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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미술기행53 권영섭

즈음 2016. 8. 9. 13:24

영주미술기행53

 

한국형 순정만화의 선구자 권영섭 화백

 

 

나이 든다는 것을 멋으로 여기고, 잊었던 동심을 찾아 마음의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이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몸의 축소현상만큼 마음이나 정신 또한 쪼그라든 노인들을 심심찮게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방법 중의 하나가 ‘일’이다. 그것도 자신이 천직으로 여겼던 ‘일’을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계속해나갈 수 있다는 것, 더구나 그 ‘일’이 동심과 관련된 것이라면! 일전, 서울 인사동의 한 커피샵에서 권영섭 화백을 만났다. 초록색 베레모를 쓴 노화백께서는 처음 보는 글쓴이에게서 영주냄새가 났다고 했다. 영주냄새, 고향냄새를 노화백은 이미 마음속으로 고대하고 계셨던 것이리라. 선생은 달변가였다. 1시간 이상이나 쉬지 않고 또렷한 기억들을 쏟아냈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다려주셨던 백삼 물을 40여 년 간이나 꾸준히 장복한 결과 30대 못지않은 체력을 유지하게 된 비결이라 했다.

 

그 고향 영주가 자신을 만화가로 키워냈다. 만화책을 읽기 위해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일교회에 나갔던 것이 만화가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신앙인(전도사)으로도 살게 했다. 선생은 영주농고 시절(고2때 서울 중앙고로 전학) 대구 ‘신춘만화그리기대회’에서 가작 입상으로 3천환의 상금을 받았다고 했다. 이듬해 <연합신문> 아동만화 공모에 ‘방울이’가 당선되어 비로소 만화가의 꿈을 이루었다. ‘59년부터 고교졸업 직후인 ’61년까지 ‘우리들의 척척박사’가 연재됐다. 이어 ‘64년까지 <조선일보>에 ’꼬마박사‘라는 작품으로 또 3년간 연재를 이어갔다. 선생은 신문연재 활동 중에도 단행본 출간을 병행했다. ‘59년에 명랑만화 ‘둥탕이’를 발표했다. ‘60년에는 당시 사업실패로 집안을 어렵게 만들었던 형님의 네살배기 딸 혜경이를 모델로 ‘울밑에선 봉선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이 공전의 히트를 쳤고, 순정만화라는 장르의 선구자가 됐다. 그 때 선생 나이 21살이었다. 이를 계기로 ‘봉선이 시리즈’가 탄생됐다. 그 중 ‘봉선이와 바둑이’는 3부작 50편으로 역시 히트를 이어갔다. 당시에는 만화책 단본이 통상적인 관례였는데 출판사로부터 두 권을 한꺼번에 그려주면 집 한 채 값에 해당되는 대우를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기까지 했다.

 

이처럼 약관의 나이에 만화가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던 선생은 일찍부터 교회활동을 통해 조직문화를 체화했던 까닭에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던 만화가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한국만화가협회’ 창립에 밀알의 역할을 도맡았다. ‘68년 정부에서 ’간행물윤리위원회‘를 발족시켜 만화에 대한 탄압(?)을 심화하자 이에 맞서 항거에 나섰다. 만화가 불량서적으로 낙인찍힌 원인 중의 하나가 일본만화 베끼기에 있다고 보고 직접 일본에 건너가 원본들을 입수하여 카피본들을 색출하는 자정의 노력도 기울였다. ‘92년부터는 6년간 회장직을 수행하며 한국만화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앞장섰다. ‘96년 마침내 국제대회가 창설됐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 등 5개국이 참가한 만화서미트를 도쿄에서 개최했다. ’도쿄아시아만화대회‘ 창설식장에서 권화백은 기조연설을 했다. 이듬해 서울대회(서울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SICAF)에서는 16개국이 참가하는 대성황을 거두었다. 2016년 10월, 19회째를 맞게 되는 마카오 대회에서는 이 대회를 창시한 공적을 기려 공로패 수상을 예정해 놓고 있다. 2004년에는 최고 권위의 세계적 만화축제인 프랑스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Annecy International Animated Film Festival)로부터 심사위원 위촉을 받았다. 선생이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은 쾌거였다. 선생은 장편부문에서 미국작가와 맞붙은 우리나라 성백엽 감독의 작품 ‘오세암’을 그랑프리에 올려놓는데 큰 기여를 했다.

 

권영섭 화백은 영주가 낳은 불세출의 만화가이자, 만화행정가, 만화교육가, 만화선교사이다. ‘59년부터 ’81년까지 출간한 만화 단행본이 300여 타이틀에 무려 1,200여권이나 된다. 70년대엔 <소년한국일보> 전속으로 약 700권을 창작했다. 2004년에 출간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비유 16가지’는 청소년권장도서에 뽑히기도 했다. 현재에도 안동권씨종보에 연재만화를 15년째 이어가고 있다. 대한노인회에서 운영하는 ‘백세신문’에 자신을 비롯한 6명의 노 만화가들이 번갈아가며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또 여러 대학에서 만화과를 개설하는데 공헌을 했으며, 목원대, 공주대 등에서 카툰 강의를 맡기도 했다. 현재 KBS진품명품 만화 감정위원, 세계미술작가교류협회 고문, 한국원로만화가협회 회장 등 100세 시대를 선두에서 견인해가고 있는 최강의 노익장이다. ‘일’이 노인들을 젊게 만든다. 권화백은 1939년생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현역이다.


백세시대  제530호 2016.8.5(금)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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