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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과 이쾌대 형제

즈음 2021. 3. 5. 16:15

이여성(1901~?)과 이쾌대(1913~1965) 형제

 

 

이여성(본명 이명건)과 이쾌대는 칠곡 출신으로, 특히 동생 이쾌대는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둘 다 월북화가로 남과 북에서 동시에 금기 인물로 낙인찍히기도 했던 비운의 형제이기도 했다. 이쾌대는 형과 더불어 북한에서도 행적이 사라졌다가 1999년 김정일의 지시로 복권된 뒤에야 북한미술사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1965년 병사설이 유력하지만, ‘87년 사망설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19359, 언론인으로서의 이여성은 예술가에게 보내는 말씀이란 짧은 편지를 예술가들에게 띄웠다. “조선의 예술가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꼭 두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2. 현실 조선의 과학적 파악자인 예술가-우리의 예술가는 유한자를 위한 사치품의 제조자가 아니오, 민중의 피와 살을 돋우며, 그 감각과 기분을 살리면서 또 생활과 활동을 향도하고 붙들어 주는 존재가 아니면 아닐지니 조선의 실태를 과학적으로 파악하여 그 마음의 소리를 밝게 듣는 예술가가 요구된다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며 신시대 미술가의 임무에 대해 일갈했다.1)

 

동년 10월에는 동아일보사 3층 강당에서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 공주)2인전을 개최했다. 동아일보사 직원들의 모임인 동우회가 주최했는데, 신문은 소품전람회라는 게 우리 화단의 첫 시험이라고 하면서 우리 산수화계에 독특한 경역을 이룬 청전 이상범씨와 우리 화단의 숨은 거재 청정 이여성의 소품 100점으로 꾸민다고 알렸다. 101일 개막 첫날 오전에 작품 60점이 팔려나갔으며, 게다가 사흘 동안 관람객이 무려 천여 명이었고 모든 작품이 다 팔려나갔다.는 기사를 냈다. 당시 청전과 더불어 2인전을 개최할 만치 화가로서의 기량 또한 출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여성은 이상정(1897~1947)과 더불어 대구화단의 여명기를 일깨운 선각자였다, 둘 다 모두 재산가이자 투철한 애국투사였으며, 사대부 의식의 소유자였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화가로서의 재능 또한 탁월해서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서사적 해석이 가능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1938년 작 격구도(擊毬圖)와 같은 작품이 탄생되었으며, 역사기록화를 제작하고자 했던 열망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1923대구미술전람회에 서양화부에 출품됐다. 이여성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역사화를 여러 점 제작하였다고 전해지나 현존하는 유일의 작품이 이 격구도이며, 동시에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중희는 이어 말하길, 1930년대 한국화가로는 최고의 기량임을 전제하면서 무엇보다도 이미 사라진 무예를 일일이 문헌고증을 통하여 역동적인 동작의 동물과 사람을 이렇게 능란하게 묘출시켰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기량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림은 위에 화제를 써넣은 전통방식의 2단 구조로 되어 있지만, 그림의 형식은 투시원근법 뿐만 아니라 공기원근법까지도 완벽하게 구사되어 있다.

 

