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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현대미술 약사

즈음 2012. 4. 5. 12:14

 

영주 현대미술 약사

 

영주의 현대미술은 계삼정, 손일봉 선생과 같은 대가들에 의해 발아되었다고 하겠다. 계삼정 선생은 평양출신으로 동란 전 풍기에 정착해 현 금계중학교를 설립했으며, ‘61년 향토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했던 분이다. 손일봉 선생은 경주 출신으로 1952년부터 56년까지 영주여고 초대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영주지역 현대미술의 싹을 틔웠다. 60년대에 들어서는 영주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던 박기태, 영주중학교의 오세영, 영광고의 고영수 선생 등이 이두식, 류윤형, 김종한 등 제자들을 길러내며 영주미술의 초석을 놓았다. 한편 영주시 이산면 출신의 김호걸 선생은 한국누드인물화의 전통을 확립한 화가로 서울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가. 1970년대

 

70년대 후반부터 학생들의 미술대학 진학이 본격화되면서 중ㆍ고등학교마다 미술부가 활성화 되고, 학교연합 고교생동아리인 영주미술학우회가 1976년 결성되면서 학생문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1973년에는 중등교사들을 중심으로 영주미술협회가 결성(회장 오상목)되어 전시회와 함께 학생사생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전시회는 1978년에 가서야 개최되는 등 성인단체의 활동은 여전히 정체된 감이 없지 않았다. 1977년에는 현재까지 가장 오랜 연륜을 지닌 영주서도회가 창립되었다. 

 

나. 1980년대

 

80년대는 향토화단의 형성기라 볼 수 있겠다. 벽두부터 많은 그룹들의 창립이 줄을 이었다. 비록 일찍 해체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다 세분되고 다양한 활동들이 전개되었다. 1980년 4월 영주미술학우회 출신들이 ‘모듬두레’를, 12월에는 풍기에서 안동교대 동문들이 중심이 된 양화모임인 ‘나령회’가 창립됐다. 1981년에는 안동대학 미술학과 재학생들이 모서리회를 만들었고 이듬해인 1982년에는 안동대학총향우회에서 시화전, 음악회, 미술전시회(모서리전) 등으로 종합예술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어 1984년에는 영주미술동우회(현 영주미술작가회)가, 1985년에는 소백한국화회가 창립전을 가졌다. 1987년에는 영주미술협회가 영주ㆍ영풍ㆍ봉화 중등미협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미술협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중등교사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0년 당시 영주군이 영주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었던 영풍군과 함께 봉화군의 교사들(주소지는 영주에 두면서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았음)이 동참했던 것이다. 1988년에는 서양화 모임인 백향회가 창립전을 가졌으나 의욕과는 달리 1회전을 끝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1984년에는 영주시민회관이 준공되어 이듬해부터 센타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영주문화원 주관의 소백문화제가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 전반적으로 80년대는 많은 단체의 결성과 함께 개인전시도 여러 차례 개최되는 등 지역예술인들의 다각적인 노력이 돋보인 시기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한편 지역문화를 대표하던 학생동아리활동들은 학교별 종합예술제로 흡수되면서 동력을 상실해 갔다.

 

다. 1990년대

 

90년대에 들어서 주목할 일은 한국미협지부(`90년)와 예총지부(`93년) 인준을 꼽을 수 있겠다. 당시 미협지부 설립은 지역미술발전의 초석이 될 거라는 기대감 속에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추진된 결과였다. 재향작가 김종한이 초대지부장으로 추대되었고 `90년 6월 29일 창립전을 개최했다. 또 90년대는 개인전시회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시기인데 정주작가 외에도 출신작가나 타지작가들의 개인전도 자주 개최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역작가들의 나들이 전시회도 활발해 졌으며 특히 영주미술작가회 소속 재외 작가들의 개인전 활동은 주목할 만했다.  한편 아마추어 단체의 창립도 이어졌는데 1990년 사군자동호회를 시작으로, 1991년 한그리메, 1992년 예우회, 2000년에는 미사모(미술을 사랑하는 모임)가 풍기문화의 집에서 소백문화제 초대전을 통해 데뷔했다. 1999년에는 안동대학을 졸업한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진사조공’(진지한 사색의 조형 공간) 창립전이 개최됐다. 그밖에도 1993년 12월, 소백한화회가 제작한 대형벽화(영주여객)와 1999년 미협에서 제작한 시민회관 벽화 ’예향의 노래‘는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좋은 예로 평가된다.

