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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화단의 시발점, 손일봉(1907~1985 경주)

즈음 2021. 6. 11. 10:07

경북화단의 시발점, 손일봉(1907~1985 경주)

 

 

손일봉은 경주 월성 태생으로, 지방 출신으로는 드물게 1928<경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재학시절인 ‘25~‘28년 사이 선전(鮮展)에 입선 1, 특선 3회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거두며 미술분야에서도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1928년 졸업 후 <경성사범> 부설 보통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자칫 초등교원으로 머물 뻔 했던 손일봉의 재능을 아까워했던 일본인 교장의 추천으로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1931년 일본여성 미키코(石川幹子)와 결혼을 했으며, 1934년에 동경 <우에노미술학교(上野美術學校)>(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중이던 ‘28~‘31년 사이 일본 제전(帝展)에서도 4회나 입선했다. 졸업하던 해 서울 대택상회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손일봉은 동경으로 돌아갔고, 귀국 대신 북해도(北海道)로 가 교단을 선택했다. 북해도로 갔던 것은 동생이 자신을 찾아 일본에 오던 도중 강제징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다행이 지역 유지였던 장인의 도움으로 동생을 찾아 고국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해도 여학교 시절에는 제자 12명이 주말마다 집으로 찾아와 사숙했을 정도로 교육자로서의 품이 넓었다. (이상 둘째딸 손도자 증언) 손일봉은 19461월에 귀국하여 <경주중학교> 부설 사범학교에 적을 두었고, <경주예술학원>이 개설되자 초대 교장을 맡아 해방기 조선의 첫 고등미술교육에 대한 포부를 부풀렸다.

 

손일봉은 1922<경성사범>에 입학한 이후 줄곧 경주를 떠나 있었기에, 대구화단이 수채화의 발생지로의 명성을 쌓을 동안 대구·경북지역과 활발하게 소통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1928년 대구 자토회 3회전에 특별출품을 했는가 하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던 해인 19299월에는 조선박람회-신라전전람회장 장식화를 맡아 7년 만에 화려한 귀향을 한 적도 있다. 박람회 기간 중에 들려온 제10제국미전입선(세 번째)이라는 낭보는 다시 한 번 경주를 들썩이게 만들기도 했다. ‘조선미전경력만 해도 <경성사범> 3학년 때인 1924년 제3조선미전 입선은 대구·경북을 통틀어 가장 앞선 기록이었다. 이는 대구 출신 박명조보다 2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4학년 때엔 풍경으로 4등상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으며, 이 작품은 일본 궁내성에서 구입했던 7점 중 한 점이 됐다. 1942년에는 일본 북해도 최남단 도시 다코다테에 정착해 있으면서도 고향에서 개최되었던 향토미술전’(경주공립보통학교)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복기경주화단 60년의 발자취란 글에서 이 '향토미술전'을 계기로 경주화단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고 보았으며, 최열은 손일봉으로서도 뒷날 귀국하여 경주로 복귀하고자 했던 하나의 기억이었을 것으로 진단했다.

 

