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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미술기행28 박정서

즈음 2016. 1. 6. 14:16

영주미술기행28

 

지역미술 발전의 견인차, 조각가 박정서

 

조각가 박정서와 글쓴이와의 관계는 먼 친척뻘 정도의 지역 선·후배에서 지역미술계의 봉사자이자 동반자로 급반전했던 케이스로 볼 수 있다. 그가 작가로서 지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고향에 돌아온 것은 98년도지만 2001, 지역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을 때나 2007상주낙동강설치미술제커미셔너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을 적에도 지역미술단체와는 거리를 두며 은거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현재 영주미술작가회의 대표직과 함께 영주미협의 사무국장으로서 지역미술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맡고 있으니, 이는 영주화단에 있어서 인적 업그래이드의 성공사례로 회자될 만하다.

 

가끔, 우연한 술자리에서의 만남마다 글쓴이는 영주미술작가회나 미협 가입을 권유했다. 그럴 적에도 별 감흥을 내비치지 않던 그였다. 그의 체념의 눈빛 속에서도 글쓴이는 그의 작가적 기질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2010, 정서는 영주미술작가회 뿐만 아니라 미협에도 입회를 했다. 그해 글쓴이는 영주미협 회장에 선출되었고, 2013년 중임되면서 그를 사무국장으로 지명했다. 그와 동시에 영주미술작가회 회장직도 그의 몫이 되었다. 더불어 멍멍왈왈 카페지기까지 도맡아 옛 중앙고 미술부 동문들을 소통의 장으로 불러 모으는가 하면, 스승(화동 전성진)을 모시고 중앙고동문전을 주관하기도 했다.

 

박정서는 1965년 영주 출생으로 영주중앙고를 나와 1990년 경북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귀향하기 전까지 대구에서 학원강사를 하며 칠곡의 마당 넓은 한옥을 소개받아 작업에만 전념했다. ‘92년 경대출신들로 구성된 대구조각회 창립에 앞장섰으며, ’95년 첫 개인전을 대구 에스갤러리에서 개최했다. ‘97년 두 번째 개인전(대구은행갤러리)을 개최하며 의욕적인 작가생활을 해나갔지만, 작업실 문제가 늘 난제로 떠올랐다. 문득, 대구에서 작업장을 갖느니 그 돈으로 고향 땅에다 농지를 구입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각가라는 직업은 일반 화가들과는 달리 넓은 공간이나 바깥이 더 요긴할 수밖에 없다. 조각가의 작업장이란 게 일견 고물상을 방불케 하기도 하는 것이다. 석재나 목재 등 작품재료에 드는 비용이 만만찮아 대구시절 이미 철조각을 병행해 왔던 터다. 산업현장에서 버려지는 나사와 같은 철재부품들과 철판, 철근 등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자리 잡았다. 어떤 부품은 그 자체로 레이메이드(완성품)였으며 보기에 따라 주술적인 형상도 내포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작가의 상상력과 예술적 감성을 덧붙여나가자 새로운 형상, 변화된 흔적이라는 주제가 매겨지게 됐다.

 

처음 정착했던 봉현 땅에서 그는 부농을 꿈꾸는 농군처럼 일했다. 영혼을 더 자유롭게 경작해 나갔다. F·R·P(합성수지)나 철조각 속에 자신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작품들은 희로애락의 감정이나 해학미로 넘쳐났다. 자신이 농사꾼이라기보다는 예술가라는 것을 자신과 지인들에게 각인시켜야 할 당위도 있었다. 다시 전시회를 위한 작품에 매진했다. 그러나 가정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그동안 가꾸었던 터전을 내놓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업장 화재로 그동안 준비해두었던 대부분의 작품들이 소실되는 참담 또한 감수해야만 했다. 현재 박정서의 개인적 과제는 마음껏 작업할 공간 마련일 것이나지역미술의 미래를 짊어져야 하는 공익적 과제 또한 그의 몫이 되고 있다


                                                      영주art2


                                                    삶의 흔적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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