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안동수채화의 또 다른 매력, 수채화가 김인수

즈음 2020. 6. 8. 13:24

영원한 스승 수채화가 김인수

 

 

김인수는 울산 생으로 1948년 5월, <경주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울산농림고>(현 울산공고)에서 미술 강사 생활을 하며 지역문예지 백양에 삽화를 그리는 등 향리에 머무르며 미래를 준비했다. 그 시절 울산의 곳곳을 사생했는데, 당시에 그린 몇 점이 계간미술에 실려 있다. 1952<경주예술학교>동기생이자 지역 선배인 박기태가 먼저 안동으로 떠나고, 김인수는 1956년에 가서야 박기태의 주선으로 <안동사범> 전임강사로 안동 땅에 입성했다. 이로써 손일봉을 사사했던 박기태, 이수창, 김인수 등 수채화를 추구했던 3인방이 모두 안동에 집결함으로써 대구와 같은 수채화 고장이란 명성을 드높일 수 있게 됐다. 이들 3인방에 대해 당시 <경주예술학교> 음악교수였던 박정양 <안동대> 음대교수는 다음과 같이 인물평을 했다고 한다. “장발의 김인수는 노력파이고, 이수창은 세련된 그림을 그렸으며, 박기태는 주먹이 셌다.”

 

김복기 , 「 경주화단 60 년의 발자취 」 , 계간미술 38 호 , 1986 여름호에 실린 그림 (상, 하)

 

 

김인수는 교수 시절 재능이나 애성을 보이는 제자들에게는 어김없이 초등학교 교사로 주저앉지 말 것을 종용했다. 화가의 길을 병행할 수 있는 중등으로의 업그레이드를 요구했으며, 장문의 편지를 보내 다독여 주었던 일은 널리 회자되고 있다. 강순경(1941~), 김종한(1946~), 이택(1946~) 등이 격려를 받았던 제자들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스승이 써준 소개장을 들고 대구의 주경 선생(경북미술학원 운영)을 찾아가 소묘와 인물수채화 등을 체계적으로 지도받았으며, 스승의 바램대로 중등교사로 승격하여 화가로서의 길을 병행했는가 하면, 교육자로서도 명망을 쌓았다. 김인수는 제자들이 참여하는 전시회나 개인전마다 원근을 가리지 않고 참석하여 격려해 주기를 마다 않던 참 스승이었다.

 

김인수는 ’66년부터 ‘76년까지 네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87년에는 동료 이수창의 추천으로 일본 <쯔꾸바(梵波)대학> 초청 개인전을 가졌다. 첫 개인전은 울산 명화랑에서 개최했는데, 그 감회가 특별했으리라는 점은 뒤에 밝히기로 한다. 이후 ‘70년과 ’72년에는 각각 대구공보원과 대구백화점화랑에서, ‘76년에는 대구 고려백화점갤러리에서 개최했다. 3한국미협경북도지회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수채화협회창립회원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수채화작가회에는 1990년 제13회전부터 참여했으나 이듬해 전시회가 마지막이 됐다. ‘91, 홀로 스케치를 나섰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안타깝게도 영면하고 만 까닭이다.

 

 

김인수의 화풍은 묵직한듯 경쾌하다. 투명화법의 기반 위에 불투명한 요소가 자연스럽게 혼용되기 때문이다. 필선을 겹겹이 쌓는 바람에 투명화법인데도 불구하고 불투명화법처럼 느껴진다. 두터우면서도 맑다. 김인수는 <경주미술학교>를 함께 졸업한 박기태, 이수창과 달리 스승 손일봉의 회화관을 가장 융통성 없이 계승한 듯한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이 말은 자신이 정한 회화적 원칙에 충실했던, 말하자면 세필(세부묘사)을 멀리하고 스트로크에 의한 면의 중첩으로만 대상을 묘사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방법론적 강박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가 바라본 대상은 항상 정직했다. 빛이나 느낌을 가공하지 않고 현장의 느낌을 곧이 곧대로 담아냈던 것이다.

 

죽령 76x56cm 1991
만추 76x56cm 1988
강구 55.5x40,5cm 1985
불영계곡 53x38.5cm

김인수는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 등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두루 잘 했지만 특히 탄탄한 소묘력이 뒷받침 된 인물화는 정돈된 필선과 상쾌한 색감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풍경화에서 강하게 둘러쳐지던 윤곽선들은 인물화에 와서는 소묘의 스케치 선처럼 간결해지는 것 또한 김인수만의 화어라 할 수 있다. 김인수의 화풍은 투명수채화임에도 불구하고 유화와 같은 묵직함이 특징이다. 김창락은 그의 화풍을 보수적이라고 평할 수도 있으나, 그 보수성은 수채화의 본령에 그의 작품이 보다 밀착하고 있다는 뜻이며, 그가 무한한 깊이를 획득함으로써 새 경지를 열어나가고 있다는 진단이 된다.’라고 하면서 한국적인 정서가 충만하며, 독자적인 퍼스널리티를 작품 속에 구현하고 있음도 아울러 적시했다.