손일봉은 50년대 이후 경주, 대구, 영주, 문경 등지에서 중등교장직을 수행하다 1971<의성여자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했다. 혹자는 이 기간을 화업을 중단했던 시기로 보기도 하지만, 비록 중앙화단에서 잊힌 작가가 되었을망정 손일봉 자신은 한시도 붓을 놓은 적이 없었다. <경북대학교> 박남희 교수는 손일봉의 공직생활 기간을 2기로 분류하고 이 시기를 붓을 꺾고 공직생활에만 몰두했던 예술적 공백기가 아님을 강조했다. 특히 50년대 초중반 영주시기 5년은 교육자로서의 업적 외에도 작가로서의 손일봉을 연결 짓는데 무리가 없다. 1952<영주여중> 초대교장으로 부임하여 영주에 여성교육을 뿌리내리게 하였음은 물론, 19563월에는 <영주중앙초등학교> 강당에서 자신의 두번째 개인전까지 개최했던 것이다. 이 전시회는 손일봉의 해방 이후 첫 개인전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중등교장으로 정년 퇴임하던 해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교수로 초빙되면서부터 손일봉은 작가로서의 본성을 단숨에 회복해 나갔다. 당시 손일봉을 천거했던 교수 김창락<계성학교> 시절 서진달의 제자였지만, 스승에 앞서 근무했던 손일봉에 대한 존경심이 컸다. 김창락은 손일봉에 대해 정적인 아카데미즘과 왜곡된 인상주의가 서양화 수용기 우리의 화단을 누비고 있을 때 손일봉은 그러한 시류를 뛰어넘어 세잔의 새로운 조형방법을 연구했던 작가로서 높이 평가했었다. 평론가 이경성은 그의 회화작품의 특징은 인물이나 정물, 풍경 등 구체적인 대상물을 선택하여 그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묘사의 범위를 최대한 축약시켜 빠르고 큰 붓으로 작업하는 데에 있다.”라고 손일봉 작품의 특징을 간결하게 짚어냈다. 손일봉으로선 해방정국에서 선전(鮮展)’제전(帝展)’ 등에서의 성과들이 친일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국내화단에서 소외되는 상황에 오히려 직면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봉에 대한 중앙평단의 시각은 여전히 냉랭해 보인다. ’조선미전을 통해 각광 받던 신예였으나, 새로운 사조를 외면한 채 인상주의나 사실주의에 매몰된 친일 성향의 작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동시대의 화가 오지호(吳之湖, 1906~1982)와 비교를 해봐도 폄하된 작가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제자 이수창은 영남의 손일봉, 호남의 오지호라는 말을 남겼지만, 한국미술사 속에서의 손일봉의 위상은 현재까지도 보류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윤범모는 조선미전참가여부 사실만 가지고 항일 혹은 친일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최열은 총독부가 국가 규모의 공모전을 만든 것은 식민지 화단의 상징이요 식민지 미술활동의 현실이었다며, 그 기구에 참가 또는 불참 여부가 곧장 민족 또는 친일 미술활동을 가르는 잣대가 아니며, 잣대의 알맹이는 어떻게 참가했으며 어떻게 참가하지 않았는가에 있다고 하였다. 특히 황국신민의 일원으로 반도총후에서 성전에 회화봉공했던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 등은 해방 직후 결성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친일활동작가라고 하여 제외되었으나 후에 화단의 지도급인사로 부상되어 커다란 영예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손일봉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일본땅에서 교직자로 안주했다는 이유만으로 회화봉공했던 화가들 이상으로 혹독한 외면을 받은 것이다. 그만큼 역량과 비중이 컸던 작가였기에 그에 대한 배신감이 더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심증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손일봉은 19462월 고국에 도착한 후 고향 경주에서 교육자의 길을 다시금 잇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일본 땅에 있었기 때문에 일제 말기 친일부역자로 이름을 올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역설적인 생각 또한 보태게 된다. 손일봉의 작품 속엔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고 협력했던 특정 주제와 내용이 담긴 그림을 찾아볼 수가 없다. 비록 귀국이 늦어져 중앙화단으로부터 국전 참여나 교수직 등 기득권 대우는 외면되었다손 치더라도 손일봉은 창작활동 그 자체에 무게를 두고 스스로 정진했다. <경북대학교> 박남희 교수는 손일봉의 공직생활 기간을 2기로 분류하며, 이 시기를 붓을 꺾고 공직생활에만 몰두했던 예술적 공백기가 아님을 강조했다. <영주여고> 교장시절인 1956, <영주중부국민학교> 강당에서 생애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 일은 문화 사각지대였던 영주지방 최초의 고차원적인 문화전파 이벤트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가가호호 방문하여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설득하며 자녀를 입학시키도록 해 지방여성교육의 토대를 세웠던 일화는 손일봉의 상록수정신을 읽게 한다.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 시절 <오타니고등여학교> 미술부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언제든지 찾아와 그림을 그리게 했던 일화의 연장선이 된 것이다. 이처럼 손일봉의 예인적 자질 속엔 인류애적 보편성과 교육자적인 본성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의 우리나라 현실에 비추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할 것이다.

 

손일봉은 정년퇴임한 뒤 서울로 올라간 1974, 뒤늦게 국전 초대작가가 되었으며, 1975년에는 신미술회 창립에 참여하는 등 뒤늦게 예술가로서 만개했다. 손일봉은 화우나 후배들에게 北海道 이후 30년 헛되었던 세월을 어찌 되찾겠느냐고 마음 속 회환을 자주 토로했다고 한다. 이는 예술가로의 자기회복에 대한 의지와 다짐이 얼마나 절실했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손일봉은 4년간의 서울 생활을 마치고 대구로 낙향하여 1979한유회를 창립하고 후배들에게 한국적 유화의 기치를 내세웠다. “국적 없는 걸작보다, 한국적인 유화를 지향한다.” 이 말은 한유회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그 자신 세계를 연구하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던 거장의 모습을 온전히 전수했던 것이다. 손일봉을 회장으로 모셨던 후학들은 손일봉의 영문 이니셜을 따 아이쏜영감님이라 부르며 스승처럼 따랐다. 회식을 할 적에도 스승은 따로 자리를 만들어 소고기를 대접하고, 자신들은 삼겹살을 먹었다고 한다. 손일봉은 19851129, 이목화랑에서 개최됐던 신지식 판화 개인전개막식에 참석했다가 졸도,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타계했다. 장례식은 <남도초등학교>에서 미협장으로 엄수됐다. 이처럼 작고하기 전까지의 15년이 손일봉을 한국화단의 거목으로 각인시킨 후반기 삶이라 하겠다.

