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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미술의 뿌리, 금경연

즈음 2020. 7. 7. 10:41

대구사범학교와 화가 금경연(1915~1948 영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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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전 경북화단의 발아기를 책임졌던 작가들 중 국내파로는 <대구사범학교> 출신들이 단연 손꼽힌다. <대구사범>1920년대까지 일제강점기 하에서의 중등미술교육을 도맡았던 국내 3대 사범학교 중 하나였다. 당시 사범학교나 <경성제1고보>는 모든 이가 선망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교였다. 한국 최고의 근대교육기관이었던 <경성사범>1921년에, <평양사범><대구사범>1929년에 관설되면서 심상과가 설치되었다. <대구사범>(경북대 사범대 전신)은 전국 각지에서 최고의 수재가 모이는 학교로서 면내 소학교 전체에서 1, 2등을 해야만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졸업하면 당시 엘리트 직업인 교사직이 보장되는데다 5년간 학비가 전액 면제되기 때문에 빈곤층이 절대다수였던 조선인들의 입학경쟁이 치열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사범>에서 5년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소학교로 발령받아 훈도(訓導·현재의 교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반에서 40등 안에 들면 매달 관비로 7원씩 나왔다고 한다. 7원이면 대략 쌀 반가마니 값이었는데 그 중 식비로 450, 기타 공용으로 2원을 기숙사에 내야했다. 기숙사의 운영은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했다한다. 19434, <경성사범><경성여자사범>은 예과와 본과를 갖춘 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1944년에는 <대구사범><평양사범>도 전문학교가 되었다. 당시 대구지역은 사범학교, 고등보통학교, 농업학교, 상업학교, 공업학교 등 모든 종류의 중등교육기관이 고르게 설립되어 발전해온 보기 드문 지역이었다. 일찍부터 <대구사범학교><대구고보>(1938년 이후 경북중학교)가 세워졌고, <대구농림학교><대구상업학교> 역시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학교였다. 해방 후엔 남한에 있던 10개 사범학교 가운데 본과 과정이 설립되어 있던 <경성사범>, <경성여자사범>, <대구사범>만이 학교의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학수준으로 승격되었고, 그 목적과 기능도 초등교원양성에서 중등교원양성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구 수채화 화단의 성립에는 서동진이 1927년 설립한 <대구미술사>의 역할이 컸으며, 경북 지역은 <대구사범> 출신들이 그 원류를 형성했다. <대구사범>은 서동진이 설립한 <대구미술사>보다 2년 늦은 1929년에 관설되어, 미래의 유망주들이 한창 공부하며 조선미전을 통해 그 싹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로 금경연(1915~1948 영양), 권진호(1915~1951 영주), 김수명(1919-1983 왜관), 강홍철(1918~2011 경산), 최현태(1925~1994 경주), 박재봉 등이었다. 박재봉은 대구에서 양화 개인전을 처음으로 가졌던 박명조의 사촌으로 <대구사범> 교사 타가야나기 타네이쿠(高柳種行)의 제자로 1936년 제15조선미전부터 연속 5회 입선을 했다. 그러나 만주로 이주했다가 끝내 귀국하지 못한 불운한 화가였다고 한다. 금경연(4), 김수명(6), 최현태 등은 5년제 심상과 출신들이며, 권진호와 강홍철은 5년제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사범> 강습과를 수료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재학 중 조선미전에 입선함으로써 교직과 더불어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이들이었다. 권진호 역시 학창시절 미술부 활동을 했으며, 졸업반 때 조선미전에 입선을 함으로써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최현태는 심상과 졸업 후 교향인 경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해 1948년에 <경주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은 이래 42년간 교직과 화업을 병행해나갔으며, <경주예술학교>를 발족시키는데도 일조했다. 졸업 이후 경북지역을 벗어났던 작가로는 박봉재(1913~1988 예산)가 있으며, 전주 출신의 김용봉(1912~1994) 역시 <대구사범>을 졸업한 뒤 전북미술의 밑거름이 된 인물이다. 부산 출신으로는 김종필이 있으며, 북한 화가로는 한상익(1917~1997 함남 함주)<대구사범> 강습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대구사범>은 전국각지에서 수재들이 모여들던 학교였고, 일본인 교사의 지도하에 미술수업을 받은 학생들이 일선학교 교육자 겸 서양화가로 배출되던 요람이었다. 경북미술(수채화)의 선구자로서 한 맥을 형성했던 <대구사범> 출신들이야말로 경북미술(수채화)의 역사를 1930년대까지 끌어올린 선각자 그룹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금경연과 권진호는 경북북부권에 정주했던 화가들이었지만 둘 다 30대의 나이로 요절하는 비운을 맞으면서, 해방 후 설립된 <경주예술학교> 출신들과의 상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2014, 북수채화협회(회장 송재진) 경북수채화의 뿌리와 맥전을 통해 유작 일부나마 한 자리에 모이게 했던 것이 경북지역에서 최초로 행한 재평가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경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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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경연은 영양 수비면 금촌마을 태생으로, 처음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편입했던 <영양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재능과 영특함이 남달랐던 금경연은 일본인 담임교사인 타치미 쇼오히라(立見昇平)의 추천을 받아 <대구사범>에 진학했다. 진학한 뒤에는 형 두연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2학년 때인 1934년 제13조선미전에서 수채화 양파와 능금으로 첫 입선의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가장 큰 후원자였던 형이 갑자기 사망하자 금경연은 낙담과 곤궁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사정을 안 타치미 쇼오히라(立見昇平)가 도움의 손길을 뻗어 학비 일체와 졸업 때까지 신상보증까지 서주게 되면서 금경연은 학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보통학교 시절 담임교사였던 타치미 쇼오히라(立見昇平)는 사범학교에서의 스승 타가야나기 타네이쿠(高柳種行)와 더불어 금경연에게는 잊지 못할 일본인 스승으로 각인되었다. 타치미 쇼오히라(立見昇平)의 도움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금경연은 이듬해 시가지로 제14조선미전에 다시 입선하게 된다. 금경연은 고마움의 보답으로 이 작품을 스승 타치미 쇼오히라(立見昇平)에게 증정했다. 훗날 교단에 서게 되었을 때는 박봉의 월급을 쪼개 매달 신세를 갚아나갔으며, 스승 사후엔 유족에게 매달 송금을 했다고 한다.

