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봉화 물야면 행계천 답사

즈음 2022. 2. 27. 16:07

봉화 물야면 행계천 단상

 

 

 

물야면 소재지인 오록리를 빠져나와 우측 산으이(山雲) 마을을 거쳐 사니재와 이애재를 넘으면 두문 동네다. 사니재에서 두룩실로 내려와 우회전하여 이애재를 넘는 게 편한 코스지만, 지금은 사니재에서 곧장 샘골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포장되어 이애재를 넘지 않고 곧장 두문으로 갈 수가 있다. 샘골가는 길은 비포장길일 때는 깊은 산중 길로 접어드는 것 같은 운치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낯선 느낌에 사로잡힌다. 두문(斗文)은 우리말로 말문이라고 하는데, 경주 김씨들이 400여 년 전부터 세거해왔다고 한다. 뱀골이라고 불렸으나 과거 급제자들이 배출되면서 되 글을 배워 말 글로 써먹는다는 의미로 동네 이름이 두문으로 바뀌었단다.

 

물야면 소재지 오록리 초입. 좌측 다리를 지나면 산으이 동네, 사내재 가는 길
물야 오록리와 두문리를 잇는 사니재(오록 방향)
사니재 정상. 좌로 내려가면 두룩실, 앞으로 난 고개를 넘으면 샘골

 

수식 방향 석시마골 부근을 지나칠 때면 바퀴는 으레 멈출 줄을 안다. 길과 함께 흘러가는 개울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개울을 행계천이라고 하는데 압동리에서 발원하여 수식리를 거쳐 화천리의 북편에서 부석에서 내려오는 낙화암천과 합수한다. 여느 지방하천처럼 구불구불, 졸졸졸 흘러가는 평범한 개울이지만 두문재에 이르면 깊은 골짜기를 이룬 듯 깊고 그윽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이다.

 

길이 포장되면서 한 번, 확장되면서 또 한 번 경관의 손실이 더해졌지만, 여전히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내 안엔 큼직한 바위들과 너른 반석이 오밀조밀 집약되어 옛사람들 역시 풍류나 계회의 욕심을 부렸으리라 쉬 짐작이 간다. 겨울 가뭄에 수량도 적고, 내 안으로 쓰러져 있는 고사목과 마른 풀더미 사이에 낀 비닐과 폐품 조각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 마음은 이내 미안함으로 바뀐다. 인간의 실용 의지 앞에 경관 따위는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어제, 오늘 깨달은 바는 아니지만, 이런 광경에 맞닥뜨릴 때마다 감상을 제어하지 못하는 게 병인가 싶다.

 

개울 건너편에 계축회기념비라 새긴 비가 보이고, 기슭을 떠받치고 있는 암벽엔 붉은 해서로 가로 새긴 거래암(去來巖) 글씨가 선명하다. 위아래로 시선을 훑어가자니 그늘진 기슭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소리와 바위에 부딪치며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화음을 이루는 듯 여름날의 한때가 저절로 그려진다. 거래암은 처사 배유장(楡巖 裵幼章, 1618~1687)으로부터 유래됐다. 재향지(梓鄕誌)두문 수구에 있다. 흰 반석이 두 산 사이에 가로 펼쳐져 있는데, 그 가운데로 냇물이 맑게 흐른다. 물가 좌우에 앉을 만한 평평한 돌이 수십 보 연이어져 있다. 시내를 따라서 내려가면 삐죽삐죽한 돌이 빽빽이 서있어 여울 소리가 세차게 들린다. 참으로 수석이 아름다운 곳이다. 유암 배처사가 영천(榮川)에 왕래할 때 항상 이곳에서 쉬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행계천과 합수지점으로 흘러가는 낙화암천
낙화암천에 합수되는 행계천

 