 

김영동은 손일봉에 대해 아카데믹한 자연주의를 넘어서려는 끈기 있는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풍경과 정물, 인물이라는 몇 가지 한정된 소재 안에서 과감한 변혁을 꾀하지 못한 채 기존의 주제나 방법적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줄 때가 많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초현실적이며 몽환적인 시정을 담으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풍경화에서 평면화를 시도하거나 유화에서 거칠고 빠른 필치의 표현주의 방법을 연구했던 작가로서 결코 사실주의적인 양식만을 고수하지는 않았다고 옹호했다. 이렇듯 관학풍 또는 일본풍이라는 멍애를 뒤집어쓴 채 손일봉은 지방에서 오랜 세월 떠돌았던 것인데, 최열은 유화도입기 동안 손일봉이 차지할 위상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조선인상파 계열의 중심부임을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첫째, 손일봉은 조선미술전람회제국미술전람회와 같은 관학파의 온상을 무대로 활동하여 뚜렷한 결실을 거두었다.

둘째, 손일봉은 특별한 계보 없이 관학파 무대에 진출하여 유화도입기를 풍부하게 만들어나간 조선스런 인상파 화풍의 개척자였다.

셋째, 손일봉은 유화도입기인 1920년대부터 1940년대 사이의 작품인 부인상, ‘소녀와 같은 조선스런 인상파 화풍의 걸작을 남기고 있다.

 

소녀그림에 대해 김영동은 어린 소녀가 상체를 굽히고 다리를 꼰 채 바닥에 손을 짚고 앉아 한 손으로 책장을 넘겨보고 있다. 배경의 짙은 음영과 대조되는 밝은 노란색에 의해 전면으로 크게 부각된 인물의 윤곽이나 상의의 주름을 보면 바로 수묵화에서 사용된 필획처럼 절약적인 붓질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마치 일필휘지로 붓을 사용하듯 했는데 특히 모델의 오른팔은 어깨에서부터 책을 잡고 있는 손까지 길게 한 선으로 내리긋고 있어 더욱 서체적인 느낌이 강하다.”라고 묘사했다. 유화 소품이지만, 언뜻 불투명수채화를 보는 듯도 하다. 찐득하고 기름기가 적은 분포도(일본물감)만 고집했다, 제자들에게 수묵화 하듯이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는 점 등에서 손일봉 유채화의 특징적 일면을 짚어보게도 된다. ‘부인상은 신혼의 아내를 아카데믹한 기법으로 그렸는데, 순종적이며 이지적인 표정묘사가 뛰어난 초기작으로 평가된다. 당시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에 그렸으므로 수업에 충실했던 일면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조은정은 화면에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서 인상파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전체적인 조화보다는 보고 느낀 점이 강조된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화단의 중심부에 화려하게 입성한 뒤 손일봉은 세잔을 본받을려고 애썼음을 밝히면서도, 구상과 추상의 중간지점으로 상정한 모딜리아니까지 가보고 싶은 목표가 있었음도 내비쳤다. 실제로 손일봉의 화풍은 사실적 재현에 머물지 않고 정서의 표현에 더 힘썼으며, 사물과의 합일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경주예술학교> 시절 제자들에게 가르친 주 내용 또한 조형양식과 관련된 기본원리를 엄격하게 훈련시키는 것으로, 단순히 재현의 기술, 응용력에만 주안점을 두지 않고 자연을 대하는 예술가의 진지한 자세와 심미적 통찰력을 키우는데 역점을 두었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이나 트렌드에 대해 초연한 듯 보였던 손일봉이었지만 속으로는 시대를 응시하며 자신의 작업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하고 있었음도 엿볼 수 있다. 1984, 부산 공간화랑에서 개최한 손일봉 수작 유화전시대는 바야흐로 방법론 전성기인데 내 작업은 주변에서 느끼는 미를 솔직하게 표현하는데 있는지라 새로운 감각에는 맞지 않을 것입니다만...”이라고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개진했던 대목에서 오히려 거장의 솔직한 면모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만년의 손일봉은 거의 유화에만 천착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수채화라는 매체를 결코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의 화가적 생애를 통틀어보아도 유화와 수채화의 비중은 거의 등가의 가치임을 알게 된다. 화가의 시작점인 조선미전연특선의 작품들 모두 수채화였음은 물론이고, 해방이후 한국수채화화단의 초창기 단체마다 그 이름을 올려놓았다. 심지어 스승의 수채화에 감화를 받은 박기태, 이수창, 김인수는 평생 수채화가라는 자부심을 버리지 않았을 정도로 손일봉의 수채화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경북수채화의 맥이라는 명제 역시 손일봉-이수창-조광래로 이어지는 화풍 속에서 그 계보를 드러내고자 했다. 손일봉은 조선이 인상파 미술을 수용하는 초기에 활동한 작가로 1928년 수업기에는 수채화를, 1929년 이후 유학기부터는 유채화를 구사하였고 어느 쪽이건 공모전을 통해 미술계에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논고에서는 전술했던, 일본체류에 관한 에피소드에 대해 좀 더 부연해 보기로 한다. 손일봉은 동경 <우에노미술학교(上野美術學校)>를 졸업한 뒤 1931년 미키코(幹子) 여사와 결혼하여 북해도(北海道)에서 8년간 교편을 잡았다고 되어있다. 왜 손일봉은 해방을 맞아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북해도에 눌러앉은 것일까? 귀국이 늦은 것에 대해 이구열(1932~2020 연백)당시로서는 대단한 기록이던 제전 연 입선의 비범한 신예작가로 주목을 받는 가운데 1934년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였던 손일봉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변방인 북해도로 가서 미술교사 생활로 안주하며 일본에 계속 머무르게 됨으로써 작가적인 자기도약의 정체는 물론, 서울의 민족미술계와의 유대도 필연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책으로 귀결되게 하였다.”고 했다.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교수 김창락(1924~1989 성주) 역시 귀국 후 한 때는 지난날의 선전과 제전 등에서의 활약으로 인하여 친일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화단에서 다소 소외된 입장에서 지나게 되었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김창락은 후에 손일봉이 중등학교를 정년퇴임하자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세종대학교>에 초빙교수로 추천했다. 대구 <계성학교>시절 스승이었던 서진달(1908~1947 대구)의 전임으로 직접 배우지는 못했지만 늘 존경하던 작가였기 때문이었다고 했다.(김영동)

