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북부지역 구상미술의 선구자 류윤형(1946~2014)
2020년 12월, 류윤형 회고전 ‘시간 속을 흐르는 자연의 빛’전이 안동문화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됐다. 문득, 영주시민신문에 연재했던 ‘영주미술기행’ 류윤형 편이 떠올랐다. 이 글은 다시, 2016년에 출판한 ‘기억과 흔적, 송재진의 영주 · 경북미술 순례기’에 실렸지만 너무 간략한 스케치여서 이번 기회에 명암도 뚜렷이 하고 색도 입혀보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글쓴이의 기억과 경험치를 최대한 발휘하여 고인의 생전 모습을 기려보고자 한 것이다. 새로 썼다고는 하나 그 바탕엔 예전 글을 분산시켜 재배치했으며, 다만 개작 수준의 살붙임을 했다는 것만으로 다소간 위안으로 삼는다.
류윤형은 생전 글쓴이에게 <영광고> 동문전을 추진해보라는 당부를 여러 차례 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때는 글쓴이의 입장이 당장 그 일을 선도해나갈 상황이 못됐다. 동문들은 많았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스케줄에 벅차했던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듯 류윤형은 안동의 대표적 구상화가로 자리매김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술적 토대가 영주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듯했다. 류윤형은 안동 태생으로 어릴 때 영주로 이사를 와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영광중학교> 시절, <영주중학교>에 다니던 이두식과 동년배로서 친분을 쌓았고, <영광고>에 진학해서는 동창생이자 만화가 지망생 김판국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자신을 이끌어주었던 스승으로는 당시 <영주여고> 미술교사였던 박기태와 고3때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자마자 부임해 왔던 고영수를 꼽을 수 있다. 1965년 제1기 생으로 <안동교육대학>에 입학해서는 이수창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1984년 ‘한유회’에 입회해서는 손일봉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류윤형은 1967년 <안동교대>를 졸업한 뒤 초등학교 교사로 첫 출발을 했지만, 1973년 중등검정고시를 통해 중등교원으로 업그래이드 되면서 본격적인 화업의 길을 병행하게 되었다. 1989년 마흔다섯 살의 나이에 류윤형은 또 한 번의 업그래이드를 시도했다. <안동여고>에서 교직 20년을 채우던 해 연금퇴직을 결행함으로써 자신이 염원했던 노선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그 후반기 삶을 안동이라는 소도시를 기반으로 전업작가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게 행운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화가로서의 집념은 집요했다. 류윤형이 추구했던 회화적 이상은 서정적 자연주의였으며, 기법적으로는 인상주의적 사실화를 추구했다. 2000년 대 초, 글쓴이의 지인 중 한 분이 안동시민회관에서 개최되었던 개인전 때 그림 세 점을 산 적이 있었다. 그 날, 차를 구입하기 위해 친구들과 대리점으로 향하던 중, 전시회가 열리는 것을 보고 그림 구경부터 하고 가자며 발길을 틀었다고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림들이 눈길을 끌었고 그 중 모란 그림은 지금 구입하지 않으면 영영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차는 나중에 사도 될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이처럼 류윤형의 그림들은 시니어 애호가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감동과 감염성 높은 화풍을 구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향수를 자극하고 정서에 호소하는 사실풍의 그림들이 지역민들의 호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화풍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류윤형이었다. 지역 구상화단의 맏형으로서 1979년 <안동교대> 출신들이 주축이 된 ‘토전’을 창립한 이래, 본격적으로 유화 쟝르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구축해 나갔다. 교대사단의 좌장이었던 류윤형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후배들을 독려했으며, 영주의 유화동호회인 '나령회' 출신들은 '토전' 진입을 목표로 삼을 정도로 그 위상은 높아만 갔다. '토전'이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북부지역의 구상미술을 대표하는 단체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안동구상’이라는 개념이 발생하게 됐다. 즉 ‘안동구상’이라는 개념은 류윤형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류윤형은 거의 독학으로 자신의 화풍을 일구어나갔는데, 그리기에 대한 어린 시절부터의 자신감과 더불어 화가가 되고자 하는 열정이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수채화로 무장된 스승들 아래에서 유화 예술의 개척자로 소임을 다하던 중 스승의 스승이 되는 손일봉이 주도한 '한유회'(활동 1984~1989 활동)에도 맨 먼저 합류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봉양중·상고> 에 재직하던 1979년 벽두에 대구 매일화랑에서 개최했던 첫 개인전이었다. 수업기(주로 도전과 목우회전 출품) 동안 갈고 닦았던 대작(80호) 2점을 포함하여 정물, 풍경 등 중 · 소품 30점을 출품했다. 스승 이수창은 '대구화단에 류윤형을 소개하면서'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작가적 개성이나 경향을 내세울 수 없는 평범한 작가지만 이러한 소박성이 오히려 류윤형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운을 뗀 뒤, 간혹 情的 片象을 작품상에 엿볼 수도 있으나 오히려 이것은 그의 화단과의 단절된 유폐적 자기세계가 所産하는 것이고 어쩌면 '매력있는 천덕꾸러기(Favoured outcast)'로서의 그의 호감 가는 일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다소 독특한 메시지를 던졌다. 이처럼 류윤형은 첫 전시를 한국 구상화단의 본산인 대구로 직진함으로써 자신의 작가적 의지를 확인받고자 했다. 무명의 독학화가 류윤형은 이처럼 과단성이 있었고, 자신감도 넘쳐흘렀던 것이다. 이렇게 대구화단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류윤형은 이후 안동과 서울 등지에서 24회의 개인전을 개최하며 다작가의 반열에 올라서는 여정에 돌입했다. 이듬해인 1980년부터는 국전에 도전하여 '85년까지 5번의 입선을 득했다. 이렇듯 특유의 자신감과 예술에 대한 강한 욕구는 중앙무대를 노크하게 만들었고, '신작전'(1988~), '한국인물작가전'(1989~), '신미술회'(2003~) 등에 참여하면서 경향을 오가는 광폭 활동을 펼쳐나가게 된다. 1989년에는 롯데 화랑에서 기획한 300호전에 초대되었으며, 1997년 전북미술회관에서 개최된 '현대 구상작가 70인의 200호 초대전' 등을 소화하면서 스케일이 큰 작업에 대한 자신감도 고양해 나갔다.