개울 맞은 편 산자락에도 조경을 해놓은 듯 비탈 가득 바위들이 듬성듬성 어우러졌는데, 통나무로 짠 벌통들이 마을을 이룬 집들처럼 느껴져 언뜻 무속촌의 모습이 저런 것일까 싶은 상상이 동한다. 부조화의 조화미라 할까, 햇살까지 더해지니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보태진다. 이 개울의 석계미는 두문재 너머 범우골 초입까지 이어지다가 수식 벌을 적실 때면 내 폭도 넓어지고 물흐름이 가는 듯 마는 듯 턱없이 여유로워진다. 수식(水息)이라는 명칭도 이런 내의 모습에서 연유된 것인지 모를 일이다. 내 옆 약간 둔덕진 곳에는 행계서원(杏溪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강학건물인 흥교당(興敎堂)은 새로 단장이 되어 있지만, 뒤편 위도사(衛道祠) 사우는 오랜 세월의 간격을 잊게 해 줄 만치 쇠락한 모습 그대로다. 여기엔 김강(汚叟 金鋼, 1609~1669)과 조카인 김홍제(北壁 金弘濟, 1661~1737)의 위판이 배향되어 있다. 맞은 편 산록에는 김강의 부친인 김이선(寒泉 金履善)이 지은 한천정사가 아슴히 마주 한다.

 

수식 들을 흘러가는 행계천과 저 멀리 보이는 행계서원
흥교당
위도사
행계서원 맞은 편 한천정사

 

김홍제는 수식 원당골 사람으로 개단 도사리에 살았다. 오록리 창마를 개창한 김정(蘆峯 金亻政 1670~1737), 창마의 옆 동네인 너다리(板橋)김정원(淸澗堂 金鼎元, 1655~1735), 그리고 이화익(기백 李華翌 1644~?) 등과 함께 만석산(493.6m)천석산 안에 사는 사우로 꼽힌다. 이화익은 본관은 경주, 자는 순경(舜卿)이다. 1678년(숙종4년) 증광시 진사에 3등 38위로 합격했다고 전한다. 주거지는 예천이라고 되어 있는데 봉화에 들어와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영조원년 1724, 4월)에 이름이 보인다. 내성천 가 송림에다 사우대(四友臺)를 만들고 대 앞에 못을 파니 그 안에 일곱 바위가 들어 있어 칠성지라 했다. 이 일곱 개의 바위는 봉화 지역 내 일곱 명의 거유를 지칭한다. 개단리 문양마을의 이동완(茅山 李棟完1651~1726), 닭실마을(酉谷)권두인(荷塘 權斗寅, 1643~1719), 권두경(蒼雪齋 權斗經, 1654~1725), 권만(江左 權萬, 1688~1749), 해저리의 김성구(八吾軒 金聲久, 1641~1707), 안동에서 태어나 춘양에서 살았던 이완(龜厓 李琓, 1650~1732), 명호 삼동리 출신의 이광정(訥隱 李光庭, 1674~1756) 등이 그들이다. 이 중에서도 이완, 권두인, 권두경, 이동완은 천성사로(川城四老)라 불리었다. 이들 11명이 모여 계를 만들었는데 이를 송정(松亭)이라 했음을 북벽집에 기록해 두고 있다. 송정은 김정이 경영했던 오계구곡(梧溪九曲) 5곡에 해당하며, 이곳에서 김정은 자신의 은거지인 창마를 멀찍이서 바라보았을 것이다.

 

물야중학교에서 바라본 만석산(오른편)과 천석산(왼편)

 

봉화의 서편에 드넓게 자리한 진산이 바로 매봉산(587.1m)이다. 수식리는 산자락의 서편에 해저리는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 두 동네를 이어주는 길이 더구로두문로인데 더구로는 해저에서 수식까지, 두문로는 수식에서 가평리까지로 매봉산을 감싸고 돈다. 이 코스가 바로 봉화 1번 군도이다.  바퀴에 얹힌 호사로운 답사 중에 옛사람을 떠올리는 것이 문득 불경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훼손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그 안에 깃든 도를 발견하고 무위의 경지를 노닐었을 모습을 떠올리면 한편 부럽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2022.2.16 素白

 

주)

1. 영천(榮川) 현 영주의 옛 명칭

2. 재향지(梓鄕誌)1849(헌종15) 순흥도호부의 사족 안정구(安廷球, 1803~1863)가 편찬한 사찬 읍지이다. ‘재향(梓鄕)’이란 말은 시경에서 따왔는데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의미한다. 2009년 소수박물관에서 (국역) 재향지를 발간했다. p56

3. 계서당은 성이성(溪西 成以性, 15951664)이 광해군 5(1613)에 지었다고 전한다. 성이성은 문과에 급제한 후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3차례나 어사로 등용되었을 정도로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춘향전에 나오선 이도령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