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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近園) 김용준(1904~1967 선산)

즈음 2021. 5. 20. 19:54

근원(近園) 김용준(1904~1967 선산)

 

 

90년대 초 글쓴이가 모 사립 여중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을 때, 가장 마음이 통했던 분이 국어과 임선생이었다. 임선생은 겸손이 몸에 밴 사람으로, 호 또한 우곡(愚谷)이었. 늘 책을 가까이했던 임선생은 학교 도서관을 자신의 별장인 냥 아끼고 사랑했다.

 

공립학교로 나온 지 일 년쯤 되던 해였다. 우곡과 둘만이 스모노 안주에 관한 한 원조를 자부하던 수생집 골방에다 전을 폈다. 얘기가 한창 무르익어가던 도중에 우곡이 슬그머니 일어나 방을 나갔다. 화장실에 가나보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얄궂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불현듯 우곡이 돌아왔다. 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그 사이 몇 백 미터나 떨어진 스쿨서점에 다녀온 거였다. 불쑥 건네주는 문고판 책을 받아드니 우곡이 조금 전까지 얘기했던 김용준의 그 근원수필이었다. 책 뒤페이지엔 송선생님께. 배움은 끝이 없고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영원합니다.’ 라는 필적까지 남겨놓았다. 이후, 이 책은 나의 애장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일 책 속 육로를 흉내 낸 글까지 쓰게 만들었다.

 

육로(鬻盧)

 

삼십여 년 전, 총각 때 샀던 영주동 기와집을 이웃 분에게 판 적이 있다. 어느 날 그 앞을 지나치는데 빈터가 된 모습이 심금을 울렸다. 문득 근원수필에서 읽었던 육로(鬻盧)라는 한시가 떠올랐다. 나와 같은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웃사람에게 집을 팔고 난 뒤의 심경을 읊은 시였다. “정원의 버드나무는 후일 이 집 앞을 지날 적에 나를 남인 듯 여길 테지하며 탄식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의 집 마당에도 동편에는 감나무, 가운데는 목련, 서편에는 모과나무가 그늘을 다투며 십 여 년 동고동락해 왔었다. 그때까지 감나무와 모과나무는 양편으로 살아남아 있었다. 집을 팔 적에 나무들의 운명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나마 다행이다 여기며 육로라는 시를 떠올렸던 것이다. 송씨라는 분은 나무를 무던히도 사랑하였지만, 나는 생명에의 선의가 고작이었다. 여느 행인들처럼 대한다 한들 소회가 있을 리 만무였다. 더구나 가난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팔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송씨처럼 한 줄의 글로나마 심경을 읊조린 적도 없었다. 하물며 시를 읽고 감격하여 샀던 사람이 그 집을 도로 내어주고 빚마저 갚아주었다는 후일담은 책 속 이야기일 따름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가 가슴속에 맴돌았던 것은 담담하게 읊은 작자의 감정에 저절로 편승된다는 것이고, 나무에 대한 애정 또한 풍류의 경지라는 부러움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십 여 년이 더 지난 지금, 빌딩의 뒤 안이 되어 바퀴 쉼터로 변한지도 오래되었으니 무상한 마음이 끼어들 틈조차 사라지고 없다. 2017

 

 

자화상

예나 이제나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무엇보다도 자유스러운 심경을 잃고는 살아갈 수 없다밤낮으로 기원하는 것이 이것이었건만 이 조그만 자유조차 나에게는 부여되어 있지 않다.” 일제 식민지 지식인으로 젊은 시절을 치열하게 도강해 왔던 김용준은 194845세 때 출판한 근원수필발문에서 이렇게 심경을 토로했다. 해방이 된 뒤에도 미군정, 6.25전쟁을 겪다가 급기야는 월북을 선택했던 사람. 그러나 일제강점기 내내 화가로서의 김용준은 왜색 동화와 서구 추종이라는 민족 화단의 줏대 없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고, 붓과 더불어 펜으로써 매섭게 논쟁의 중심으로 돌진했던 맹렬 비평가이자 문필가였으며, 사상의 편향이 없던 민족주의자였다.