 

교직원 케리커쳐   금경연화백예술기념관 소장

 

금경연은 1938<안동중앙공립보통학교>로 초임 발령을 받은 이래, 경산, 경주, 영양 등지로 임지를 옮겨 다니며 교육자와 화가의 길을 병행해나갔다. 안동에서 근무할 때인 1939, 성소병원 건물을 소재로 그린 유화 붉은 건물이 특선의 영광을 안았다. 비록 흑백사진으로 밖엔 볼 수가 없지만, 강렬한 터치가 돋보이는 수작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권원순은 이러한 화풍은 <대구사범>시절 익혔을 것으로 파악하고, 이 작품을 계기로 야수파적 화풍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평가했다. 여기에 더해 박민영<대구사범>의 일본인 교사들은 일본화단에서 아카데믹한 화풍이 아닌 반관전의 기치를 내걸었던 이과회(二科會)’ 거장들인 야수이 소오타로(安井 太郞 1888~1955), 우메하라 류우자부로(梅原 龍三郞 1888~1986) 등의 작품을 모델로 해서 가르쳤음을 주지하고, 금경연 외에도 김수명, 강홍철 등 사범학교 출신 한국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파악했다. 이를 위해 강홍철과의 인터뷰를 제시했다. “다카야나기 선생님하고 오카다라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두 분 다 조선미전에 입선을 하신 분들로 그분들께 지도를 받았습니다. 일본적인 냄새는 안나고 예술적인 면에서 지도를 했습니다....야수이 소오타로와 우메히라 류우자부로 이 분들이 일본 화단에서 두 거목인데 이 분들의 흐름을 연구해서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자연주의적이면서도 역시 낭만성이 있는 구상회화라고 보겠습니다.”

