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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미술기행49 윤제갑

즈음 2016. 3. 16. 13:09

영주미술기행 49

 

'아시아 미술'로 주목받는 글로벌 큐레이터 윤재갑

 

 

도올 김용옥 선생이 많은 이들의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동양철학을 택했던 자신의 선경지명에 대해 자화자찬하던 것이 기억난다. 동양사상으로의 U턴 현상은 꽤 오래 전의 일로서, 현재에도 담론화의 과정이 지속되고 있다. 미술계 역시 서양미술, 서양미학이 주류를 형성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윤재갑은 자신의 성향이었는지, 아니면 비전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역시 동양미술을 택한 것이 현명했다고 판단된다. 미술계 또한 탈서구와 아시아 중시 현상이 새로운 이슈로 급부상 했으며, 이머징마켙(emerging market, 신흥시장) 국가에 속했던 중국과 인도미술의 확장성은 글로벌 화두가 된 지 오래다. 2000년에 건립된 영국의 <테이트미술관>은 그 출발지점에서부터 서구미술의 역사에서 탈피, 아시아의 현대미술에 주목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서구에 경도되었던 현실을 반성하며, 2011년 제54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예술감독)에 아시아미술 전문가인 윤재갑을 선정했다. 이 선택은 적중하여, 한국관 개관 사상 최초로 매진을 기록하며 30만명이나 되는 관람객들을 불러 모았다. '사랑은 갔지만 상처는 아물겠지요'라는 타이틀의 특별전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윤재갑에 의해 단독 선정된 이용백 작가는 글로벌 아티스트로, 재갑은 글로벌 큐레이터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글로벌 큐레이터란 국제적 담론을 생성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 때만이 가능한 호칭이다. 재갑의 능력은 여러 경로에서 이미 검증을 받았다.

 

2010년 중국 민생은행이 개관한 <민생미술관>은 재갑을 아티스틱 디렉터(전시총감독)로 선임했다. 재갑은 '플라스틱 가든' 기획전을 통해 국내 작가들과 한국의 현대미술을 중국에 소개했다. 이러한 재갑의 국제적 인지도와 성과들로 말미암아 국가 이미지를 책임지는 역할로 이어지게 했던 것이다. 2015년에는 이두식 교수가 운영위원장(2007~20123회 연임)을 맡아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부산비엔날레’ 2016년도 전시감독에 선임됐다. ‘부산비엔날레광주비엔날레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제미술이벤트이다. 재갑이 선임된 이유 역시 아시아미술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브라질 상파울루비엔날레’, 미국 휘트니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히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그 진가를 인정받았던 재갑이 아닌가. 인도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던 2000년 이후 <갤러리 아트싸이드>, 2004년에서 2006년까지 <대안공안 루프>에서 디렉터로서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2005년부터 2010년 초까지는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중국, 미국 지사를 도맡아 '글로벌 노마드'로서의 광폭 행보를 소화했다. 2012, 재갑은 상하이 <하오아트뮤지엄> 관장으로 취임하여 아시아미술의 위상을 상향조정하는 선봉장으로 우뚝섰다.

 

윤재갑은 미술가를 지향했던 자신의 바램과는 달리 1987년 홍익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전액장학금을 받고 동대학 예술학과 2기생으로 새출발을 했다. 재학 시절, 필생의 동반자가 된 작가 이용백을 만났다. 한국미술을 알려면 먼저 중국을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 1995년 졸업식 다음날 곧장 중국으로 날아갔다. 베이징 제2외국어대학에 등록하여 중국어를 배우는 한편, 생활을 위해 중국학생과 함께 베이징 외곽에 '통다오(通道)'라는 카페를 열었다. 그 때,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한 팡리쥔, 웨민준, 양샤오빈, 쟝샤오강 등과의 사귐을 가졌다. 반체제 작가들이었던 이들은 당시 중국 공안의 감시대상이었다. <중앙미술학원>에서 중국미술사를 수료한 재갑은 '97년 야반도주하듯 인도로 떠났다. <타고르대학>에서 인도미술사 석사를 수료하며, 거기서도 인도미술계의 저명인사들인 수보드 굽타, 그의 부인 바라티 커, 세계적 평론가 기타 카푸르 등을 만나 교유했다. 이러한 인적 자원들은 재갑이 아시아미술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부여했다. 재갑은 1969년 생으로 영주고를 졸업했다. 당시 글쓴이는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재갑의 여동생이 여기에서 공부를 했다. 그 인연으로 대학생이던 재갑과 몇 차례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원서와 씨름하며 공부에 매진하던 학창시절을 엿볼 수가 있었다. 윤재갑은 마른 체형의 소유자였다. 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쳤을 때의 모습은 말 그대로 피골상접의 형용이었다. 그리고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각종 언론 매체들이 전해주는 소식들로 그와의 상면을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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