'90년에는 경상북도미술대전 초대작가를 득했으며, 1997년에는 경북미술협회 지회장에도 도전하게 되었다. 비록 구미의 임대일에게 패하고 말았지만, 당시 경북미술계의 선거문화가 어떠한 의미를 지녔는지를 생각케 해준 계기가 되었다. 지역 간의 연대감, 소속감 등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었는가 하는 점도 새롭게 음미되었다. 간접선거로 실시된 지회장 선거에서 당연히 자신의 계산 속에 들어있던 영주지부의 표가 무산되는 바람에 낙승을 예상했던 일이 틀어지고 말았던 것은 류윤형의 입장에선 황당과 통탄이 교차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영주지부(지부장 김만용)에서는 비록 대의원 3명(5명 중 최영두, 김경준, 송재진)만이 경주로 출발했으나 눈 덮인 5번 국도의 예고개 구간을 극복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도착시간을 맞출 수도 없게 되어 그만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류윤형이 느꼈을 당혹감과 배신감 못지않게, 고개를 넘기 위해 무수히 시도하며 애를 끓였던 영주지부 대의원들의 곤혹스러웠던 입장 또한 매 한가지였던 것이다. 이후 오해는 풀리지 않았고 꽤 오래 앙금으로 남아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일화는 한 때 경북미술계의 고질적 병폐였던 지역 간 편가르기를 예감케 해주는 단초적 사건의 다름이 아니었다. 급기야 남북지역 간 갈등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안동(이병국)과 문경(장진경)에서 지회장을 맡는 내내 그 감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쨌든 류윤형은 안동화단의 거목으로 성장했고, 안동예총 회장 재임 때인 2013년, ‘제30회 신작전 300호 초대전’을 안동으로 유치하고 안동시에 5천만원을 호가하는 작품 3점을 구매토록 하는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류윤형은 ‘잘 그린 그림’보다 ‘기분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작가였다. 그래서 현장에서 작업하는 것을 선호했다. 자연 속에다 화실을 차리면, 밭에서 금방 뜯은 푸성귀와 같은 싱싱한 기분, 좋은 기분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좋은 기분은 혼자보다는 여럿이 함께 할 때가 더 효과적인 법. 류윤형의 화풍을 좇는 후배들과 문하생들은 한사코 그와 동행하기를 즐겨했다. 2007년, 도심을 벗어나 서후면 저전리에다 작업실(화실명 무지랑)을 새로 지은 것도 따지고 보면 현장 작업의 연장선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류윤형이 자신의 세계를 굳게 지켜 나왔던 것은 “유행을 쫒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 가던 길을 꾸준히 가다보면 언젠가 자신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시대가 올 것이며, 자신의 스타일도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다.”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또 “작품에 사인을 하는 순간 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 손을 떠난 작품도 내 것이다.”라는 말에서는 작품에 대한 깊은 자부심을 읽어내게도 된다.
그림 못지않게 애주가였던 류윤형은 담석과 간경화, 당뇨 등 투병과 화업을 오래도록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2013년, '류윤형의 그림 50년 '안동전''을 끝으로 향후 20년을 더 바라봤던 화가의 염원은 그로부터 1년 뒤 안타깝게도 사그라들고 말았다. 울진 화가 홍경표는 류윤형의 장례식장에서 “고인은 그림을 많이 그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가지 구분 밖에 하지 않았던 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세계를 남들이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류윤형 역시 생전 큰 애착을 보였던 ‘송울진전’을 통해 관계의 돈독함과 그림에 대한 희열을 고무했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기도 하다. 소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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