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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미술기행56 김인선

즈음 2016. 8. 13. 22:10

영주미술기행56

 

한국미협영주지부 창립 공헌자 김인선 화백

 

김인선 화백은 영주에서 중등학교 미술교사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그 때문에 영주사람으로 오인 받았을 정도로 영주에 녹아있던 분이다. ‘74<상주숭덕국민학교>에서 <영주중학교>로 첫 부임한 이래 <부석고>, <풍기중>, <영주여중> 등을 두루 거치면서 14년 동안 영주인을 자처(?)했다. 김인선 화백은 <도교육청>에서조차 영주사람으로 알고 2000년 첫 교장 발령처로 <영주여중>을 배려했을 정도였다. 지역근무 연한이 10년임에도 불구하고 더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영주 시 승격과 그에 따른 시·군 분리, 재통합 등 행정개편에 따른 변수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1987<영주여중> 근무를 마지막으로 영주를 떠난 지 14년 만에 다시 <영주여중> 교장(2002년 효령중고로 전보)으로 되돌아와 2년간을 더 봉직했으니 도합 16년을 영주교육과 인연을 맺었다. 교육자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화가로서도 초창기 영주화단의 태동에 의미 있는 역할을 담당했다. ‘90년 한국미협영주지부 인준 때 대구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창립 맴버로 참여하여 ’914회전까지 작품을 출품했다. 영주시절, 당시 <대영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김종한 화백과 퇴근 후 매일같이 사생을 나가 영주의 사생 전통을 확립시킨 선구자로도 각인되어 있다사생모임에는 안동의 류윤형, 영주의 김예순, 박성락, 김종길 등 안동교대 후배들도 참여하였으나 가장 끈질기게 함께 했던 사람은 김종한과 김인선 화백 두 사람이었다.

 

영주의 유화화풍은 사생에 바탕을 둔 사실화가 지금까지도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두 사람은 영주의 곳곳을 사생하러 다니면서 숱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당시 김인선 화백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김종한 화백은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김종한 화백의 오토바이가 두 사람의 이동수단이 될 수밖에. 주로 풍기, 순흥 지역을 많이 다녔는데 가는 도중 붓을 몽땅 흘려버려 낭패를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럴 때면 후배인 김종한 화백의 붓을 빌려 그렸다고 했다. 김종한 화백과는 달리 김인선 화백은 술을 즐겼다. 소주 한 잔 걸칠 양이면 사생해 온 그림들을 펼쳐놓고 품평회를 겸했다고 한다. 지금은 명맥이 끊긴, 그 시절만의 낭만이자 추억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김인선 화백은 1945년 상주 생이다. 안동교대 2기로, 1기인 류윤형 화백과는 동갑내기다. 그 역시 김종한 화백처럼 중등고시검정을 거쳐 중등교장으로 교직을 마무리한 수순을 밟았다. 중등고시검정은 화가를 갈망했던 초등교사들의 로망이었다. 비록 출발지점은 달랐지만 그림에 대한 의욕과 목표만은 처음부터 화가코스를 밟았던 이들 못지않았다. 90년대 초반까지 대구·경북 지역에서 중등교사들은 화단의 주역이었다. 90년대 미술시장의 활성화로 그때 팔리는작가들이 대거 교직을 이탈하여 전업작가라는 일군을 형성했다. 오로지 작업에만 전념한다는 ‘전업작가들은 자신들만이 프로페셔날이라는 자부심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전업작가로서의 탄탄대로를 걸었던 기간은 의외로 짧았다비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했지만, 그림을 동반자로 삼아 평생의 업을 일구어온 화가들이야말로 일상을 감염시키는 아름다운 바이러스가 아닐까. 현재까지 김화백은 '한유회''대구미협'에서 활동하며 세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경북도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으며, 국전에도 다수 입선했다. 경북미술대전과 대구시전 초대작가이자 대구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사생을 바탕으로 전원을 노래했던 풍경화들은 소박하면서도 진실하다. 거기에는 첨단의 감각과 전위적 수사, 비판적 사고 따위의 피곤함이 존재하지 않는다김인선 화백은 교대가문이 이룩해놓은 질박한 구상화풍의 수호자이며 큰 줄기임에 분명하다. 100세까지 김화백의 그림을 보게 되길 기원한다.       



팔공산   91.0x65.2cm   2015


하얀 해바라기  80F  1986년 한유회 출품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