 

정물
정물

2014, ‘경북수채화협회에서 개최했던 경북수채화의 뿌리와 맥기획전(영주문화예술회관)에는 김인수의 유작 두 점이 초대됐다. 김인수는 평소 학교에서 제자들을 모델로 인물화를 그리는 것을 즐겨했다. 이 그림들 역시 제자인 송정희(‘79학번), 박상환(’80학번)을 그린 작품이었다. 김인수는 특히 인물화에서 자신의 특기를 발휘했다. 박기태의 필선이 거침없이 분방하여 에너지가 넘친다면, 김인수의 필선은 정돈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평소 학생들에게 목탄 데생을 가르칠 때 강조했던 말이 누질러라였다. ‘누질러라라는 말은 가볍게 누르면서 문지르라라는 뜻이다. 김인수의 인물수채 역시 그렇게 누지른듯한 질감을 발견할 수 있다. 투명수채화의 특징 중 하나가 투명하게 번지는 효과에 있지만, 그는 가볍게 현혹하는 일과성 효과를 경계했다. 엄격한 화골(畵骨, 드로잉) 위에, 대상의 본질로 스며드는 색채감각을 제일로 쳤던 것이다. 이처럼 노력파였던 김인수는 결국 자신만의 회화적 멋을 완성하지 못한 채 뜻하지 않게 지상의 소풍을 끝내고 말았다. 이수창과 더불어 안동미술의 1세대로서 재조명되어야 할 작가지만, 그의 사후, 안동지역과 유족과의 연락이 거의 끊어져 버렸다는 것 또한 딜레마가 되고 있다.

 

P군 1986, 종이에 수채, 15.5×24.5cm

 

정희 1981
좌상 76x56cm 1988

젊은 시절, 기차 안에서 옆자리의 사람이 자신을 벙어리로 오인했던 일화도 전한다. 청량리에서 안동 행 열차를 탔던 어느 날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스케치북을 꺼내 크로키를 시작했다. 말없이 몇 시간을 줄곧 그리기에만 집중했는데 그 모습이 신기했던지 하나 둘,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어떤 이가 이 사람이 누군가, 라고 물었다.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아는 체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청년은 벙어리라오.” 이처럼 글쓴이 역시 학창 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기차 역 대합실 등에서 몇 권씩의 크로키 과제를 수행했던 기억이 난다.

 

1979년 안동대학 1기생들과 함께 예술관 계단에서
1990년 한국미협영주지부 창립전에서 축사하는 김인수

김인수가 고향 울산에서 첫 전시를 가지면서 느꼈을 남다른 감회란 다음과 같은 사연 때문이었다. 김인수가 안동에 정착하기 전, 부산에서 문신(1923~1995)이 운영하던 아미서비스센터서 잠시 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안동미협 회장을 지냈던 신동국에 따르면, ‘아미서비스센터란 미군들에게 그림을 그려 팔기 위한 작업장이자 판매소였단다. 신동국은 ’8512월부터 익년 2월까지 문신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했던 전력이 있다. 신동국의 부친이 문신과는 친구 사이로 조각을 전공했던 아들을 조수로 의탁했기 때문이었다. 신동국이 사립학교 공채에 합격해 안동 <성희여고>로 떠나게 되자 문신은 1년만 하고 되돌아오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문신 작업실에서 기숙하며 일하는 동안 신동국은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아미서비스센터에 김인수를 받아들인 일화 역시 그 때 들었던 한 토막이라고 했다. 김인수가 왜 부산에 갈 수밖에 없었는가는 다음의 충격적인 일화 때문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

 

경주의 최용대는 <경주예술학교> 사료 발굴 차 울산의 이수원(경주예술학교 수료)을 찾았다가 대담에는 실패하고, 대신 울산 출신 화가 김상원의 기억을 채록하게 되었다고 한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주예술학교> 졸업 후 고향에 돌아와 있던 김인수는 <경주예술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프락치로 몰려 울산경찰서로 붙들려 갔다. 내일이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는데 때마침 도경찰국장 순시가 예정되어 김인수는 브리핑 준비에 차출이 되었다. 밤새 차트를 제작하는 등 최선을 다해 협력해 주었더니, 서의 간부 한 사람이 혹 다시 붙들리게 되더라도 절대로 자신의 이름을 대지 말라며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경주예술학교>는 남한 최초의 예술학교였으며 좌익학교로 낙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영난으로 한국동란 와중에 폐교가 된 학교였다. 그러나 김인수는 동란 중 군작전과에서 복무를 했으며, 후에 무공훈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미서비스센터에는 제대 후 안동으로 오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경주예술학교> 동기생인 경주의 조희수(1927~ 경주) 역시 이와 비슷한 경우를 당했다고 한다. 조희수는 밀양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4년간 교직에 머물다가 우연히 알게 된 군인의 소개로 1953년 국방부에 근무하게 되면서 서울에 터전을 잡게 되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에 대한 구체적인 기사가 있어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조희수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밀양으로 가 <밀주국민학교>에서 4년간 임시직으로 일했는데.....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 학교는 군병원이 되고 병원장의 추천으로 군복무로 미술관련 업무를 하게 된다. 장교 한 사람이 국방부에 추천해 1953년부터 근무했고, 1956년 국전에 출품한다.” 이처럼 군무원이 되었다는 것은 생계 해결은 물론 자신의 신분에 대한 보증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 통에 종군화가단이 꾸려지자 화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도 다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주)

1) 김복기, 경주화단 60년의 발자취, 계간미술 38, 1986 여름

2) 『울산예총20년사

3) 제자 조광래 회고

4) 주경(朱慶 1905 ~ 1979) 서울 출생. 가와바타미술학교와 도쿄 데이코쿠미술학교 졸업. 대구 계성학교 미술교사, 경주여중 교장, 경북 장학관, 미술협회 초대 경북지부장, 가톨릭미술협회회장, 경북도전 초대작가 역임. 사실주의 작가이지만 18세 나이에 <파란>이나 <생존>과 같은 추상작품을 제작, 한국미술사에 추상화를 첫 시도한 작가로서 평가를 받음. 해방과 더불어 대구에 정착, 경북미술문화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김.

5) 송재진 흔적과 기억-송재진의 영주·경북미술 순례기, 나무아트, 2016

6) 김창락, 한국서양화대관Ⅰ』,미술공론사,1992

7) 선애경, 조희수 화백의 삶과 필생의 화업, 경주신문, 2018.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