 

경산 가로수 풍경 44x66cm 유채 1939  대구문화예술회관 소장

 

여름풍경 44x66.5cm 수채 1930년대  대구문화예술회관 소장

 

권원순은 당시 금경연을 서양화에 심취하게 이끌었던 선생으로 타가야나기 타네이쿠(高柳種行)를 꼽았다. 타가야나기 타네이쿠(高柳種行)제국미전추천작가이자 심사위원을 지낸 실력자로 일본 학무당국의 특별요청으로 대구에서 수년간 교직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타가야나기 타네이쿠(高柳種行)는 제11조선미전입선을 시작으로 13회부터 19회까지 매년 입선을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스승이 제자들과 함께 출품을 했던 것이다. 1939년에는 금경연이 스승을 뛰어넘어 특선을 함으로써 <대구사범> 출신 중 유일하게 청출어람의 완수자가 되었다. 타가야나기와 함께 오카다 세이치(岡田淸一) 또한 <동경미술학교> 교수이자 조선미전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다나베 이타루(田邊至)의 제자였다. 다나베는 이들에게 아카데믹한 화풍을 전수했으며, 두 제자 역시 도화시간에 학생들에게 같은 교육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상반된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학교에서는 아카데믹한 방법을 가르치면서도 새로운 사조에 대한 교양을 독려했으리라 생각된다. 30년대의 조선미술계는 인상주의를 넘어서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행해지고 있었고, 학생들도 그러한 사조들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30년대 조선의 상황에 대해 최열은 관변 형식주의와 모더니즘의 가지 갈래들이 안정과 불안을 넘나들며 현란한 운동을 꾀했던 때였다고 정의하기도 했다. 인상주의를 넘어서려고 했던 대부분의 화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사조는 과격한 모더니즘이나 프롤레타리아 미술보다는 폴 세잔느를 포함한 후기인상주의나 야수주의였던 것이다.

 

한편 금경연의 손녀 금영숙은 조부의 화풍에 대해 유럽 표현주의와 겹쳐 보인다고 했다. 그 시대에 흔치 않았던 서구식 건축물인 붉은 벽돌집. 선택된 소재는 신문물에 대한 호의로 보이지만, 거친 터치와 꿈틀거리는 선의 느낌은 응어리진 시대의 울분을 무의식적으로 표출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금영숙은 조부의 터치에 대해 마티스의 야수파의 장식적, 평면적 계열이 아니라 반 고흐의 터치의 맥에서 나온 듯하다면서, “세잔의 화면 구성과 연구를 넘어 선, 전쟁이후의 마음을 누가 얘기하지 않아도 순수와 무의식에 따라 표현되던, 독일 표현주의의 키르히너와 에밀놀데, 다리파, 에리히 헤켈 등의 어느 언저리까지 연상케 한다.”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금경연에게 특선을 안겨준 안동 성소병원 건물의 정확한 명칭은 코넬리우스 병원이다. 미국의 코넬리우스 베이커(Cornelius Baker)라는 사람이 당시 돈 1만 달러를 기부해 지은 것이다. 191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경북도내 최초의 3층 빌딩이었다. 당시 <안동서부소학교>에 근무하던 화가는 이 건물을 보는 순간 화의가 솟구쳤을 것이며, 화풍의 터닝 포인트가 될만치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을 것임을 추상해보게 된다. 금경연은 이듬해 다시 이 건물을 소재로 출품하여 입선했다. 금영숙은 전(前) 해 특선작이 후기인상파적인 화풍이라면, 입선작은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느낌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붉은 벽돌 건물   유채   1939년 제18회 조선미전 특선
1940년 제19회 조선미전 입선   유채

1939, 조선총독부는 523일부터 25일까지 조선미전작품을 접수받고, 동월 29일 입선자를 발표했다. 유채수채화 분야만 420810점 응모에 175명의 작품 196점이 입선했다. 특선 발표는 61일에 있었다. 유채수채화 분야에 12명이 뽑혔는데 그 중 조선인은 5명이었다. 이튿날 매일신보고르고 고른 특선작, 주옥같은 27이라는 제하에 ‘......유채수채화 분야 12명 가운데 대동강 소견의 박영선, ’3의 심형구, ’문학소녀의 김인승, ’검무의 김만형, ’붉은 건물의 금경연...’이라는 기사를 냈다. 여기서 금경연의 특선이 갖는 남다른 의미를 끄집어내 보게 된다. 먼저, 김인승과 심형구는 지난 해 특선자로 무감사로 뽑혔지만, 금경연은 일본작가 3명과 함께 박영선, 김만형과 초특선자가 되었다. 조선인 특선자 중 금경연 외 모두는 해외유학 엘리트들로 이미 중앙화단에 알려져 있던 작가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금경연의 특선은 이변이라 할 만하며, 오직 작품만으로 승부를 보았다는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62일자 조선일보는 특선자들에 대해 개별 인터뷰를 실었는데, 금경연에 대한 기사는 특선소감에 대한 당사자의 격한 감정을 옮기는 것에 대부분 할애했다. 이는 특선작가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없었기도 했지만, 개천에서 용이 난 것에 대한 기자의 동조감정 또한 더불어 느껴진다.

