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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당 최남주와 이인성

즈음 2021. 5. 6. 08:10

석당(石堂) 최남주(1905~1980 경주)이인성(1912~1950 대구)

 

 

일본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문화재 약탈행위는 1876227,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조일(朝日) 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래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을 벌여가며 조선을 반식민지화 해나가는 동안 계속됐다. 당시 조선에는 문화재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무렵인데, 일본인들은 보란 듯이 도굴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것. 1907년께는 지키는 이 없던 석굴암 소문이 일본인에게 퍼졌고 일본인들이 가져가기 좋은 작은 불상들을 훔치면서 본존불 뒤편 둔부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또 불국사 다보탑 상층 기단 네 귀퉁이 작은 돌사자상 넷 중 하나만 남기고 셋을 훔쳐 갔다. 1909년 가을,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도 순시길에 석굴암을 다녀갔는데, 그 뒤 석굴암 안의 대리석 오층소탑이 사라졌다. 총독이 직접 약탈해 간 사건이었다.

 

1910, 한일합방 국치년을 맞아 경주의 명망가들이 경주신라회를 결성했다. 한일합방이 되기도 전부터 일인들의 도 넘은 도굴과 도적질에 경주의 유지들이 뜻을 모은 것이다. 이들은 민족정신을 보존하려는 의지를 선보였는데, 이 단체는 후에 경주고적보존회의 모태가 되었다. 1913년에는 동부동 객사 건물에 전시관을 마련하고 유물들을 전시했다. 이처럼 경주의 선각자들은 일본인들에 의한 고적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계몽적 차원에서 고적애호 운동을 벌여나갔다. 민간문화재보호단체의 효시가 된 경주고적보존회1922년 재단법인으로 발전되었다. 1921, 오사카 킨타로가 중심이 되어 금관총을 발굴한 이래, 경주는 고도로서의 명성과 함께 고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26경주고적보존회에 선각자이자 미술 분야 딜레탕트인 석당(石堂) 최남주(1905~1980)가 근무자로 이름을 올렸다. 동년, 석당은 유물들의 훼손과 도굴을 막기 위해 경주박물관 창설에도 참여했다.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개관될 때 경주고적보존회야말로 마중물 역할을 했던 것이다.

 

30년대에는 많은 화가들이 창작의 영감을 얻기 위해 경주를 방문했으며, 그들은 모두 석당(石堂) 최남주(1905~1980)와 교유를 했다. 춘곡 고희동, 관재 이도영, 무호 이한복, 위창 오세창, 춘초 이영일 등 당대의 거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주답사 기념으로 그림 한 점씩을 그려 석당에게 보냈다고 한다. 서양화가들로는 나혜석, 이인성, 심형구, 이마동, 이쾌대, 김용준, 함대훈, 그리고 친구인 황술조가 있었고, 조각가로는 김복진, 윤승욱 등이 다녀갔다. 이인성의 대표작 경주의 산곡에서도 이 무렵 탄생됐다. 석당은 이인성과의 첫 만남의 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35년 봄날, 작달만한 키에 화구를 둘러맨 청년 한 사람이 경주박물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대뜸 당시 <경북고여(慶北高女)> 교장으로 있던 시라카미(白神壽吉)의 소개장을 내밀면서 당신이 최남주요? 나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선 제일의 서양화가 이인성이요.”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때 그는 나를 단순한 고적안내원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석당은 자신보다 10살쯤 아래로 보이는 젊은이가 너무 당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시라카미 교장의 소개장을 끝까지 읽어보았다. 시라카미는 자신이 친아들처럼 각별히 아끼는, 조선화단에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이인성군이 신라유적지를 스케치할 수 있도록 특별히 도와주었으면 한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해두었다. 이렇듯 뜬금없는 만남이었지만, 석당은 이내 이인성의 대가다운 면모를 받아들이게 된다. 고도의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다가 석양배(夕陽杯)를 부딪치며 동서고금의 예술담론을 나누다보니 이인성은 나름대로 역사관과 예술관을 가진 사람임을 알아차리게 됐다. 이인성은 자신의 몸속에도 신라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솔거 이후에 후세 길이 남을 만한 대작을 구상해 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인성은 경주에 일주일 정도 머물며 많은 스케치를 했다. 이후에도 5차례나 더 경주를 방문하여 석당으로부터 신라의 미에 대해 설명을 듣고, 그 자신 신라의 미를 느끼면서 영감을 구체화해 나갔던 그림이 바로 경주의 산곡에서이다. 화면 중앙에 포치된 경주 산골의 아이들은 가난하지만 맑은 영혼을 가진 내면의 세계로 표현하였고, 멀리 남산과 반월성, 첨성대 그리고 들판에 뒹구는 신라와당들은 조화롭게 붉은 색조로 설화적으로 형상화 시켰다. 이렇게 조선미전최고상에 빛나는 경주의 산곡에서라는 작품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인성의 나이 불과 23세 때였다. 당돌하기 짝이 없었던 이인성이나, 그 속을 들여다보고 대가의 풍모를 읽어냈던 석당의 포용력이나 모두 범속을 뛰어넘는 안목임엔 틀림이 없다.

 

 

주1) 강화도 조약: 1876(고종 13) 일본의 운요호 포격에 대한 힐문(詰問)과 개항을 요구하며, 군함 5척으로 강화도에 이르러 조선 정부에 담판을 요구하여, 국제 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조약 체결 교섭에 응하여 227일 조약체결을 함.

주2) 최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열화당, 2015, p85, (재인용)이구열, 한국문화재수난사돌베개, 1996, pp.86-88)

주3) 국립경주박물관: 1926년 옛 경주관아 자리에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개관. 19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2002년 미술관을 신축했다.-경주시사

주4) 1935, 14조선미전최고상(창덕궁상) 수상 작품

주5) 석당(石堂) 최남주, 20. 조선 근대화단에 담겨진 신라의 혼, 유고집 신라의 얼 찾아 반세기

주6) 석당(石堂) 최남주, 위의 글, 도판 그림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