 

한편으론 이러한 투사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근원(近園)’ 이나 검려(黔驢)’, ‘우산(牛山)’과 같은 호를 통해 겸손과 초탈의 인간미를 엿보게도 해준다. 근원수필에는 아호인 우산에 얽힌 감정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어떤 입버릇 험한 친구가 필명으로 사용하던 선부’(선산 사람이라는 의미)에다 우산을 붙여 창씨개명식으로 우산선부(牛山善夫, 우시야마 요시오)’라고 입을 놀렸던 모양이다. 불쾌감에 호를 갈기로 작정했고 그 뒤로 호를 여럿 지었다고 적고 있다. 대표적인 아호인 근원평생 남의 흉내나 겨우 내다가 죽어버릴 인간이라 근원(近猿)’으로 했더니 같은 동물에 같은 글자이면서도 밉고 고운 놈이 있는지 아호에도 ()’자만은 딱 붙이기가 싫어서 ()’자로 고치고 말았다고 술회하기도 했다.겸려역시 보잘 것 없는 솜씨와 힘을 비유적으로 이른 검려지기(黔驢之技)’라는 고사에서 따왔으며, 지극한 겸손함이 묻어난다. ‘우산또한 선가의 심우송(尋牛頌)’에서 얻었다고 했으니, 그의 인간미가 호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김용준은 자신의 타고난 기질을 문예 다방면으로 구사했던, 근대기 한국화단에서 열외가 불가능한 사람이다.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으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평론 분야를 섭렵하였고, 조선미의 전통성을 지키고자 서른 중반 나이에 과감히 동양화로 전공을 바꾸기도 했다. 미술사학자로서 1949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라는 저작을 남겼는가 하면, 문학 방면으로도 근원수필(1948)이라는 명저를 남겨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태준(1904~1960 철원), 김기림(1907~? 함북 학성), 정지용(1902~1950 옥천) 등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1939년에 창간된 문장(文章)’지 동인으로 주옥같은 수필들을 발표했다. 김용준은 문인화가적 편모와 모더니스트다운 세련미를 유감없이 발휘한 뛰어난 문체로 화가인지 문장가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김용준은 잡지의 표지화나 내지화도 맡았는데 북디자이너(장정가)의 면모 또한 유감없이 발휘했다. 1939년에 그린 표지화는 전통을 계승하는 수준의 문인화였지만, 1940년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현대적 감각으로 문인화풍의 소재를 재해석하거나 제발(題跋)을 사용하는 등 사의(寫意)성이 담긴 신문인화풍의 표지화로 나아갔다. 김용준은 단순히 문인화를 계승하고자 하는 복고주의의 회귀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끌려 다닌 일본의 미술양식에서 벗어나 조선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동시에 자주적으로 근대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용준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약재상을 하는 형 김용수를 따라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으로 갔다. 거기서 1919<황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수재 소리를 들었던 김용준은 이듬해 4, 경성의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진학, 전교 2등에까지 올랐다. 고보시절 미술교사는 최초의 도불화가 이종우(1899~1979 황해도 봉산)였다. 이종우는 1923년 교내에 도화교실을 개설시킨 고희동(1886~1965 서울)으로부터 교사 자리를 이양 받고 도화교실 운영을 이어나갔다. 도화교실은 여러 학교 미술지망 학생들이 방과 뒤 그림을 배울 수 있는 특별활동 아뜨리에였으며, 본교 학생인 김용준, 길진섭(1907~1975 평양), 구본웅(1906~1953 서울), 김주경(1902~1981 진천) 외에도 <휘문고보> 4학년인 이마동(1906~1981 아산)까지 배우러 나왔다. 동년 9, 고려미술회에서도 교육기관인 고려미술원을 설립했다. 고려미술회는 ‘조선의 미술, 특히 나려시대의 고유한 미술을 회복, 개척할 목적을 가지고 동인제로서출발했던 단체였다. 김용준은 도화교실 동료들과 함께 이곳에서도 미술수업을 받았다. 이들은 이듬해 제3조선미전에 전원 입선하며, 언론으로부터 미전의 권위를 독점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때 김용준은 5학년 졸업반으로 첫 출품이었는데 특히 자신의 작품 동십자각이 빛발을 받았다. 원제목이 건설이냐, 파괴냐였는데, 총독부에 의해 동십자각으로 변경된 것이 이슈로 부각됐던 것이다. 이는 경복궁 안에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동십자각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에서 연유되었다. 김용준은 당시의 심경을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영광이라는 생각보다도 부끄러운 생각이 먼저 납니다. 동십자각을 그린 것은 동십자각 옛 건축물 앞으로 총독부 새 길을 내느라고 집을 허는 것을 볼 때에 말할 수 없는 페허의 기분이 마음에 들어 그것을 캔버스에 옮겨놓은 것입니다. 졸업한 후에도 미술을 연구하고 싶으나 뜻같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종우는 후일 이 사건에 대해 총독부가 경복궁을 비롯한 문화재 파괴를 거침없이 펼치는 시절에 고보학생이었던 김용준의 이러한 미술적 도전은 매우 신선한 사건이었다.”고 술회했다. 이종우는 이 작품을 학교 운영자인 인촌 김성수에게 넘기고, 김용준의 일본유학 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1926, 김용준은 진경숙과 결혼하고, 고려미술원에서 함께 수학했던 김주경, 길진섭, 이마동과 더불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오지호(1906~1982 화순)도 동기생이 되었다. 동시에 동갑내기인 평생의 지기 이태준을 만났다. 이태준과 함께 표현파를 추구하는 유학생들과 합심해 백치사(白痴舍)’를 조직하는 등 문예인으로서의 기질도 발휘했다.

