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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미술기행9 강덕창

즈음 2015. 11. 3. 18:22

영주미술기행9

 

중얼거림의 화가 강덕창

 

 

강덕창은 중얼거리는 화가다. 서울 생활에 적응해나간 한 방법이 중얼거림 같았다. 그의 내면에서 직조된 형상마다 멀머링(murmuring)’이라는 레테르를 붙였다. 디테일과 색채와 미지의 상상이 덧붙여졌다. 오랜 그의 현실은 좁고 어두우며 질척거리는 골목 안 같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골목 밖에서 그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그는 최근까지 중얼거림을 내장한 이미지들을 쏟아냈다. 머잖은 때 그의 골목 안으로 빛이 비춰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허전했던 옆구리가 든든해졌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곁을 채워준 이의 울림통은, 화가를 대변해 주고도 남을 만했다. 화가는 더 이상 중얼거림의 볼륨을 높이지 못할 것이다. 근래엔 조무래기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화실은 그만의 공간이 되었다.

 

젊은 시절의 강덕창에겐 현실에 대해 고함치는 직설화법 뿐이었다. 그 형상은 무딘 채로 강했고 색채는 명료했다. 1980년대, 시골 대학생이던 강덕창은 민중미술 힘 전을 통해 시대에 저항했다. 그의 그림은 내동댕이쳐졌고 군화발에 짓밟혔다. 한글의 자모 덕(?)인지는 몰라도 그의 이름은 기사마다 앞자리에 놓여졌다. 독자인데도 불구하고 현역병으로 전방으로 끌려갔다. 제대 후 시대와의 불화, 시골 출신이라는 열등감을 안고 상경했다. 벽화를 그렸고, 조무래기들을 가르쳤다. 화가로서의 잊혀져있던 삶 속에서도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고함은 서서히 중얼거림으로 잦아들었다.

 

이두식 교수를 대학원에서 만났다. 이교수는 곡절 끝에 홍익대학원에 입학한 강덕창을 동향 후배로서 반겨주었다. 당시 영주미술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제도권이라는 데에서 처음 느껴보는 환대였다. 80년대 민중미술을 연구하고 있던 대학원 교수가 등잔 밑의 덕창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가 궁금해 했던 강덕창이 이 덕창이었던 것이다. 상경하여 자리를 잡기까지 그 동안 7번의 개인전을 서울과 일본 등지에서 개최했다. 외골수의 고집 때문에 그의 주변은 늘 적막했지만, 성공도 그 고집 때문일 거라고 믿고 있다. 그는 아크릴물감과 유화물감뿐만 아니라 색연필도 주된 재료로 다룬다. 색연필로 그린 중얼거림 시리즈 중 몇 작품이 중학교와 고등학교교과서에 실렸다. 발상과 재료의 궁합이 이채로웠던 것이다.

 

덕창은 1962년 영주에서 태어났다. 대영중학교와 영광고등학교를 거쳐 안동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미술부 때는 와일드한 성격의 일 년 선배 때문에 신봉하던 자유와 평등이 흐트러졌고, 형편 탓에 진학했던 지방 국립대에서는 자연주의 화풍과의 불화를 경험했다. 군대 생활 또한 억울한 덤터기인 냥 버텨냈다. 하지만 세월이란 게 무섭다. 이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자신을 구축하는 자양분으로 흡수됐다. 그는 괄호 밖이면서도 안이었고, 괄호를 옮기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의 작품들은 소문 없는 독자들에 의해 구축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강덕창은 영주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영주미술작가회의 창립 이래, 입회한 뒤 단 한 번의 이탈 없이 지역에 작품을 배달해온 작가다. 그에게서 영주를 로컬과는 다른 차원으로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murmuring   38x53cm   colorpencil on paper 2011-2013  중등미술(비상교육 P85)

murmuring   48x65cm  colorpencil on paper (2011)  2014 고등미술(씨마스-P27)

murmuring  55.0x39.5   pencil onpaper 2011-2013  중등미술(두산-동아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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