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미술기행 51
회화를 디자인하는 섬유미술가 김은보
스티브 잡스는 창조를 ‘존재하는 것을 연결하는 힘’이라고 했다. ‘존재의 재구성’이라는 의미 또한 함축되어 있다. 김은보의 예술세계 역시 연결하는 힘이자, 존재의 재구성임을 떠올리게 된다. 울(Wool)이라고 불리는, 양모라는 질료의 이미지는 ‘실용’에 가깝다. 카페트나 패션 등이 쉽게 상상되지만, 프레임에 갇힌 회화적 이미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은보는 실용과 감상이라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회화라는 지평을 열어보였다. 양모는 곱슬곱슬한 모양과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 섬유이다. 특히 모 섬유의 한 종류인 펠트(Felt)는 습기와 열을 가하면 오그라들며 엉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은보는 바로 그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회화적 이미지를 직조했다. 그 직조된 화면이 곧 ‘존재의 재구성’인 것이다.
1993년 <홍익대학교> 섬유미술과를 졸업한 작가는 펠트예술의 본고장인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다. 국내에선 전통적인 물펠트 기법을 이용하여 작업하는 소수의 작가들이 있었으나, 은보는 모스크바에서 니들펀칭(Needle Punching)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배워왔다. 1998년 <모스크바산업미술대학원>을 졸업한 뒤 이듬해 <갤러리 상>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니들펀칭 기법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니들펀칭기법은 물펠트기법보다 정교하여 디테일작업이 가능한, 보다 앞선 기술이자 기법이었다. 이후 <청주대학교> 디자인학부 강의전임교수로 봉직하며 학교 측의 지원 아래 섬유회화의 외연을 넓혀나갔다. 국내로의 재료수입이 자유로워지면서 니들펀칭기법은 비로소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은보의 예술세계는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주제나 기법 면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소재나 내면세계를 평면적이고 화려한 색상으로 표현했던 이전 시기에 반해, 이후부터는 희로애락의 인간사를 자화상 시리즈로 발표하며 삶에 대한 성찰을 해오고 있다. 화면 역시 중간색이 빠지고 간명한 색상과 부조적인 입체감을 부각시켰다. 유화물감이나 먹 대신 팰트라는 매체로서 회화적 가능성을 제시했기에 여전히 생소함이 수반되는 점은 어쩔 수 없을 수도 있다. 실용성에 적을 두었어야 할 양모라는 질료를 감상 영역인 회화로 전환시킨 작가적 감수성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던 것일까. 큐레이터 윤상진은 모스크바 유학시절 그러한 감성이 싹텄으며,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화면 특성에 대해서는 ‘회화적 환영(幻影)’이라고 이름붙였다.
김은보는 1966년 생으로 영주중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오랫동안 청주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2007년부터 ‘영주미술작가회’ 회원으로 지역에도 작품을 선보여 왔다. 그동안 15번의 개인전을 서울과 모스크바(2회), 조치원 등에서 개최해 왔는데, 2003년에는 ‘김은보 염색조형전’이라는 타이틀로 영주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2014년, ‘소백산천연염색협회’ 남옥선 회장이 자신의 작업장 안에 <길 미술관>을 개관하고 은보를 관장으로 초빙했던 것이 낙향의 계기가 되었다. 2015년, 은보는 풍기북부초 삼가분교장을 임대하여 <은보미술관>을 새로 개관했다. 글쓴이가 <길미술관> 개관식에 참석한 이후, 3년 만에 그의 거처를 찾았다. 욱금지 위로 우뚝한 비로봉이 눈에 들자, 계삼정 화백이 그렸던 60년대 풍경화가 상기되어 왔다. 지게를 지고 가던 옛사람과 오솔길은 지워진지 오래지만, 비로봉을 정점으로 하는 구도만큼은 그대로였다. 두개의 교실 중 한 칸은 상설 갤러리로 꾸몄으며, 다른 한 칸은 작업실 겸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함께 커피를 나누면서 글쓴이는 예술가의 고단함 너머에도 여전히 삶의 ‘긍정’이 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안도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네 운명을 사랑하라.)’ 미술관을 나서는 길, 그의 애마인 오토바이가 눈길을 이끈다.
몽상05-5 40x30cm 2005 자화상 시리즈의 첫 작품
몽08-자화상13 130x178cm 2008
진(용)-1 120x150cm 1998
삶-1 110x135cm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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