 

김용준의 저항적 기질은 이미 고보시절 동맹휴업의 지도성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에서도 가늠이 된다. ‘동맹휴학은 항일학생운동이 가장 활발하던 1920년대에 제일 많이 일어났는데, 특히 19266·10학생운동 이전의 동맹휴학은 학교당국, 나아가 식민지교육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일어난 것이 주를 이루었다. <동경미술학교> 졸업 작품전에 출품했던 그림이 압수를 당했다는 일화 또한 김용준의 기질을 가감없이 읽게 해준다. 식민지라는 현실을 자각하고 저항적인 작화태도로써 달리는 기차가 전복되는 그림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상과 멸망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김용준은 화가보다는 미술평론가로서 더 큰 의미를 획득했다. 처음 발표했던 글이 <동경미술학교> 2학년(1927) 때 대구에서 쓴 화단개조라는 글이었다. 이는 유학 초기 일본 전위작가들이 수용했던 프롤레타리아 사상에 일시적으로 경도되어 급진적인 사회주의예술에 동조했던 글이었다. 그러나 3개월 후 무산계급회화론프롤레타리아 미술비판을 조선일보에 잇달아 발표하면서 사회주의예술과 결별했다. 즉 프로미술 논쟁에서 순수주의 미술논쟁으로의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동시에 아카데미즘에 대해서는 부르주아의 전유물이라고 비판했으며, 서구의 표현주의를 지지했다. 이처럼 피지배민족의 지식인으로서 급진적 사상에 빠져들었다가도, 예술이 정치나 사상의 도구가 아니라는 점을 간파하고 순발력 있게 빠져나왔던 것이다. 당시 프로미술을 옹호하는 임화(1908~1953 서울)와의 논쟁을 통해 당대의 가장 뛰어난 비평가로 명성을 얻게 되는 계기도 만들었다. 김용준은 이후 사회주의예술관에서 탈피하여, 민족과 조선미의 전통계승 방법을 찾기 위해 부심했다. 조선적인 것에의 모색을 위해 전통과 고전을 탐색하면서 향토색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용준은 한국미의 특질을 가장 먼저 규명한 고유섭(1905~1944 인천)에 이어 윤희순(1902~1947 서울)과 함께 한국미에 관심을 가진 몇 안되는 한국인이었으며, 전통에의 재음미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용준은 한국미의 특질을 한갓 고고 유물에 산재하는 것으로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오늘날 전승시킬까가 더욱 중요함을 역설했다.