 

라. 2000년대

 

2000년대는 지역화단의 성립기라고 보겠다. 2004년 도단위학생실기대회인 ‘선비정신 함양을 위한 도학생그리기대회’가 미협주관으로 실시됐고, 2006년에는 제33회 경상북도미술대전과 서예대전이 체육관에서 개최됐다. 한편 중앙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직선제의 영향으로 영주미협에도 2007년과 2010년 경선을 통해 지부장을 선출했다. 또 다양한 층위의 개인전들이 대내외적으로 확산되면서 쟝르도 유화, 수채화, 서예, 조각 등 평면과 입체가 망라되었으며 내용 또한 자연주의적 풍경에서부터 설치나 현대적 감각의 오브제회화에 이르기까지 다변화 되었다. 새로운 단체의 창립 역시 계속되었는데, 2003년 묵연회가 창립전을 열었고, 2005년에는 구 영은초등학교에 둥지를 튼 작가들이 영은회 창립전을, 2009년엔 그룹 나비(회장 이석희)가 날개바람을 일으켰다. 그룹나비는 안동, 영주에서 활동하는 작가들로 평면, 입체를 불문, 형식의 틀보다는 열린 사고를 공유한다는 취지를 내걸었다. 또 처음으로 고등학교 동문전도 개최되었다. 1975년에 개교하여 명문고의 길을 걷다가 2001년 현재의 영주제일고등학교와의 통합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중앙고등학교 동문전인데, 첫 전시회의 타이틀이 ‘forget me not!'이었다.

 

마. 2010년대

 

2010년 3월, ‘향기로 가득한 민화/일상의 관조’전이 개최됐다. 이는 향토의 대표기업 소디프신소재(현 OCI 머티리얼즈)의 기업과 사회 간의 문화나눔이라는 의미를 담은 행사였다. 동년 5월에는 열린공예사랑전이, 6월에는 공예분야의 다양성을 소개하기 위해 창립된 ‘크라페 영주’가 “동화를 만나다”라는 타이틀로 창립전을 개최했다. 80년대의 ‘미술동인 경북선’처럼 경북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남수채화작가회도 각 지역을 순회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2006년, 영주지역 사상 첫 국제전(영주미술작가회-파리작가 교류전)이 영주미술작가회에 의해 개최되었다. 파리 1대학에서 조형예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김은주 회원에 의해 세계적 명성을 지닌 프랑스 작가 9명의 작품을 초빙했던 것이다. 2009년에는 25주년을 맞은 영주미술작가회가 ‘열린 시각과 소통의 지역미술’이라는 타이틀의 기념전을 통해 자료집 형식의 도록을 발간했고 전시회 외에도 체험마당과 미술세미나 등을 개최했다. '알록달록 색채야 놀자‘는 어린이들을  위한 체험마당으로 이민자 고문이 주도했는데, 원래 하루 동안 시행하려던 것이 뜻밖의 성원에 힘입어 전시기간 내내 실시되기도 했다. ‘한국 미술시장의 현황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현대미술경영연구소 박정수 소장이 강연한 미술세미나 역시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2010년은 20주년을 맞은 미협이 ‘미협 20년, 지역을 발언하다’라는 기획전을 통해 ‘영주현대미술 50년사’라는 논단과 더불어 도록의 파격적인 표지 디자인을 선보였다. 개막행사를 휘호퍼포먼스(서예가 김동진)로 대신했으며, 전시기간 동안 아트상품전, 공예체험 한마당 등부대행사를 병행했다. 전시회를 1, 2부로 나누게 된 것은 지역시설인프라의 한계점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것이다. 2011년에는 ‘동서지역미술의 차이와 공감’이라는 타이틀로 자매도시인 전라남도 목포시와의 미술교류전이 영주에서 첫 테이프를 끊었다.  또  영주공예가협회의 10주년 전시회가 개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