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세계 기획 초대전(七旬展)
2017.12.20 ~ 12.27
갤러리 미술세계 제1,2전시장(5,4F)
작품 '안나푸르나 일출'(162.1x259.1cm, Oil on canvas 2017) 앞에서. 신현대, 초대작가 김종한, 송재진
빛이 아니라 볕을 그리는 화가 김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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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은 영주현대미술의 산 증인이자, 순수 토박이 화가이다. 젊은 날, ‘경북도전’이나 ‘국전’을 통해 꾸준히 자신을 단련시켜 나오면서 지역미술의 토대를 세우는데도 열과 성을 다했다. 70년대 중등교사들을 중심으로 지역미술의 초석을 쌓을 때부터 김종한의 이름은 어김없이 호명되어 있었다. ‘90년에는 ‘한국미술협회영주지부’ 초대지부장을 맡아 앞선 머슴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이렇듯 지역미술사의 지난한 과정 속에 김종한의 족적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사립중학교에 투신한 그의 선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영주의 현대미술사는 일천하기 짝이 없다. 명칭으로만 본다면, 영주의 미협사의 연원은 ‘73년에 결성된 ‘영주미술협회’를 소환하게 된다. 70년대는 주로 중등교사들을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미술행사가 개최되던 시기였으며, 향토화단의 태동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60년대 후반 <영광고>에 근무했던 임대일이 ‘영·봉지구미술교사협의회’를 조직하고 ‘70년 경다방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던 것이 성인단체의 효시라고 하겠다. 이때 김종한은 문경의 초등학교에서 초임 근무 중이었다. 임대일 회장의 이직 이후 ‘73년 ‘영주미협’(회장 오상목, 영주종고)이 태동되었으며 삼화다방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 때 창립 맴버로 참여했던 작가들 중 지금까지 지역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작가가 바로 김종한이다. ‘81년 마지막이자 세 번째로 개최했던 전시회 때는 김종한이 회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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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는 <안동교대>출신들의 중등으로의 업그래드가 도미노처럼 일어났던 시기였다. 조광래(‘71)에 이어 류윤형(‘73), 김인선(’74), 김예순(‘78) 등이 그 길에 합류했다. 초등교사 시절 김종한과 마찬가지로 1기 선배인 류윤형은 그림에 전념하지 못하는 좌절감에 술로 시름을 달래는 일이 다반사였다. 안타깝게 지켜보던 후배 김종한이 고등학교준교사검정고시를 제안해 함께 시험을 보게 됐다. 류윤형은 그 해 합격했지만, 정작 선배를 위무하며 이끌었던 김종한은 1차에 는 합격했으나 2차에 낙방하여 다음 해에야 뜻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1차 시험(이론) 경쟁률이 100대1을 상회할 정도로 응시자가 많이 몰렸다고 한다. 2차 실기시험 화제는 ‘우산을 든 여인’으로 4절 수채화였다. 김종한은 풍경수채화에는 숙련되어 있었으나 다뤄본 적이 없던 인물화는 서툰 분야였다. 좌절감을 맛본 이후 김인수 선생으로부터 대구의 주경 선생을 소개받았다. 주경 선생은 김인수 선생의 스승이었던 분이다. 마침내 합격했을 당시 심사위원이자 면접관이었던 류경채 <서울대> 교수는 언제부터 그렸는가, 어디에서 공부를 했는가라는 등 여러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초등교사들이 중등으로의 업그래이드에 올인 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화가의 길을 위한 갈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등교사와 초등교사간 급료차이라는 실질적인 고민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김종한은 <우산중>으로 발령을 받고 한 학기를 근무했지만, ‘75년, 급기야는 지역 사립교인 <대영중학교>로 선회하고 말았다.