 

손일봉이 북해도로 간 이유에 대해 홋카이도립 하코다테미술관 학예과장 이우치 카쓰에는 손일봉의 차녀 손도자의 말을 빌어 이렇게 증언했다. “....순조롭게 도쿄에서 화가로서의 지위를 구축해나갔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하코다테의 여학교로 취직하게 된 것은 남동생 분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큰 형인 손일봉 화백을 찾아 도쿄에 도착했던 동생이 손일봉 화백과 만나기 전에 징용되어 버렸고, 아무래도 홋카이도 유바리 지역 탄광에 있는 것 같아 동생을 찾기 위하여 홋카이도에 취직했다고 합니다......손일봉 화백의 노력으로 동생은 징용에서 해방돼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손일봉 화백은 그대로 하코다테의 <오타니고등여학교>에서 계속 교편을 잡았습니다.” 손일봉은 1937년 봄 하코다테의 불교계 사학인 <오타니(大谷)고등여학교>에 취임하여 1943년 가을까지 근무했다. 이후 함께 근무했던 와타나베 코유의 주선으로 공립학교인 <하코다테공업학교>에 정시제교사로 채용되어 더욱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었다. 1년 정도 근무했을 즈음, 해방(일본 패망)이 되었고 일본 국적이 아닌 자는 공립학교 교원자격이 부적합하다는 부령에 따라 실직을 하게 되었다. 어렵게 버티던 손일봉은 1946131일 식구들(아내와 자녀 3)과 함께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아내 미키코는 한국행에 대해 몹시 불안하고, 이 상황을 원망스러워했음을 와타나베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손일봉은 비록 조선인이었지만 <동경미술학교> 출신이라는 긍지를 갖고 당시 쉽게 채용될 수 없었던 중등학교 교원으로서 대접받으며, 또한 존경받는 화가로 살아왔었다. 귀화를 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귀국을 위해 준비하던 당시의 상황을 와타나베는 이렇게 묘사했다.

 

가재도구를 실은 무거운 짐이 5개 있었습니다. 너무 무거워 제가 선생님께 2~3개는 포기하고 출발하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한 개는 등에 묶어서 짊어지고 1개는 그 위에 올리고, 양손으로 1개씩 들고 1개는 입에 물어서 배와 열차를 탈 것이니 괜찮다고 답하셨습니다.”