 

19365, 김용준은 당시 미술계를 휩쓸었던 향토색이라는 낱말을 대상으로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라는 글을 통해 이론 쪽에서는 볼 만한 것이 없지만, 김종태(1906~1935 김포), 김중현(1901~1953) 같은 화가가 창작 쪽에서 볼만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먼저 향토색을 로컬칼라 local color라고 표현하고 김종태가 조선인의 기호색인 원시적 색조를 민족적인 색채로 알고, 색채상으로 조선적인 리듬을 찾아내고자 했다.’고 소개했다. “나보다 좀 후배이긴 하나 김종태군은 발랄한 재기와 예리한 감각으로 가장 참신한 그림을 그려서 장래가 퍽 촉망되더니 아까운 재주는 요절하는 것이 상례인지 평양에서 불의의 열병으로 객사를 하였다.”근원수필에서 그 비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다음 김중현의 경우 취재(取才)로 조선을 대변하려 했다,’고 소개했는데 김중현에 대해서는 전설이나 풍속 등 소재면에서 향토색을 잘 구현했던 작가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김용준은 서양화단의 대표작가군을 동경유학생, 서구유학생, 국내파(이승만, 윤희순, 정현웅, 홍우백, 김중현 등)로 구분하고 국내파 작가들까지 화단사에 흡수시켰는데 국내파 화가들의 수준이 유학파에 결코 뒤지지 않음을 높이 평가했던 듯하다.

 

김용준은 일찍이 향토색의 구현을 1930년 대구에서 발족된 향토회를 통해 실현코자 했다. ‘향토회1935년까지 6년간 전시를 개최하며 존속하였으나 김용준은 이듬해 서울에 정착하면서 지속적인 참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용준은 <동경미술학교> 유학 시절부터 대구에서 글을 발표하거나, 지역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해 왔음은 알려진 바다. 19301017일부터 20일까지 조양회관 대강당에서 개최되었던 제1회 향토회전 때는 3점의 작품을 출품했지만 이후 전시회는 2회전 때까지만 참여했다. 1928년에 결성된 영과회 2회전에도 시인 이상화와 함께 출품했는데 영과회의 해체 이후 향토회발기인으로 의욕을 보였던 것이다. ‘향토회라는 명칭 또한 김용준의 의도가 깊이 관여됐다고 보아지는데, 이 시기 <동경미술학교> 출신들의 동문회인 동미전창립의 변에서 그러한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김용준은 조선미의 본질적 특징을 찾고자 한다며 운을 뗀 뒤 '조선의 예술은 서구를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며, 민족주의적 입장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진실로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율조를 찾는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나아가 동년 12, 예술의 순수성을 내세우며 길진섭, 이마동, 김응진, 구본웅(태평양미술학교)과 함께 백만양화회(白蠻洋畵會)’의 발족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시기 김용준은 자신의 전위미술론을 통해 현대의 모든 서구 예술을 연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서구의 현대 예술이 동양정신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서양미술사관은 심영섭(?~?)의 아세아주의론과 같이 동양주의 토대에서 서양미술사를 파악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용준은 심영섭의 아세아주의론에서 머물지 않고, 조선의 전통미술도 연구하여 새로운 조선의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민족적 지향점을 명확히 하였다는 점에서 심영섭의 아세아주의론과 차별화된다. 이처럼 김용준은 민족적 지향점으로서의 향토색향토회를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대구미술관 학예사 박민영은 김용준의 향토회활동에 대해 그는 주활동지가 서울이어서 이 단체를 통해 그의 향토색론을 구체화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향토회활동의 결과로 향토 정조를 구현한 작가가 나타나는 데 일조했다고는 볼 수 있다.”며 김용준의 대구 지역 역할에 대해 일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향토색논쟁이 시대적 담론으로 부상함에 따라 김용준은 민족미술의 키워드로 조선미술론을 내세우게 된다. ‘조선미술론은 단순히 전통의 계승이라는 복고적 차원을 넘어, 18세기 진경산수풍속화’, ‘민화같은 데서 자생적 근대의 기운을 감지하고 그것을 20세기로 소환하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김용준이 전통의 계승의 시발점으로 삼은 시대는 조선 후기였으며, 그 지점에서 진정한 민족예술의 근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보아진다. 김용준은 겸재 정선의 사실정신을 더욱 진전시킨 김홍도의 회화에도 주목했다. 특히 풍속화는 상층부의 고아한 미적 취미가 아닌, 일반 서민들의 현실과 생활감정을 생생하고도 사실적으로 화폭에 담아 서민들이 부각되는 시대상을 반영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국제양식으로의 복귀를 통해 조선미술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추사 김정희를 만났다. 일제는 문인화를 조선미전에서 제외시키면서 미술이라는 신개념에 비춰 비전문적이고 분화 이전의 낙후된 조형으로 낙인찍은 바 있다. 시서화일치 사상의 와해와 함께 시는 문학으로, 서는 서예로, 화는 직업화가의 분야로 와해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김용준은 오히려 문인화야말로 동양적이며, 가장 조선적인 정신성을 함유하고 있는 예술임을 재발견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문자향(文字香 · 서권기(書卷氣)’로 함축된 아마추어리즘과 추상적 문기의 정신성을 예술혼으로 대체시킨, 근대적 예술가 개념을 일깨워준 오원 장승업이라는 존재에 주목했다. 김용준은 1928(25)경 친구들과 함께 대구 근교 월촌에 사는 한 부호의 집에서 10절로 된 오원 장승업의 기명절지병을 보고 전통회화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는 점을 수필집 속에 술회해 놓고 있다.

