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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지방에서의 사색

즈음 2022. 1. 7. 12:04

수채화, 정체성을 지닌 글로벌 회화

 

 

  채화(水彩畵, watercolor)란 안료를 수용성접착제와 함께 물에 풀어서 그리는 그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전통의 수묵화를 포함, 물이 매제로 사용되는 회화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그 의미를 확장시켜 볼 수도 있지만 오늘날 수채화라고 하는 것은 투명묘법에 의한 작품경향을 일컬으며, 서양화적인 표현기법으로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물을 매제로 삼는 여러 양식들의 독자적인 명칭, 예컨대 불투명화법인 과슈(gouache)나 제지술의 전래 이전 양식인 프레스코(fresco) 등에서처럼 수채화 역시 서양의 특정 회화양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동양의 수묵화는 물을 매제로 하는 회화양식임에는 틀림없으나 수채화와는 그 근본정신이 다르다. 수묵화는 기본적으로 채색보다는 드로잉(drawing)이 전제된 회화로 볼 수 있으며, 채색이 가미됐다 하더라도 묵화의 기본은 훼손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채화는 페인팅(painting)이 전제된 그림이고, 아무리 모노톤(monotone)으로 절제했다 하더라도 수묵화와는 그 지향점이 다를 수밖엔 없다.

 

  동서의 차이뿐만 아니라 물을 매제로 삼는 고금의 양식들 모두가 제각각 고유한 명칭과 함께 그 나름의 쓰임을 지니고 있다. 굳이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모든 물그림들을 유화(油繪, oilpainting)라는 양식과 대별코자 한다면, 수채화보다는 수회(水繪, 수용성 회화)라는 명칭으로 대응하는 것이 보다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생동하는 힘의 상징이다. 물의 생명력이 숙련된 작가의 의지를 통해 육화(肉化)되면서 비로소 수채화는 회화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물은 자연스럽지 못함은 드러내질 않는다. ‘자연스러움에 도달하기까지 그 자연스러움이라는 까다로움때문에 수채화 작업은 얼마나 좌절되어 왔던가. 수채화는 바로 그까다로움과의 화해를 통해 비로소 예술적 성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수채화를 그릴 때, 꼭 투명묘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수채의 본연의 맛과 특성이 투명묘법에 보다 두드러진다는 점은 부인하기가 어렵다. 비록 서양에서 개발된 채료지만 맑은 물과 융화되는 정신은 우리의 정서를 대변하기에 손색이 없다. 범세계적 보편성 또한 획득한 장르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수채화, 특히 한국수채화에 대한 생각을 피력해 보게 된다. 수채화를 전통의 맥락 속에서 수회의 폭으로 넓혀갈 것인가, 아니면 예술의 글로벌리즘(globalism)이라는 명분 아래 현대성이라는 자족으로 버틸 것인가.

 

   현대는 탈 장르라는, 이른바 표현지상주의라는 조급성이 회화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만이 미의 완성태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자만에 빠진 것처럼. 수채화 역시 서양화라는 좁은 틀 속에 스스로 가두는 우를 무의식적으로 행한다. 물질은 어느 때고 교류가 가능하지만, 그러한 교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종이나 붓, 물감, 그리고 물이라는 매재를 피동적 물질이 아닌 능동적 물성으로 이해하려는 정신의 회복이 그래서 더 절실하다. 이러한 사상은 우리 고유의 회화정신이기도 하면서도 상생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수채화가 정체성을 지닌 글로벌 회화라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서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수채화를 문학에 비유할 적에 여러 장르 중에서도 특히 시()를 떠올리는 일은 시의 운율처럼 경쾌하고 함축성을 지닌 점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대표적인 화가로 정봉길(1955~ 제천)이 떠오른다. 정봉길의 수채화는 자연을 운율에 맡긴 듯한, 정서의 산책길 같은 울림을 준다. 짙고 무거운 듯한 채색은 빛과 색의 콘트라스트(contrast)를 빚어내는 역설의 재료들이다. 표상 너머의, 보지 못했던, 볼 수 없었던 자연의 이상이 어렴풋한 깨달음으로 느껴져 온다. 작가는 말한다. “초록색에서 살아있는 기()를 느끼고, 늦가을 들판에서 인생의 평온함을 같이 하며, 하얀 설국에서 생()의 심오함을 본다. 대지와 대지 사이에서 울림을 느껴보고 싶다.”

