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미술기행41
비하인드 스토리, 원칙의 화가 강형수
삼십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영주의 유일한 회화단체가 '영주미술작가회'이다. 시간의 무게만큼, 회의 정체성이나 각자의 삶의 비전 때문에 와해될 위기를 몇 차례 겪기도 했다. '84년 창립했을 때의 명칭이 '영주미술동우회'였듯이, 미술을 공유했던 고교시절 '동우'들의 느슨한 결사체로 출발했다. 인적, 물적 자원이 전무했던 당시의 실상에서 회를 성립시킨 것만으로도 선구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으나 구성원들 스스로도 미래가 불분명했던 미완의 젊은이들이었다. 떠날 이는 떠났지만, 들어오는 후배들이 더 많았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떠나고 들어오고를 반복하는 가운데 한 명이라도 더 늘어나는 상황을 유지했던 것이 '지금, 여기'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의 추이에 따라 회명도 '영주청년미술회'가 되었다가 다시 '영주청년작가회'로 변모를 거듭했다. 회의 정체성 문제가 전격적으로 불거져 나왔던 것은10주년을 맞았을 때였다. 친목 위주의 동문회 성격으로는 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한 출향작가의 돌출발언이 튀어 나왔던 것이다. 탈퇴를 하겠다고도 했다. 돌아켜보면, 10년 주기로 '정체성'이나 '비전'의 문제제기가 반복되었다고 생각된다. 비온 뒤에 땅이 더욱 굳어지는 법, 마침내 강형수가 해결사로 나섰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 디자인분야를 선호하는 쏠림 현상이 심화되어 순수미술 분야는 급격히 위축됐다. '82년에 결성됐던 안동대학교 영주출신 재학생 모임인 '모서리' 회는 이미 90년대 중반 저절로 사그라들었다고 했다. 영작회 역시 위기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회원으로 가입한 지 이태 정도 되었을까, 고집 세고 내향적인 성격의 어린 후배가 회장을 자천하는 만용(?)을 부렸다. 2001년의 일이다. 당시 후배들의 입회가 드물기도 했던 때라, 급기야 '청년'을 빼고 기존 맴버들만으로 '고(go)'를 외쳐야 할 상황이기도 했다. 그럴 즈음 강형수의 입회는 단비와 같았고, 나아가 정체되어 있던 회의 분위기마저 일신시키게 되었으니 일거양득의 수순을 밟은 셈이 됐다. 강형수는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던 출향선배들에게 저돌적으로 대시했다. 게 중에는 처음 알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의 뚝심은 그들을 한데 모으는데 성공했다. 그동안 괄호 밖이었던 출향작가들의 동참도 한동안 이어졌다. 마침내 2004년, '글로컬(Glocal+Local)'이라는 비전을 앞세워 '영주미술작가회'라는 간판으로 바꿔달았다. 그 정지작업을 맡았던 인물이 바로 강형수였다.
형수는 자신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니 안쓰셨으면 한다는 말을 여러차례했다. 공유할 스토리가 없으면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는 일이다. 형수의 작가적 지위보다도, 내면의 역량과 스토리가 있는 삶이 펜을 들게 만들었다. 강형수는 1967년 생으로 영주 보름골에서 태어났다.'85년에 영광고를 졸업하고, 강릉대학교 미술학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94년부터 '99년까지는 아웃도어 제조업체인 <(주) 우양> 개발실(디자인실)에서 근무했다. 그 역시 정착의 계기를 '직업'을 통해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자신의 길이 아니었다. 그가 회사를 그만 두고자 했을 무렵, 함께 박봉산에 올라 새해 일출을 맞았다. 김철옥이 동행했다. "한 번 다른 길을 가보고 싶었다."던 시인 함민복의 심정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형수는 '그림'이 직업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가르친다는 일도 그에게는 맞지 않았다. 공부를 더해보기로 했다. 2003년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했다. <썬앤문 갤러리>에서 석사청구 개인전을 개최한 것이 아직까지 개인전으로는 전부다. 그 때 이후 펜드로잉 작업이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잡았다. 대학 시절 틈틈이 습작을 해왔고, 대학원 준비 무렵엔 이미 주된 작업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던 참이었다. 모티브로 보나 테마로 보나 자신에게 맞는 구도의 길을 제대로 찾았던 것이다. 로터링펜, 만화펜, 일반펜 등 다양한 펜 중에서도 ‘둥근펜’이 자신에게 최적임도 터득했다. 근래엔 화이트펜(콘테)이나 펜슬을 가미해 농담과 그라데이션을 끌어들이고, 짧은 선치기 기법을 개발하는 등 자신의 메세지에 다중장치를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
시내 세무서 사거리의 한 건물 2층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형수의 작업실이다. 문을 열면, 눈빛 형형한 동물들이 방문자의 시선에 눈을 맞춘다. 그 표정 하나하나가 작가의 웅변이자, 갈망이며 체념인 것이다. 한 점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과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음을 짐작케 된다. 그는 원칙의 화가다. 보편성을 지녔든, 지극히 개인적이든 한번 정한 원칙은 어지간해서 번복하는 법이 없다. 그의 교통수단은 자전거이다. 불필요한 노선에의 이탈이 없다. 자신이 정한 노선으로만 바퀴를 굴린다. 한 고집의 소유자이자 역시 한 길을 파고있는 화가 강덕창이 사촌형이다. 그런 덕창마저도 그의 원칙 앞에서는 두 손을 들고 만다.
어느 현실주의자의 공상 100x94cm pen-and ink line, white pencil-and-line on paper 2012
어느 현실주의자의 공상 130x162cm pen-and ink line, white pencil-and-line on paper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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