 

김용준채화(彩畵)를 찌꺼기 술이라면 묵화(墨畵)는 막걸리요, 사군자는 약주요, ()는 소주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진한 소주를 항시 가까이 했던 사람이었다. 마침내 김용준은 향토색이나 조선미술론등 자신의 동양주의 미술론을 완성하기 위해 30대 중반의 나이인 1939년부터 전통적인 동양화로 과감히 전향했다. 전향 요인은 여러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겠으나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를 첫 대면했을 때의 인상이 잠재의식으로 남아 무의식적으로 작동되고 있었음은 간과할 수 없다. 김용준는 수필 오원일사(吾園軼事)를 통해 조선회화에 대한 인식 전환이 전통이나 민족 같은 이념이 아니라 장승업의 기명절지화에서 받은 미학적 충격에서 비롯되었다고 기술했다. 또한 글에서 언급한 기명절지가 지금 통용되는 장르 명칭이 되었다는 점, 기명절지화가 나타난 배경 등을 알려주는 중요한 글이 되고 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조선 문화계에서는 전통 성찰의 움직임으로 인해 서양의 표현주의와 접맥된 동양주의 미술론이 화두로 떠올랐으며, '조선적인 것을 모색하고 전통과 고전을 탐색하려는 시도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향토색’, '동양주의' ‘조선미술론등 미술계 담론이 지펴지던 이런 시기에 어릴 때부터 지필묵에 익숙했던 환경이나 모더니스트이면서도 골동애완의 취미가 컸던 친구 이태준의 영향, 1937,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던 목일회 사건 등등이 민족주의 화가로의 전향을 부추긴 요인으로 지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멀리는 조선미전에 첫 입선했던 1924년의 일화 역시 민족화가로서의 싹을 미리 보여준 예라고 하겠다.

 

<동경미술학교> 졸업 후 김용준은 1937<보성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3월에 딸 석란(夕蘭)을 입양했다. 1944년에는 결핵을 앓게 되어, 1934년에 구입해 10년간 살았던 성북동 자택 '노시산방'(老枾山房)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 신안)에게 넘겨주고 의정부로 이주했다. 마당 앞에 늙은 감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기에 이태준이 노시산방(老柿山房)’이라는 당호를 지어주었고, 자신 역시 아호로 노시산인을 쓰기도 했던 집이다. 김병종(서울대 교수)“‘노시산방옛 서재 앞 가장 오래된 감나무의 한 가지는 그 끝이 길 건너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 홍성)의 고거(故居)심우장(尋牛莊)’을 향해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생전에 지척에 살다가 함께 북으로 갔던 상허(尙虛) 이태준의 고가 수연산방(壽硯山房)’ 쪽으로 향해 있다. 또 다른 가지 하나는 애제자 산정(山丁) 서세옥(1929~2020 대구)의 한옥 문향관(聞香館)’을 향해 북향으로 뻗어있다.”노시산방의 감나무를 묘사했다. 김병종은 성북동을 이외에도 우국지사 민영환음벽장(飮碧莊)’, 민족미술의 수호자 간송 전형필(全鎣弼1906-1962 서울)보화각(葆華閣)’ 등이 산재한 곳으로 민족예술의 종택 같은 곳으로 지칭했다.노시산방은 수화의 손에 넘어가면서 수향산방(樹鄕山房)’으로 당호가 바뀌었는데 김환기는 자신의 호에서 한 자를, 사랑하는 아내 향안의 머릿글자를 조합해 이름을 지었다. 이후 수향산방은 집값이 많이 올라, 김환기는 김용준에게 미안함을 표하며 가끔 용돈도 주고, 자신의 애완 골동품을 주기도 했다 한다. 김용준 역시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 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라고 화답했다.