 

정봉길,  '歸來'   60x78cm   2016 인천현대수채화제전 출품작

 

   운문형식인 시도 산문화나 형식파괴를 통해 다양한 패러다임을 확장해나가고 있듯이 수채화에서도 자신의 경험을 독창적으로 해석해내려는 시도들이 존재해 왔다. 기법의 개발과 재료의 개방 등 형식(화면효과)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작업태도가 그러하다. 이를 화면중심 화풍이라고 전제한다면, 필력중심 화풍은 말 그대로 필선이 주체가 된 전통적인 작업태도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투명묘법을 본령으로 재기발랄한 구성력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투명, 불투명의 구분 없이 절제된 붓놀림과 무덤덤한 색조, 세련된 맛보다는 우직스런 스타일로 물맛을 우려내는 태도라고 하겠다. 화면중심 화풍이 독특한 표정을 짓는다면 필력중심 화풍은 차라리 민표정하다. 또한 방법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화면중심이라면 붓자국 하나하나에 의미와 역할을 내재시키는 것이 필력중심 화풍이다.

 

   색채를 제어해내는 힘이란 결국 드로잉의 힘이다. 수채화에서의 드로잉적인 선이란 본디 색채에서 출발한다. 색면과 색면을 이어주는 악센트거나, 분해된 면처럼 흩어져 있다가도 색채 위를 날렵하게 떠다니며 형상을 조율해 내는 힘. 이러한 점은 수채화가 묵화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전통이란 무엇인가. ‘전통은 전승(傳承)과 다르다. 전통은 선택적 인식과 적극적 가치 부여를 통해 계승될 때 비로소 전통이 된다.’

 

  필력중심 화풍을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 안동이다. 그 원지점에 손일봉(1906~1985 경주)이 있다. 제자들인 박기태(1927~2013 울산), 이수창(1929~2013 의성), 김인수(1930~1991 울산) 그리고 3세대라 할 조광래(1939~ 안동)가 물줄기를 형성했다. 이들을 통해 전통이라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2세대 작가들은 손일봉을 전승한 것이 아니라, 스승의 생각과 방법론에 근거하면서도 개성적인 화풍으로 자기화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한국수채화화단의 성과이자 연구과제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수채화를 제작함에 있어 필력이나 화면중심적 화풍은 저절로 혼재되기도 하지만, 저변에 깔린 작가의 작풍은 어느 한 편이 두드러지게 마련이고, 그것은 곧 한 작가의 개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로 작용을 하게 된다.

 

손일봉, 1928년 제9회 제전 입선작 '신록'   (1987년 손일봉유작전, 신세계미술관 출품)

 

   물이라는 물성과 교감할 줄 아는 작가기질이 전재되고, 그러한 작가만이 물빛의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역설. 수채화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화지나 붓질의 선택에서부터 날씨에 이르기까지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기법의 활용 또한 그러하다. 그 중 알라 프리마(alla prima)기법은 일획의 붓질로서 하이라이트를 만들어내는 테크닉이며, 번지기나 겹칠하기 등도 기본기법들이다. 팍팍한 드라이 브러싱(dry Brushing)기법은 물의 풍요로움에 대한 반어적 표출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수채화는 과슈나 아크릴처럼 물의 역할이 최소화되기 보다는 매제로서의 역할이 충만해진 경우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수채화만의 특성 중 번짐닦아내기기법을 그래서 대표적으로 꼽게 된다. 전자는 우연성을, 후자는 의도성을 대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번짐은 우연성이라는 형태로 물성의 자발성을 기대하는 것이고, ‘닦아내기는 안료와 종이가 삼투된 상황을 의도성을 갖고 물리려는 것이다. ‘번짐을 가장 독창적으로 해석해낸 화가 중 한 명이 정우범(1946~ 광주)이다. 그는 목면 성분의 아르쉬지에 물을 먹이고, 다소 뻣뻣하게 만든 붓으로 스토로크(stroke)와 두드림을 반복해가며 화면을 완성해간다. 그의 꽃 그림(환타지아, Fantasia)은 그렇게 탄생됐다. 작가가 말했다. “번짐의 미묘한 효과는 수채화만이 드러낼 수 있는 독특한 기법이다. 이것이 없으면 수채화의 생명이 없는 것이다. 번짐은 소통이다.”

 

   닦아내기 기법의 예는 일제강점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5년 제4회 선전에서 손일봉과 함께 특선을 수상했던 행인(杏仁) 이승만(1903~1975 서울)은 자신의 작품 라일락꽃에 대해 물감 쓰는 법을 잘 몰라 칠하였다가 닦아내기도 한 것을 기법이 특이한 불투명수채화로 보고 상을 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기법을 독창적 기법으로 체화했던 화가가 이수창(1929~2013 의성)이다. 이수창에 대해서는 작가론을 통해 밝히기로 한다.

 

 

이승만, 제4회 조선미전 특선(4등상)작.  '라일락 꽃'

 

이수창  '탑골종가'  1988

 

 

주)

1. 이인숙, 대구의 수묵화: 묵죽, 사군자, 화훼, 기명절지, 산수, 실경산수, p319, 때와 땅, 대구미술관, 2021

2. 조은정, 손일봉의 작품세계p14-15 (재인용, ‘이승만 풍류세시기, 중앙일보사, 1977, p225-226), 손일봉 학술세미 나자료집, ()경주문화재단,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