 

"특선이라요" 장거리 전화로 보내온 감격

初特選 安東, 琴經淵氏

 

특선의 영예를 차지한 시골 젊은 선생님-경북 안동읍 서부소학교 금경연(24)씨를 장거리 전화로 불러내니 금방 교수 중이다가 나와서-"네? 네? 머시라요? 특선? 특선? 특선이라요? 하고 내종에 외치는 '특선' 소리는 복받쳐 오르는 웃음에 뭉치어 요란히 전화통을 궁글은다. "틀림없는 특선입니다. 축하합니다.” "아이 감사합니다. 그 그림이요? 그건 안동 있는 병원 집을 그렸던 것입니다. 그림을 배우기는 대구 사범학교에서 고류(高柳) 선생께 지도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동안 사범 삼학년과 사학년 때와 작년에 입선되었었습니다. 그게 시간도 없고 해서 겨우 틈틈이 그려온 것입니다. 집에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고 형님도 작년에 돌아가시고 어머님과 제 처와 셋이서 간소하게 지냅니다. 제 어머님이 더 기뻐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힘쓰겠습니다."고 감격한 말이 끝날 때 학교 종소리가 "따르르" 들려온다. 전화가 끊기었을 때엔 선생과 아이들의 축하를 무한히 받을 때이었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경북지역의 화가 17명이 입선한 사실을 따로 보도했다. ‘일본인을 포함해 경주의 박봉수가 수묵채색화로 입선했으며, 유채수채화 분야에서 안동의 금경연, 청도의 장정복, 영주의 권진호, 그리고 대구의 이인성, 김용조, 최성각, 박재봉 들이 그들이다.’ 이중 이인성은 추천작가로 2점의 작품을 출품했으며 특선자는 금경연 뿐이었다.

 

금경연의 특선작은 당시 교사 봉급의 2년분이 넘는 금액으로 팔렸다고 한다. 1934년까지 조선인 훈도의 봉급이 52~55원이었다고 했으니, 상당한 거액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금경연의 손녀 금영숙은 영양 수비에 살고 있는 당숙으로부터 새로운 기억들을 채록했다. 이 그림은 당시 일본인이 240엔에 사갔으며, 훈도봉급의 1년 치에 해당되는 액수라는 것이었다. 이 그림은 엽서로 제작되어 전국에 유포되었는데 일본의 관광지에도 배포되었다고 한다. 금경연은 일본에서 화집과 미술재료를 사는데 이 돈을 고스란히 써버렸다. 삼촌을 4살 때부터 따라다녔다는 조카는 일본에서 온 커다란 나무박스 두 개에 물감, , 캔버스, 그리고 화집이 한 가득 들어있던 것을 보았다고 했다. 금영숙은 지금 남아있는 드로잉도 그때 샀던 종이에 그린 것으로 추정했다. 금경연은 늘 화첩을 끼고 살았으며, 또 하나의 재산인 후지 자전거를 타고 곳곳으로 스케치를 다녔다고 한다. 1937년에 어머니와 부인, 아이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은 2절 크기의 풍경수채화를 앞세운 모습이다. 금경연의 그림에 대한 애착을 엿볼 수 있는 일단의 장면이 아닐까 싶다. 금경연은 항상 부족했던 화구들과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세계명화전집(범우사 간)세계미술전집50여권을 그 때 사버렸다. 19377중일전쟁의 발발과 일제의 군수품조달을 위한 경제적 통제가 시작된 시기였음을 감안할 때 창작활동을 위한 화구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화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것임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화가로서는 뿌듯하고 설레었을 일이었겠지만 예술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쪼들리는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고 있던 부인이나 어머니의 입장에선 화가의 기분에 전적으로 동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영양교육청의 장학사 이종태라는 사람이 집안에 캔버스 채로 쌓여져 있던 그림들을 구루마 두 대에 가득 싣고 가져갔다는 얘기가 가전(家傳)되고 있음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금경연의 어머니는 그림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원망과 상실감이 컸다고 하는데, 방마다 쌓여있던 그림들이 달가울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림들을 실어가게 했지만 그러고도 남아있던 작품들은 한국동란 때 처마 밑에 달아두고 피난을 다녀온 뒤 사라졌다고 한다. 결국, 그림이 일실된 원인은 동란으로 볼 수 있으며, 장학사가 싣고 갔다는 팩트에 따라 유족들이 유작들을 수소문하고 있다. ‘조선미전에 첫 입선했던 양파와 능금그림은 한동안 집안에 남아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마저도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양파와 능금   유채