 

1946<서울대> 회화과 교수에 취임한 뒤 김용준은 명일의 조선미술(1946), 민족문화문제(1947), 광채 나는 전통(1947)과 같은 문화예술론을 발표했다. 19486월에는 명저 근원수필이 출간됐다. 1948<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을유문화사)를 출간하고 고미술 계몽의 의의, 국전의 인상, 신사실파의 미등을 발표하여 전통미술과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국전이라는 새로운 전시체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드러냈다. 김용준이 조선미술대요를 저술한 것은 단순히 한국미술사교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미에 대한 자신의 미학을 집약적으로 표출한 것이었다. 김용준이 시대별로 미술의 특징을 기술했는데 그 안목과 수사의 풍부함에 감탄하게 된다. 시대별로 특징 서술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북방적인 웅혼함, 씩씩하고 규모가 크나 그 반면으로 거친 미

신라: ‘웅혼하기보다 장엄하고, 씩씩하기보다 건강하며, 규모가 크기보다 잘 정리 조화를 시키며, 거칠기보다 부드러움’, ‘돌을 만지기를 떡 주무르듯 하고, 돌을 사랑하기를 우리가 화초 기르듯 한 것 같다.’

백제: 따뜻하고 침착한 성격의 백제 사람들이 그 세련되고 정교하고 아윤(雅潤)한 솜씨로 말미암은 온아 유려한 미술

고려: ‘경쾌하면서도 도타운 맛, 화려하면서도 청초한 맛, 작은 규모이면서도 아담한 맛, 멀리 놓고서 바라다보고 싶기보다 손에 들고 어루만져 보고 싶은 맛로컬 컬러(향토색)’로 규정

가냘픈 곡선, 불안정한 형태, 은은한 색조 표현’- ‘비극의 미 발견

조선: 건실한 평민의 미, 순진하고 어수룩한 소박한 미 -“얕고 고운 표면의 미가 아니요, 숨은 선비(隱士)를 대하는 듯한 깊이 있는 미

 

김용준은 초기는 미술단체, 중기는 교육기관, 말기는 학술단체에 몸담는 변화의 역정에도 불구하고 김용준의 해방 5년은 굴곡 없이 평탄해 보였다. 이 기간 동안 김용준은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 가담한 적도, 사회주의 경향의 견해를 밝힌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준은 1950625일 전쟁발발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통치체제에 적극 합류하였고, 928일 인민군 후퇴 직전 가족과 함께 월북(越北)하였다. 왜 월북하였던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지금껏 풀리지 않았고 또 원인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바도 없다.

 

김용준은 월북 이후 1951조선미술가동맹조선화 분과 위원장과 조선건축가동맹중앙위원에 위촉됐다. 월북 이후의 김용준은 사회주의 선전미술 창작에 참여했는데. 동양화가가 아니라 전향 이전의 서양화가로 돌아가 여러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는 당시 소련식 사회주의, 사실주의 회화를 추구했던 북한 미술계의 경향을 따른 김용준의 선택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유화 작업을 하면서 과학원의 미술사 연구사로 연구와 저술 활동을 병행하며 미술사학자이자 미술비평가로서 활약했음도 아울러 짐작할 수 있다. 1953년 김용준은 새로운 만남을 갖게 된다. 남북휴전협정이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고려인 화가 변월룡(뻰 봐를렌, 1916~1990 연해주)이 소련으로부터 파견되어 온 것. 변월룡은 13개월가량 북한에 머무르며, <평양미술대학> 학장을 맡고, 교수진을 교육하는 등 북한미술계를 리빌딩 했다. 이 시기 변월룡은 김용준을 비롯해 배운성, 벽초 홍명희 등 북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들과 교유했다. 이처럼 변월룡에 의해 북한미술계엔 러시아 리얼리즘 미술의 토대가 새롭게 이식되고 있었다.

