분의 유작들이 그때 산일되고 말았던 것. 이 장소는 1956년 손일봉이 자신의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던 곳이기도 한데, 유작전이 개최된 때가 손일봉이 <영주여중> 교장으로 재직할 때라 유작전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상황이 드러난 바는 없다.
권진호는 피난을 떠나면서도 가장 먼저 챙긴 것이 그림이었다고 한다. 네모 통을 만들어 그 안에 그림들을 말아 넣은 뒤 위·아래를 봉합해 외딴 곳에 살고 있던 소사 집에 맡겼다고 한다. 당시 <옥대초등학교>에 주둔했던 부대장이 그림을 달라고 했을 때도 전쟁이 끝난 뒤에 가져가라며 기지를 발휘했다. 이렇듯 애착을 쏟았던 작품들이었기에 안타까움이 더한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영주역 앞 삼일다방에 폭포그림(유화 50호 크기로 추정)이 걸려있어 당시 영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둘째 아들 권오규가 선친의 작품을 보러 자주 들렸다고 한다. 이 외에도 다수의 그림들이 공공장소나 가정집에 걸려있었다고 하니, 언젠가는 유작들이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주)
1) 권오규(1942~) 권진호의 삼형제 중 둘째 아들. 영주중학교(6회) 때 미술부활동을 했으며, 안동사범 11회 졸업 후 <영주중부초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79년 대구로 전입, 2004년 <대구북부초등학교>으로 정년퇴임했다. 부친의 유작들을 대부분 소장하고 있으며, 2019년 형제들이 따로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 모두 한 곳으로 모았다.
2) 대구공립농림학교: 1910년, 실업학교 설치에 관한 순종(純宗)의 칙령반포(勅令頒布)로 3월14일 인가를 받고, 대구 교동(구.향교)에서 본과 2년, 속성과 1년제로 5월10일 개교했다. 11월1일에는 <대구공립농업학교>(1919년엔 3년제, 1924년부터는 5년제), 1946에는 <대구농림중학교>(6년제), 1951년에는 <대구농림고등학교>(3년제)로 변모를 거듭했다. 대구·경북 지역의 공립교육의 효시(嚆矢)이며, 현재의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는 2000년 3월1일에 개명됐다.
3) 최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열화당, 2015 p345
4) 「두 여인」 Oil on canvas 109.5x140.5cm, 연도 미상, Private collection, 2021. 대구미술관10주년 기념 ‘대구근대미술전 1920s-1950s 때와 땅’전(2021.2.9.-5.30) 출품작.
5) 오광수, 「근대기 미술작품 속에 나타난 아이들」
6) 최은하(관훈갤러리 큐레이터), 「근대 한국 수채화이 전개」 ,p89, 『한국근현대미술사학』16, 2006.8
7) 권오규의 누이동생(대구) 소장. 형과 남동생 등에게 분산되어 있던 작품들이 2019년 서울 형 댁의 집수리 때문에 소장품들이 모두 대구에 사는 둘째 아들 권오규에게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때 남동생의 작품도 함께 오게 되었다고 한다.
8) 김영동, 「영남(대구)지역 수채화의 기원과 특징 연구-수채화와 대구 서양화의 관계를 중심으로」, 『경북근대미술 수채화의 전통과 맥』 도록, 경주솔거미술관, 2020, P66
9) 대구일보(1993.5.29)
10) 김영동 『근대의 아뜨리에』 한티재, 2011
11) 송재진, 『흔적과 기억, 송재진 영주·경북미술 순례기』 나무아트, 2016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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