1939년 경산 <하주공립보통학교>(현 하양초)로 전근 이후 금경연은 대구 작가들과 재회하며 교감의 범위를 넓혀갔다. 당시 한국 근대 서양화의 선구적인 단체였던 향토회’(1930~1935)에는 참여치 못했으나, ‘향토회가 해체된 이듬해(1936) 발족된 남조선미술전람회에는 정경덕, 정점식, 김교인, 김진옥, 박재봉 등과 함께 신예작가로 참여하고 있음을 전람회를 주최한 조선민보가 소개하고 있다. 금경연의 나이 21살 때였다. 금경연은 6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경산에 머물렀으며 곧 경주로 떠났다. 경주에서는 최부자로 이름난 최준의 집에 방을 얻어 생활했다. 그런 까닭에 밤늦도록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며, 절전해야했던 시기였음에도 명망 있는 화가란 이유로 용인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조선미전특선자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던 것이다. 1940<계림공립보통학교>에 근무할 동안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경주중학교> 미술교사를 겸하게 되었다. 이 시기 금경연은 경주미술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으며 1942, 경주향토미술협회 결성에 앞장섰다. 이듬해 1회 경주향토미술전람회에는 출품은 물론 심사위원까지 맡았다. 194529세의 금경연은 고향인 영양의 <입암공립보통학교> 교감으로 발령받아 귀향했으며 곧 교장으로 승진했다. 귀향을 결심했던 것은 노모를 모시고자 하는 효심의 발로였지만, 해방 후인 1946, 그토록 원했던 고향 <수비공립보통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과로로 얻은 폐결핵으로 194841133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작고하고 만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1993, 전국 최초로 <영양문화원> 주관으로 고향 수비에 화가비가 세워졌으며, 2003년에는 둘째 아들 금태남의 노력으로 경상북도와 영양군의 예산지원을 받아 금경연화백예술기념관’(관장 금태남)을 건립해 운영해 오고 있다. 현재 유족이 제시하고 있는 작품은 4점뿐인데, 이중 1940년대에 그린 수채화 여름정원’(66.5x44cm)과 연대미상의 유화 경산 가로수 풍경’ (44x66.5cm)2점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금경연화백기념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약천정’(27.3x34.8cm)경주안압지풍경은 종이의 앞뒷면에 그린 양면화이다. 이외에 매우 서정적이며 완성도가 높은 풍경 유화(6호 크기) 한 점을 경주의 원로화가 이태희가 소장하고 있는데, 오래 전 부산에서 한 상인이 가지고 있던 그림에 금화백의 사인인 자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구입을 했다한다.(최용대) 자 사인은 유화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자 사인 중 졸업 앨범 속 은사들의 캐리커처 그림에서는 성이 아니라 이름의 끝자인 자를 표시해 두고 있다. 금경연, 권진호 등 대구화단과 멀어졌던 화가들, 특히 요절한 작가들은 한동안 잊혀지다시피 했지만, 1983년에 간행된 조선미술전람회도록(경인문화사 간)이 작가 발굴에 힘을 보탰다고 할 수 있다.

 

 경주 안압지 풍경  29x38cm  종이에 수채  연도 미상    금경연화백예술기념관 소장
약천정   금경연화백예술기념관  소장
소묘

 

풍경   유채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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