 

변월룡은 러시아 연해주 출생으로 러시아 최고 명문대학인 <레핀미술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51년에는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레핀미술대학> 정교수에 오른 인물이다. 부드러운 인상과 조용조용한 말투, 몸에 밴 예의와 겸손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지만, 그런 인상과는 반대로, 필력에는 힘이 넘쳤으며 묘사는 빠르고 정확했다. 그런 변월룡이었지만, 19549월에 건강악화로 소련으로 돌아간 뒤, 1956년 북·소 관계가 냉각되고, 북한 내 ‘8월 종파사건으로 소련계가 숙청되면서 귀국은 막히게 된다. 한편으론 급성 이질로 사경을 헤맬 무렵 북한 당국이 귀화 요청을 했지만 러시아인 부인이 만류하면서 거절한 게 괘씸죄로 걸렸다고도 하며, 북한 미술계가 주체 미술로 급선회하면서 그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김용준은 실제로 조선 묵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변월룡에게 채색 중심의 조선화가 주체 미술로 재편되고 있는 점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편지를 통해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조선 묵화의 현상에 대하여 혼자서 애태우고 있습니다. 똑바로 말하여 묵화의 경지와 그 올바른 방향으로 이해를 가진 사람은 조선에는 거의 없습니다. 나는 우리 연구소와 미술동맹과의 주최로 325일 단원 김홍도를 소개하는 보고회를 가져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 때에 선생이 계셨더라면 더 큰 성과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편지는 어려운 처지를 호소하는 내용으로 계속 이어져 나갔다.

 

들으니 선생은 그간 묵화 공부도 열심히 하셨다는데 나는 선생의 묵화를 몹시 보고 싶습니다. 나도 틈만 있으면 묵화를 그려보려고 가진 노력을 다하나 연구 사업으로 틈도 별로 없지만 종이와 먹과 채색들도 구할 길이 없고 또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 속만 상하고 있습니다. 아마 금년 8.15전람회에는 출품 못할 것 같습니다....”

 

김용준은 1953<평양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55년까지 물질문화사 연구사로 과학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1958년에는 안악3호분발굴에 참여하고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를 발표했으며, 이 논문은 북한 과학원 예술사연구총서1집에 실렸다.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 따르면, 김용준은 한국전쟁 시기에 여러 점의 선전 유화와 수채화를 남겼다고 한다. 도판에 실린 작품으로는 1952(49)조국해방전쟁미술전람회에 출품했던 헝가리병원이라는 작품이 전한다. 이 작품은 1953년 헝가리 정부의 초청을 받아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되었던 북한 미술 전시 조선의 자유를 위하여에 출품되기도 했다. 50년대 후반부터는 자신의 지론인 묵화를 통한 조선화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57년 작 승무였다. 조선화의 양식적 특징을 구현해낸 이 작품은 195710,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화가로서의 위상을 드높여준 계기로 작동했다. 수상 이후 해외 순회전시에 조선화의 대표 격으로 출전되었던 이 그림은 극히 시적인 형상이 마음을 끄는 민족적 형식의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1959년 동독·헝가리·북경 순회전시 조선조형예술전람회에도 전시되었다. 그리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기증된 작품 외에도 또 한 점이 모사되어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603월에 모사했다는 제발이 쓰인 또 다른 작품도 전한다. 이는 북한에서는 모사의 개념이 창작의 범주로 수용되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60년대 들어 조선화논쟁이 수묵이 아닌 채색으로 기울어지자 김용준은 변월룡에게 보낸 편지에서처럼 실망감과 더불어 위기감을 토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방향 전환의 조짐은 이여성이 조선미술사개요(평양국립출판사, 1955)를 통해 수묵화의 사의성을 봉건잔재로 비판하면서 촉발됐다. 김용준은 즉각 반발하면서 그런 식으로 조선화를 몰고 가는 것은 전통회화의 독특한 미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김용준은 "조선화의 특색은 필묵이 근간이다. 만일 필묵의 표현을 채색으로 대행한다면 벌써 모필 조선화는 성립하지 못하고 그 의의는 상실하고 말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신념을 일갈했다. 그러나 김일성 교시에 의해 추진되던 이른바 조선화논쟁 때 대세를 거스리지 못하고 결국엔 숙청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1962<평양미술대학> 예술학 부교수로 복직해 조선화의 채색법을 발표하고 조선미술사단원 김홍도를 출간하는 등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을 지속해 나갔다.고 알려져 있기는 하다. 1963년에 있은 조선화분과 토론회에서 제기된 수묵화 배격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문인화가들의 주관주의적 취미에서 형성된 수묵화적 영향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천리마의 약동하는 시대를 반영할 수 없으며 조선 바탕도 실현되지 않는다. 채색화가 강조되는 것은 묘사의 진실성에 대한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진실하고 건전한 사실적 묘사에 안받침되지 않고서는 새시대의 내용도 박력 있게 반영할 수 없다." 김용준이 수묵화에서 사의(寫意)란 관념이 아니라 내면적 리얼리티의 동양적 표현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 깊은 뜻이 이해되기는커녕 봉건적 발상으로 몰리고 만 것이다.