‘70년 문경에서 초등교사로 근무할 무렵, 당시 <점촌중학교> 교사였던 신상국과 교유했던 일화는 화가지망생으로서의 결기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신상국이 ‘국전’이나 ‘목우회전’이 개최될 때면 으레 상경하여 새롭게 받아들여졌던 그림들을 편지지에 스케치하여, 전시회에 가보니 이러이러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서로 답장을 주고받으며 화가의 꿈을 키워나갔으니 그 시절의 소박하면서도 간절했던 장면이 한 편의 영상처럼 떠올려 진다. 그러나 초등교사로 그대로 머물고 말았다면 김종한의 현재는 어땠을까. 화가로의 길을 종용했던 분이 바로 <안동교대>시절 스승인 김인수였다. “강순경(안동고 근무)이 중등에 합격했는데 그대도 그 길을 걸으라.”라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와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이것이 ‘중등검정고시’를 뚫고 미술활동이 보다 용이한 중등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된 계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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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은 <영주중> 시절, 본격적으로 그림에 입문했다. 당시 2년 선배로 이두식이 있었다. 이두식은 오세영 선생이 키워냈다면, 김종한을 발탁했던 사람은 ‘61년 오세영 선생 후임으로 부임했던 마진부 선생이었다. 마진부 선생은 <대구사범학교>에서 전근을 왔다. 1학년 때 는 오세영 선생의 유화작품을 처음으로 감상하게 되었고, 마진부 선생으로부터는 체계적으로 수채화를 배웠다. 예나 지금이나 교사의 격려는 학생의 마음에 포부를 얹게 한다. 1964년 <영주중학교>를 졸업한 김종한은 <영광고>로 진학했다. 그곳에서 3학년이던 류윤형과 김판국(시사만화가)을 만났다. 출중했던 선배들의 뒤를 쫒으며 그림에 대한 시야를 넓혀갔다. 당시 시골지역에서 정규대학 출신 미술교사 밑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그런데 <서울대> 조각과 출신의 고영수 선생을 만나게 되는 행운이 찾아왔다. 고영수 선생으로부터 불투명수채화라는 새로운 기법에 대해 눈뜨게 되었는가 하면, 국전 관람과 같은 감상의 기회도 접하게 되었다. 고1 때 교내미술실기대회에서 상급생들을 제치고 최고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다.
이처럼 인정을 받아가며 미술학도로서 고교시절을 보냈으면서도, 진로는 미대가 아닌 교대로 결정됐다. 미대는 돈이 많이 들뿐만 아니라 환쟁이밖에 더 되겠는가라는 편견에서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 시기가 김종한에겐 방황기였다. 안동화가 권영렬의 말마따나 <안동교대>는 안동인재들만의 무덤인 것이 아니라 재능 있는 예술분야 인재들을 우회하게 만든 경유지기도 했다. 교대 시절, 김인수 선생의 과목은 매주 4절 수채화 1점씩을 제출해야만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흡족한 마음에 선생은 김종한에게 미술연구반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김인수 선생은 평소 무뚝뚝하고 괄괄한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속정이 깊은 분이었다. 김종한은 비로소 화가라는 길에 대한 꿈이 자신의 밖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또 한 분 이수창 선생이 있었다. 이수창 선생은 유머가 풍부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으로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어주었다. 이후 40여년 사제지간의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김인수 선생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일찍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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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의 작업실은 시내 자택에도 있고, 뚝 떨어진 시골 순흥에도 있지만 주된 작업장은 ‘바깥’이었다. 미술평론가 신항섭의 말대로 ‘그 자신의 진실한 삶의 표정’을 자연 속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숱한 날들을 ‘바깥’에다 화실을 차렸다. 문득 꼭두새벽에 차를 내달려 멀리 전라도 월출산 아침 풍경을 낚아오기도 했다. 그 바깥이란 ‘현장’을 말한다. 현장이란 어떤 공간을 말하는가.