당시 대구수채화화단에서 서양화를 받아들였던 초창기 수채화화가들의 화풍 속에 수묵화적인 특징이 나타났던 것에 대해 미술평론가 김영동은 김수명의 화론에 빗대 전통서화에 익숙했던 정서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린 적이 있다. 역으로 이여성의 1934년 작 사계산수도에서는 전통회화 속에 서양화적인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미술평론가 이중희는 산수화이긴 한데, 주목되는 점은 미약하게 원근법이나 입체감 표현을 가미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런 서양화 기법으로 인해 이런 그림이 당시로서는 서양화로 분류된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는 격구도에서와 같이 서양화적인 요소가 자연스레 투영된 것으로 이는 이여성만의 미감이자 민족주의적 화풍이며, 이를 이중희는 절충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여성은 해방을 맞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 ‘48년에 월북하고 말았다. 월북 후에는 정치 일선에 나서기보다는 조선복식사, 건축사 등 학술연구와 저술에 매진했다고 한다. 1947조선복식고,(백양당) 1955조선미술사개요(평양국립출판사), 1956조선건축미술의 연구, 한복간(국문화사) 등을 집필했으며, ’조선화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펼쳐나갔다. 1957<김일성대학>에서 역사학 강좌장을 맡은 이여성은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학문발전이란 기대할 수 없다는 발언을 했다가 순천의 도자기 공장에 화공으로 쫓겨 갔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50년대 후반 김일성으로부터 숙청됐을 것이라는 추정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이처럼, 화가이자 언론인이며, 사학자이자 진보사상가였던 이여성은 동생 이쾌대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그의 월북과도 무관치 않음을 시사해 준다. 이쾌대는 한국동란이 터졌을 때 병환 중인 노모와 만삭인 부인 때문에 피난을 떠날 수 없었다. 북한 점령기의 서울에서 인민군 부역화가로 남조선미술동맹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으며, 서울 수복 후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휴전이 되고 남북 포로 교환 때 자의로 북한을 택했는데 이 점이 지금도 의문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쾌대는 수용소 시절 아내의 얼굴을 그리며 그리워했으며, 19501111일에는 부인(유갑봉)에게 애틋한 감정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편지글의 내용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선택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편지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래간만에 내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920일 서울을 떠난 후 5, 6일 동안 줄창 걷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어 지금 부산 100수용소 제3수용소에 있습니다. 나의 생사를 모르는 당신에게 이 글월을 보내게 되니 () 그리고 무엇보담도 한 푼 없는 당신 무엇으로 연명하는지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밉살스럽기 한량없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시오. 나는 이곳 포로수용소에서 나를 두둔해주는 친지들의 덕택으로 잘 있습니다. () 이곳 부산은 남방인 관계로 기후도 따뜻합니다. 내 걱정 과히 말고 모쪼록 당신 건강에 조심해 주시오. 이곳 나의 희망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건강입니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 하나씩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흰 캔버스, 그림들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마음은 지금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김병기는 대구의 대부호집 아들로 친형 이여성과 함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월북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이쾌대는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유갑봉(1914~1980)과 열애 끝에 스무 살에 결혼해 이듬해인 193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데이코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유학 시절 이쾌대의 인물그림 속 모델은 모두 아내였다고 한다. 그만큼 유갑봉은 그 시절 이쾌대에게 예술적 영감이자 뮤즈였던 것이다. 1938년 졸업년 때 도쿄에서 열린 제25니카텐(二科展)’운명으로 입선, 두각을 나타낸 후 3년 연속 입선했으며 1941년 도쿄에서 이중섭(1916~1956 원산), 진환(1913~1951 고창), 최재덕(1916~? 산청), 문학수(1916~1988 평양) 등과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1944년까지 도쿄와 서울에서 동인전을 가졌다. 해방 직후엔 좌익미술단체인 조선미술동맹’(1946)를 탈퇴하고, 이듬해 중도 성향의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했다. 이는 1947년 이래 미군정청의 좌익예술인 검거가 본격적으로 개시되고 좌익미술운동단체들의 활동이 비합법화하게 되자 조선조형예술동맹에 속했던 미술가들이 대다수 탈퇴하게 된 탓이기도 했다. ‘조선미술문화협회진정한 민족예술의 건설을 표방하며 김인승(1910~2001 개성), 조병덕(1916~2002 서울), 이인성(19012~1950 대구) 18명이 참여했던 단체로 1949년까지 4회의 회원전을 가졌다. 이 시기 해방의 감격을 표출시킨 군상-해방고지(1948) 등 대작들을 잇달아 발표해 화단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쾌대는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북을 택했다. 너무나 존경했던 형을 따르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고, 형의 월북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위협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내와 가족에게 보인 인간미 넘친 편지글의 여운은 반전으로 보기엔 너무도 뜻밖의 선택이라 그 자신 당시의 심경이 더욱 궁금해질 따름이다.

 