 

김용준은 196764세의 나이에 <평양미술대학> 부교수의 신분으로 운명을 달리 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이 쓴 등나무 집에 따르면, 근원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일성에 대한 불경죄에 걸려 고민하다 자살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주1) 김용준, 근원수필범우사, 1997, 黔驢之技p22

주2) 문장지: 19392월에 창간되어 19414월에 폐간된 문학잡지. 조지훈()과 이태준(소설)이 추천위원으로 신인 발굴에 힘썼고, 이희승, 이병기, 최현배 등 국어학자들이 논문을 발표함.

주3) 홍준(명지대 교수), 천재 예술가의 삶 ´근원 김용준 전집´동아일보, 2002.11.15

주4) 오윤형(이천시립월전미술관),근원 김용준의문장(文章)표지화, 한국예술연구 제18(2017.12) 초록

주5) 최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열화당, 2015, p168

주6) 「동맹휴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7) 신수경(명지대), 월북화가들의 일제강점기 작품활동, p287 )15, 재인용 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증보판)평양,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주8) 오광수, 우리 미술 100현암사, 2001, p125

주9) 최열, ‘김용준을 다시 본다교수신문 2005.3

주10) 권행가, 한국 근현대 서양화 및 시각문화 연구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242012 하반기, p37

주11) 박영택, 한국근대미술-전통과 문명의 갈림길에서, DOOSAN ART SCHOOL, 2015.3.11 ‘심영섭은 서양의 생활원리를 동양의 생활원리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 고갱과 같이 서양의 예술가가 서양을 버리고 원시미를 찾아 떠나는 모습을, 서양미술이 상징적인 동양미술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동양에 그 해답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주12) 박계리(이화여대박물관 연구원), 김용준의 프로미술론과 전위미술론 -카프, 동미회, 백만양화회를 중심으로, 남북문화예술연구2010. 7pp211~247

주13) 박민영(대구미술관 교육팀장), [매일춘추] 1930년대 향토색론과 향토회2020.4.14

주14) 명지은,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석사논문 2016.2, 근원 김용준의 회화론 연구초록

주15) 전상모, 근원 김용준이 본 서예, 그 직관의 미, 동양예술44(2019.8), 한국동양예술학회, 초록

주16) 이인숙, 근원 김용준(1904-1967)의 기명절지화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850(2019.11) pp. 493~525

주17) 김병종, ‘김용준과 서울 성북동’, 화첩기행, 조선일보, 1998.11.2.

주18) 유홍준(명지대 교수), 천재 예술가의 삶 ´근원 김용준 전집´동아일보, 2002.11.15

주19) 최열, 김용준의 해방공간 행장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p45, 출처 : s-space.snu.ac.kr

주20) 김미정(명지대 박사과정),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의 월북 이후 활동과 회화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392020 상반기 p10

주21) 이흥재(전북도립미술관장),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을 아시나요?전북도민일보, 2013.8.12

주22) 이주현(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변월룡과 한국미술의 경계 넘기, 중앙선데이 2019.5.4

주23) 김미리 기자, 에선 외면 받고, 에선 모르는잊힌 巨匠을 만나다조선일보, 2016.3.3

주24) 김미정(명지대 박사과정),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의 월북 이후 활동과 회화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392020 상반기 p12, )재인용, 김용준의 편지(1955. 5. 5); 문영대·김경희, 러시아 한인 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문화가족, 2004), p. 74에서 재인용.

주25) 유홍준(영남대 교수), [북한문화유산답사기]23.조선화의 제한된 성공중앙일보, 1999.1.23

주26) 유홍준(명지대 교수),천재 예술가의 삶 ´근원 김용준 전집´동아일보, 2002.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