사생은 현장에 머뭄으로써 풍경을 풍경화로 치환시킨다. 그 머뭄의 단서는 찰나적 인상이다, 사생은 ‘보는 기록’이 아니라 보고 있는 느낌에 충실하려는 태도이다. 인상주의적 사실이라는 오랜 관행이 ‘구상’이라는 확고한 태도를 만들어냈다면, 사생은 그러한 믿음에 대한 실천적 행위라고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현장은 확실히 인상주의적 공간인 셈이다. 현장에 남든, 현장을 담아갔든 그림 속 현장은 비현실일 터다. 특히 현장에서의 작업은 작품의 진행과정 속에서 그림의 시작점은 소멸되고 만다. 현장에서도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릴 뿐인 것이다. 사생은 정서의 리얼리티를 되살리는 일이다. 현장을 찍어온 사진으로 작업할 경우 기억된 찰라를 정돈감 있게 공간적으로 재생시켜 나갈 수 있겠지만, 현장은 과정에 의해 묻혀버릴 수밖에 없는 찰라를 현재적으로 재생하게 해준다. 사진이 일관성을 제공한다면, 현장은 일체감을 공유하는 공간인 것이다.
김종한은 바로 현장에서의 일체감 때문에 붓을 들고 아침을 맞기도 했던 것이다. 김종한의 사생 습관은 멀리는 스승인 이수창, 김인수에 닿아 있지만, 가깝게는 선배이자 동료였던 김인선과 70년대부터 매일 같이 자연 속을 헤집고 다녔던 시절에 닿아있다. 김인선이 영주를 떠난 뒤에도 김종한의 사생활동은 멈춘 적이 없다. 김종한의 현장은 따뜻한 곳이다. 봄날이거나, 한겨울이거나 늘 따뜻한 기운을 화면 위에 담는다. 그런 점에서 김종한은 ‘빛’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볕’을 그리는 작가이다. 그것은 김종한의 성품이기도 하지만, 그가 추구하고 있는 이상이기도 하다. 스승 이수창은 ‘90년 첫 개인전 때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예술론을 빌려 이렇게 격려했다. “인류역사상 동서고금을 통해 명작으로 정평 난 예술작품들의 공통점은 ‘성실성’과 ‘감염성’이라는 것인데, 김종한의 작품태도에서 그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늘 현장에 머무르는 ‘성실성’과 그림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바로 ‘감염성’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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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이 작가로 등단하는 입문과정이라면, 개인전은 전문작가로서 자리매김 되는 기회의 장이라고 김종한은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수업기를 통틀어 ‘경북도전’에서 특선 연 4회, 동상 1회의 수상뿐만 아니라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도 여섯 차례나 입선했다. 떨어졌던 것까지 합치면 그 집념이 상상을 초월한다. 공모전은 그 특성상 80호 이상 대작들을 요구한다. 이는 알찬 수업기를 위한 더할 나위 없는 공부법이기도 했다. 오래 전에 도전 초대작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 국전초대작가제도가 부활하게 되면서 국전초대작가로도 추천됐다. 김종한은 지난 90년 첫 개인전 오픈식 때 겸손한 인사말을 했다. “20여년 유화를 그리다 보니, 비로소 재료에 대해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 말은 자신만의 개성과 특성을 만들어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자 선언의 다름이 아닌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후 2~3년마다 한 번씩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주로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최해오면서 전문작가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1998.2.17 롯데본점 갤러리에서 개인전에서. 좌 박기태, 우 조희수 화백.
김종한이 처음부터 공립을 선택했더라면, 교장 승진이 보다 빨랐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다하더라도 결국에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은 포수가 됐다. 그 한 마리가 ‘직위’였다면, 다른 한 마리는 ‘화업’이었던 것이다. 비록 사립학교에서 20여년의 세월을 보냈던 김종한이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지역미술계의 산증인으로서의 위치 또한 점하게 됐다고도 볼 수 있다. 김종한은 40대 후반 <안동대학교> 연구사로 전직하였고, 마침내 공립학교 교장(영주여고)으로 명예퇴임(2009년2월)까지 하게 되었다. 관운 역시 그의 편이었던 것이다. <영주여고> 초대교장이 한국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손일봉이었으니, 과반세기 만에 김종한이 그 계보를 이었던 것이다. 퇴임 후의 삶이 더욱 기대되고 설렌다고 했던 김종한.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색감으로 세부묘사보다는 단순화와 생략으로 원경의 전체상을 담아내는 풍경화들은 지금도 ‘바깥’에서 완성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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