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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미술기행5 김호걸

즈음 2015. 11. 3. 17:43

영주미술기행5

 

한국 인물화단의 거장, 김호걸 화백

 

 

해방 직후, 이산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부석사로 소풍을 떠났다.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돌아왔다. 6학년이 되었을 땐 순흥 초암사로 23일 수학여행을 떠났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중에야 초암사에 도착했다. 지친 아이들은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절에서 제공해준 주먹밥 하나씩을 받아들고 소백산 국망봉에 올랐다. 길을 만들면서 나아갔다. 내려올 때엔 학교에 심기위해 여러 나무들을 채집했다. 이번에도 초암사는 전설의 고향처럼 불빛을 깜박거렸다. 다음 날, 아이들은 집이 있는 이산면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이번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 학교의 소나무 울타리는 그때 심은 나무들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6.25전쟁이 터졌다. 피난길에 올랐다. 13일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일행이 없었더라면 하루 미리 돌아왔을 길이었다. 2014년 서울 한전갤러리에서 개최된 영주를 그리다행사에 참석했다가 함께 했던 만찬장에서 김호걸 선생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 강인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선생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갔다.

 

서구문화의 소산인 누드화가 처음 국내에 등장했던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일본 유학생 2호였던 김관호가 조선인 최초의 누드화인 해질녘으로 일본 제전에서 특선상을 수상했다. 화면엔 벌거벗은 두 여인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시작된 누드화의 여정은 유교문화 속에서 이런저런 편견과 불화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작품이 팔린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견뎌내며 전업화가로 누드화를 과반세기 천착해왔다는 것은 먼 길을 걸어온 일과 다를 바 없다. 바퀴에 얹혀 쉽게, 빠르게 달려온 것이 아니라 오직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왔던 길인 셈이다. 어린 시절의 그 옹골졌던 걸음처럼 김호걸 화백의 예술세계는 이렇게 완성되어 왔다. 기본이 걸음인 것처럼 선생은 철저한 소묘정신을 강조한다. 그림에서 소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래서 불문가지다.

 

선생은 1934년 이산면 두암고택에서 태어났다. 195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경복고와 경동고에서 10년간의 교사생활을 했지만, 전업화가로서 지금까지 외길을 걸어오고 있는 중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신미술회, 한국인물작가회, 한국풍경화가회 고문으로 있으며, 영주미술작가회에도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다. 선생의 화가로서의 자존심과 성품은 후배들에게 저절로 죽비가 된다.

김호걸 화백에 대한 새로운 기사가 있을까 싶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길거리 밖의 화가’(운영자 김학민)라는 블러그를 우연찮게 방문하게 되었다. 제자인 화가가 선생님과 뙤약볕에서 작업을 하는데, 허덕대는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저기 아름다운 산과 녹음, 물을 그리려면 우리는 여기 뙤약볕 아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아름다움을 즐기러 온 사람들은 저곳에 있지만, 아름다움을 만들려고 온 사람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 

인체습작 · 소묘 53.0 x 45.5cm 1960

홍이 91.0 x 72.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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