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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은 길을 묻지 않네 3

즈음 2020. 5. 23. 21:42

갤러리 즈음에서

 

그러고 보니, 위치가 낯익다. 여기가 옛날 윤학식당 아니야? K의 반문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다. 맞은 편 건물 2층이 호수다방이었다는 건 부인 못할 사실. 그러고 보니, 맞네.

 

20대적 우리들, 기윤, K와 호수다방에 죽치며 바둑 두며 놀던 시절이었다. 찻값이나 막걸리 내기도 종종 했다. 승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 K였고, 나는 기윤을 조금 얕잡아 보긴 했어도 자주 술값 낙점을 받는 덜컥수 수준이었다. 오빠, 나는 쌍화차 한 잔. 김양이 커피를 주문받으며 때로는 가장 비싼 차를 먹겠다며 만문하게 굴었다. 안돼!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둠살이 설핏할 무렵 윤학식당으로 내려왔다. 잡채가 들어있는 얼큰한 김치찌개에다 막걸리잔을 돌렸다. 어떤 땐 김양이 오빠, 나 좀 불러주면 안돼? 좀 쉬고 싶어서 그래. 못생기고 뚱뚱한 김양을 불러주는 이는 거의 없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보란 듯이 주인마담에게 한 시간짜리 티켙을 끊고 내려와 동무처럼 굴다가 씩씩해져서 돌아갔다. 돌이켜보면 그녀가 누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방위 받던 재균이 합세하여 4인 그룹이 된 적도 있었지만 소집해제 후 전주로 돌아간 뒤로 우리는 다시 셋이 되어 놀았다. 어느 땐가, 마흔을 앞둔 기윤도 떠나버렸다. 아예 세상 소풍을 끝낸 것이다. 배기윤. 나의 가슴 속 영원한 시인!

 

기윤의

 

현재엔 가고 옴이 없네

그래놓고 하는 말,

송형!

흐르는 물은 길을 묻지 않네

 

이 작고 허름한 건물이 작년(2019)에 내 욕심 속으로 편입됐다. 퇴임 후의 스케줄을 미리 닦달하듯 나의 마음을 조급하게 부추겼을 땐 언제고, 막상 내 품에 안긴 뒤엔 느긋하게 때를 기다리라는 식으로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러나, 사람 일이란 게 모두 제 뜻대로 흘러가주지만은 않는 것. 스케줄을 일찍 작동할 수밖에 없는 운 때(?)가 갑자기 맞아떨어졌다. 명퇴 후에 새 일을 모색하고 있던 조각가 K형이 자신의 손재주를 발휘해 보겠노라 나서준 것이다. 몇 달 만에 수줍은 새악시 같게 건물이 단장됐다. 갤러리로 변모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중이 제 머리를 깎았다고 자위했다. 문득, 갤러리 이름을 지었다. 작명의 변을 개관전 초대의 글에다 이렇게 썼다.

 

가장 새롭고 기대로 가득 찬 시간이 ‘즈음’의 시간이다......

‘즈음’은 알 수 없는 희망과 꿈과 다른 미래의 시간.......

모든 시간은 현재를 뒤로 밀어내며 미래를 앞으로 끌어당기는, '어느 즈음’!

 

갤러리 이름을 '즈음'이라고 지은 이유를 오민석 시인이 다 풀어내 주었습니다.

'즈음'은 막연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바램과 기다림이 내장된 부푼 시간이기도 하지요. 그 시간은 특정되지 않습니다. 설렘의 동안만이라고 해두겠습니다. 즈음 갤러리에서 만나게 되는 그림들이 그런 설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갤러리에 홀로 멍하니 있을 때, 그 시절이 저절로 떠올려진다. 그 어느 날 하루, 60대의 김상출 시인이나 20대 적 우리나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해봤다. 2019

 

 

하루

 

여섯 시 어름

늘 만나는 벗 두엇

 

막걸리 두 병

담배 반 갑

당구 한 판

 

다시 막걸리 한 병

이제 고만 하시더

그러지요 머

 

제목을 행복으로 할까하다가

피식 웃다

 

김상출, 『부끄러운 밑전』/문예미학사/2017

幽 52.5x40.5cm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