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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미술기행42 김철옥

즈음 2016. 4. 2. 14:30

영주미술기행42

 

영주 그림 동네, 글 배달꾼 김철옥

 

철옥은 2004년 글쓴이의 개인전 서문 말미에 와꾸다까와 류우노스께의 설사 옥은 부서져도 기와는 부서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그것이 헛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라고 썼다. 무슨 말인가. ‘옥쇄란 명예로운 죽음을 뜻하지만, ‘와전이란 구차하지만 목숨을 보전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비록 귀한 물건이 아니더라도 기와의 부서지지 않음을 강조해준 듯하다. 그러니 복선을 간파해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30년 지기 술친구라고 하더라도 그대의 작업이 결코 옥이 아님을 아울러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1012일 오후, 노란색으로 물 들어가는 역 앞 가로수를 내려다보며 썼다고 했다. 1999년의 개인전 서문에도 선입견이나 기존의 길들여진 틀, 시선 따위를 보기 좋게 내던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하여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댓가라고 조언했다. 이처럼 글쓴이는 친구로부터 주례사 같은 원고를 받은 적이 없다. 그것이 그에 대한 믿음이다.

 

돌이켜보면, 철옥은 우리 동네 그림판에 관한 글들을 여러 편 발표했다. 예전엔 영주미술작가회에 대한 글이 대부분이었지만, 근래엔 미협 행사에도 글을 실었다. 그는 글쓰기를 마다했다. 이유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채근하여 건네받은 원고는 그러나 생뚱맞으면서도 솔직했다. 관망자의 서술마냥 건조체로 일관되기는 했지만, 그 속엔 냉소 섞인 애정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한 때 그의 아내로부터 이 계통의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끝내 본인이 고사했다. 그는 행정공무원으로의 책무를 더 무겁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미 공직 생활이 삼십년이 넘었다철옥을 통해 알게 된 공무원들은 대게가 후배들이었다. 그들이 철옥을 따르고 좋아하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밖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가장 공무원 같지 않게, 공무를 잘 집행하는 능력이 보였다. 그의 아이디어들이 얼마나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는 지가 궁금할 뿐이다.

 

장하고나 누이(동무)’(1987 영주미술작가회), ‘청작회, 그 푸르른 지문 1999’, ‘우리 세대의 청작회’(2004), '영주미술작가회를 말하다'(2004 영주문화34),이발소 속에 숨어 있었던 밀레’(2009 영주미술작가회), ‘100호 짜리 그림전에 붙여’(2012 영주미술작가회), ‘보급판 2014 영주아트전에 붙여’(영주미협) 등등. 모두 망라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이 그동안 그림동네에 발표했던 철옥의 글목록이다. 글쓴이의 개인전 서문이나 일반적인 단상들은 뺀 것들이다 그의 글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읽혔는지는 모르겠다. 2009년 영주시민신문의 서천산책코너에 글을 연재한 적이 있긴 하다. 그의 글쓰기 감각과 문체적 특성이 가장 공개적으로 발표된 때였을 것이다. 한 때는 시를 많이 썼지만, 요즘 들어선 잡문 쓰기를 더 즐기는 듯하다. 몇 해 전, 직장 내 동료들에게 매일 아침, '독후 단상'을 1년 내내 메일로 배달한 적이 있다. 지나고 보니 분량이 엄청났다. 그 중 가려 뽑아 책으로 묶으려고 했다. 그런데 단, 10권만 만들겠다고 하여 글쓴이와 옥신각신 한 적이 있다.

 

철옥은 1960년 생이다. 영광중학교를 함께 나왔지만 그 때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영주고 시절, 미술부에 들어갔다. 미술교사였던 홍종환 선생의 파격적 기질에 당시 미술부원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모두들 현상에 매료되어 있을 때, 철옥은 예술가와 선생 사이의 행간에서 권력, 열정, 아집, 체념 따위를 읽어냈다. 철옥은 미술부에 적을 두고는 있었지만, 미술에 흥미를 잃어갔다. 대신 그를 채워주었던 것은 난해했지만 무심히 빠져들었던 서양철학서였다. 그는 서서히 서구적 논리에 자신의 기질을 의탁해 갔다. 졸업을 했지만, 그에게는 공무원이라는 길외에 달리 선택할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5년 연상인 가형으로부터도 독립을 해야 했으며, 가형이 해왔던 것처럼 자신도 동생들의 미래에 대해 일정부분 보탬이 되어야 할 책무도 있었다. 방위소집이 해제될 무렵, 그는 자신만의 동굴인 화실을 가져보기도 했고, '81년 경북대학교 미술학과에 합격하는 객기(?)도 부려봤다. 그러나, 그는 공무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몇몇 동무들과 글동네를 기웃거리며 주막순례를 즐겼다. 그 시절로부터 글쓴이와는 지금껏 '30년 지기 술동무'로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엮어가고 있다.   


1995년 글쓴이에게 보냈던 엽서

K씨의 일상   2011   송재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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