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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미술기행6 권기철

즈음 2015. 11. 3. 17:46

영주미술기행6

 

소리를 그리는 화가 권기철

 

회화가 영원한 텍스트라는 믿음을 가진 화가가 있다. 유년기부터 붓을 들고 글씨를 쓰며 놀았으며, 작두에 오른손이 절단되는 위기를 감내했다. 남루했던 10대 때엔 가출을 통해, 음악과 그림으로 스스로를 치유했다. 당연히 삶 자체가 치열했다. 20대부터 바흐와 모차르트에 심취했으며, 그림을 음악으로 치환했던 작곡가 무소르그스키처럼 시간공간으로 옮기는 작업에 빠져들었다. 그의 붓끝에서 방사된 선()들은 그가 세상과의 소통의 도구로 삼았던 소리들이다. 수묵 속에는 화가의 자유로운 영혼이 베여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한국화가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수묵 속에서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재료를 옷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정신이 표상하는 것은 내적 깊이이며, 재료의 물성에서 가능한 자유롭고 싶어 한다.

 

그의 작업실은 달성군 비슬산 기슭에 있다. 50여 평의 축사를 개조했다. 아무리 음악을 크게 틀어놓아도 방해될 일이 없으니 흡족하다. 한 때 구상 이미지를 통해 소리를 재현하기도 했던 그의 작업은 추상 이미지로 변모해 나갔다. 표현하고자 했던 형상은 직유가 아닌 은유와 상징이다. 형상은 으로 표출된다. 화가는 소리으로 파악했다. 그것을 담아내는 가장 좋은 그릇이 회화였다. 구상이 물리적인 재현이라고 볼 때, 추상은 시간과 공간의 비주얼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화가는 믿는다. 음악 자체가 추상이니, 그의 작업이 추상을 지향하게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화가는 다시 힘주어 말한다. “영원한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회화다. 평면이 거듭해서 공간이 되고, 첨단이 되고, 그렇게 진화하는 것이리라. 손끝 감각의 생명력을 기계가 온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회화는 언제나 살아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권기철은 1963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가난했던 집안의 6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1971년 영주로 이사를 왔으며, 영주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에 입문했다. 영주고등학교 미술부 시절엔 홍종환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 그 때 이미 스승으로부터 를 검증받았을 지도 모르겠다. 1983, 경북대학교 미술학과(한국화 전공)에 진학했다. 아무래도 국립이외엔 돌아볼 대학이 없었을 것이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입시 미술학원 강사생활을 시작했다. 1985년에는 시인 장정일을 친구로 만났다. 회화 한 분야만으로도 이미 인정을 받은 그였지만 재능은 주체할 수 없었다. 매일신문에 미술칼럼을 연재하기도 했고, 책 편집과 캘리그래피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2012년 영주아트파크개관기념 영주미술축전타이틀 글씨가 그의 작품이다. 대구시립교향악단, 대구컬러풀축제, 2015 대구국제오페라축제 포스터 등도 모두 그의 손끝에서 탄생됐다.

 

그는 현재에도 영주미술작가회를 통해 지역에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어려웠던 기억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주에 오는 것을 그리 달가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올 때면 꼭 찾는 친구가 있다. 바로 우리 동네 서예가인 김동진이다. 둘은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많다. 조만간 권기철의 작품전을 영주에서 보게 되길 기대한다. 전시회의 색다른 패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김동진과 함께 2인전이 되어도 무방하겠다.

 

 

어이쿠   474 x 210cm 한지 위 먹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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