1946년 이쾌대는 성북회화연구소를 개설하고 물방울화가 김창열(1929~2021 평남 맹산), 조각가 전뢰진(1929~ 서울),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최초의 여류화가 심죽자(1929~)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1948년에는 독도(獨島) 어민 참변 사건을 주제로 그린 조난과 초인적 의지의 인간상을 표현한 걸인, 군상-해방고지와 같은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한국근대미술사를 다시 써야한다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들은 1988년에 가서야 월북작가 해금조처가 이루어져 세상에 드러났지만, 이 작품들을 온전히 보전했던 사람은 바로 아내 유갑봉이었다. 남편의 월북으로 유갑봉은 연좌제의 족쇠에 매여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남편의 분신인 작품 전부를 목숨으로 간직했으니 한국미술사의 은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1988년 월북작가 해금 조처 이후 이쾌대 신화창조는 이렇게 완성됐던 것이다. 1990년 신세계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해금작가 유화전을 시작으로, 1991월북작가 이쾌대전’(신세계 미술관), 1992월북작가 이쾌대 순회전’(대구 동아 미술관), 1993회고전’(수원 문화회관)유작전’(경기도 문화예술회관), 1995이쾌대-낯선 작가를 향한 주목’(대구 대백프라자 갤러리) 등의 유작전이 연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유갑봉 본인은 해금을 지켜보지 못한 채 1980년 별세하고 말았다.

 

홀로 네 자녀를 키운 유갑봉은 서울 신설동 집 다락방에 남편의 작품들을 고스란히 숨겨 보관했다. 한옥이었기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19508월생인 막내아들조차 장성한 후에야 다락방 그림의 존재를 알았다고 했으니. 이쾌대는 2m 이상의 대작 군상 연작들을 4점이나 남겼다. 이러한 역작들에 의해 비로소 한민족의 정체성과 국적 있는 미술의 회복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미술평론가 최열은 해방공간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며 낭만주의의 격렬함으로 뒤엉킨 서사시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쾌대의 그림들이 19세기 서양의 고전주의 · 낭만주의 · 사실주의가 어떻게 한국적으로 탈바꿈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한국미술사상 최고의 기념비적 작품들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주1)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열화당, 2015, 최열 p343, )인용, 신동아 19359, p355

주2) 위의 책 p350, )인용, ’청전, 청정 소품백폭전동아일보 1935.9.26. p355

주3) 위의 책 p350, )인용, ‘청전 · 청정 소품전 초일 대성황동아일보 1935.10.2. p355

주4) 위의 책 p350, )인용, ‘청전 · 청정 소품전 대성황리 종료동아일보 1935.10.5. p355

주5) 대구미술100년사(근대편)대구미술협회, 2015 ‘초창기 대구미술의 형성이중희, p47

주6) 격구도: 1938, 비단에 수묵담채, 90.5x87cm 마사박물관 소장.

주7) 대구미술100년사(근대편)대구미술협회, 2015 ‘초창기 대구미술의 형성이중희, p50

주8) 위의 책 p48 ‘격구도도판 해설, 이중희

주9) 위의 책, p49, ‘사계산수도도판 해설. 이중희

주10) 현은미가 쓴 조선독립의 물꼬 튼 영원한 민족주의자 이여성에는 이여성의 딸 이미생 씨가 1960년경 귀순한 김일성대학 교수의 증언을 빌어..., [내 이름은 이여성] (3) 남에서도, 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민족적 사회주의자/ 박중엽. 뉴스민 2019.10.8

주11) [조상인의 예()-<24>이쾌대 '해방고지-군상1'] 가슴 벅찬 광복의 기쁨 화폭에...리얼리즘 회화의 진수/ 서울경제, 2017.8.11

주12) 길을 찾아서(32) 포로수용소의 이쾌대와 월북/녹취·집필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한겨레 신문 2018.2.13.)

주13) 신미술가협회:1941.3~1944년 까지 활동.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 서양화가들인 김종찬, 김준, 이중섭, 이쾌대, 문학수, 최재덕, 진환 등이 설립했다. 동경에서 창립전을 가질 때의 명칭은 조선신미술가협회 였으나 이후 경성 화신갤러리에서 전시하면서 개칭했다. 작품경향은 한국적 소재를 통해 유화의 향토화를 추구했다. <제국미술학교>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김종찬, 김준, 이쾌대, 최재덕, 윤자선, 홍일표 등이 그들이다.

주14) 권행가, 한국 근현대 서양화 및 시각문화 연구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242012 하반기, p37

주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미술동맹(朝鮮美術同盟)-집필자 김경연(2012)

주16) 조은정,6.25전쟁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2010, p276, ) 재인용, 김서봉, 하사, 조덕환 미수 기념 화집, 2002, p14

주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쾌대(李快大))-집필자 이구열(1997)

주18) [조상인의 예()-<24>이쾌대 '해방고지-군상1'] 가슴 벅찬 광복의 기쁨 화폭에...리얼리즘 회화의 진수, 서울경제 2017.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