 

2014,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기획한 영남의 구상미술은 손일봉이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현장을 기록했던 그림 다수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성과를 거뒀다. 전시를 기획했던 학예사 박경숙이번 전시의 백미는 유일하게 지역출신 종군화가로 활동하였던 손일봉의 1951년 포항 형산강 전투를 기록한 작품과 병사들의 드로잉 시리즈’”라고 하면서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굴곡진 역사를 그대로 반영한 작품으로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전쟁기록화이며 이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우리 근대미술사에서 자료의 공백 상태로 남겨진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형산강 전투’(1951. 33.5x50cm, 재생지 위에 수채)는 속필로 그린 수채화지만, 포탄이 떨어지는 물기둥 사이로 상륙작전을 펼치는 국군의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펜과 연필, 담채로 그린 병사 시리즈’ 4점 역시 그림을 그리는 모습과 수류탄을 던지는 자세, 총을 맨 병사 등 다양한 상황을 정확한 데생력을 바탕으로 그린 소묘들이다. 당시, 많은 화가들이 종군화가단에 참여했던 것은 생활고를 해결할 방편 외에도 신분에 대한 안심효과도 작용했다.

손일봉의 경우 <경주예술학교> 시절 좌익학생들에 의해 친일인사로 몰려 교장 직에서 쫒겨 났던 전력이 있다. (이애선은 재단의 경영난으로 인한 급료문제로 보기도 한다.) 이렇듯 사상문제만큼 민감하게 대처할 일은 달리 없었을 것이다. 전쟁 와중에는 더더욱 반공이라는 사상적 해명이 적극적이어야 했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3월에는 영남 구상미술의 시원과 태동이라는 주제의 학술세미나가 동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주)

1. 계간미술‘86년 여름호

2. ‘손일봉 탄생 110주년 기념전 어느 천재 화가의 꿈”’ 도록(2016)

3. ‘손일봉의 초기 활동과 미술사상 위치최열 p251 손일봉 탄생 110주년 기념전 어느 천재 화가의 꿈()경주문화재단/2016

4. ‘손일봉화백유작전’(1990.3.19.~25 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 ‘생애와 작품세계’-박남희(경북대학교 교수)

5. 현대미술가인명사전-한국미술가편-/ 이경성(李慶成)(열화당, 1977)

6. ‘한국 근대미술사연구를 위한 몇 가지 노트윤범모, p12 미술사학1994.8.5.-19

7.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최열/ 열화당 2015 ‘연구의 발자취와 방법’ p16

8. ‘손일봉과 홋카이도이우치 카쓰에(홋가이도립 하코다테미술관 학예과장) p150 1946, 경주예술학교()경주문화재단 2018

9. 김영동, 영남지역에서 손일봉의 활동과 영향력, p36 손일봉학술세미나집, p56, 2016.8.20. 경주예술의전당 소공연장

10. 최열, 손일봉의 초기활동과 미술사상 위치, 손일봉학술세미나집, p56, 2016.8.20. 경주예술의전당 소공연장

11. 김영동, 한 붓에 그린듯한, 책읽는 어린 소녀, p72, 근대의 아뜰리에도서출판 한태재, 2011

12. 허용, ‘손일봉 탄생 110주년 기념전 대담회’ 2016.4.20.(15:00), 손일봉-어느 천재 화가의 꿈

13. 정동철, ‘손일봉 탄생 110주년 기념전 대담회’ 2016.4.20.(15:00), 손일봉-어느 천재 화가의 꿈

14. 조은정, 손일봉의 작품세계, P218, 손일봉-어느 천재 화가의 꿈도록 2016

15. 김영동, 영남지역에서 손일봉의 활동과 영향력, p36 손일봉학술세미나집, p56, 2016.8.20. 경주예술의전당 소공연장

16. 조선화랑 청담전시장 개관기념 손일봉유작전’(1991.5.17.~28) ‘만년기에 확연히 재구축된 손일봉 예술’-이구열(미술평론가)

17. 김창락(세종대 교수), 「손일봉 화백 유작전에 부쳐, 신세계미술관 기획 손일봉화백유작전’(1987.6.16.~25)

18. 이우치 카스에, 「손일봉과 홋카이도p147~148 1946, 경주예술학교()경주문화재단 2018

19. 와타나베 코유, 손일봉 선생님과 그 그림, p185 1946, 경주예술학교()경주문화재단 2018

20. ‘영남의 구상미술’(2014.1.16.~3.23 포항시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