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문화예술회관 철쭉갤러리 앞에서. 조광래 경북수채화협회 고문, 최한규 경주수채화협회 회장, 이종원 제천 수채화작가, 홍병우 구미수채화협회 전회장, 김상용 대한민국수채화작가협회대구지회장, 장개원 경산작가대표, 최도성 예천예총회장, 이동건 포항수채화협회 회장 등 참석
최도성 예천예총 회장과 송재진 경북수채화협회 회장
이종원 작가
이주학 대표 헤렌드붓 홍보코너 설치
경북수채화의 뿌리와 맥
경북수채화협회 회장 송재진
1
경북수채화는 대구·경북이 한 울타리였던 시대를 거슬러보더라도 손일봉*이라는 뿌리에 다다르게 됨을 알 수 있다. 손일봉은 일본에서 귀국한 1946년, <경주예술학교>* 초대교장으로 부임하여, 이수창, 박기태, 김인수 등을 1회 졸업생으로 배출하게 된다. 이들은 수채화뿐만 아니라 경북미술 2세대 작가군으로 경북 각지에 서양미술을 전파해 나갔다. 손일봉 역시 1971년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교수로 초빙되기 전까지 대구·경북의 여러 지역에서 중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정년퇴임 때까지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이렇듯 <경주예술학교>를 정점으로 하는 주맥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시대 <대구사범학교> 심상과를 나온 일군의 작가들 또한 경북미술(수채화)의 선구자로서 한 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경북미술(수채화)의 역사를 1930년대까지 끌어올리게 한 선각자 그룹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바로 금경연, 권진호, 김수명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 금경연과 권진호는 30대의 나이로 요절을 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들이 주로 수채화에 집중했던 이유로는 우리의 전통서화를 가장 닮은 장르로 이해하여 친근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이들의 작품 속에는 수묵화풍의 기법과 그에 따른 고졸성이 한 특징을 이룬다.
<대구사범학교>는 일본인 교수의 지도하에 미술수업을 받은 학생들이 일선학교 교육자 겸 서양화가로 배출되는 요람이기도 했다. 4기 졸업생인 금경연은 영양출신으로 1938년 안동으로 초임 발령을 받은 뒤, 경산, 경주, 영양 등지로 임지를 옮겨 다니며 교육자와 화가의 길을 병행해나갔으며, 권진호는 영주출신으로 심상과 1년 수료 후 곧바로 향리지역으로 발령(1936년)을 받게 됨으로써 대구화단에서 잊혀지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두 분 다 30대의 나이로 요절하는 비운을 맞으면서, 경북북부지역에서 <경주예술학교> 출신들과의 상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2014년 ‘경북수채화협회’에서 ‘경북수채화의 뿌리와 맥’이라는 기획전을 통해 유작들로나마 상면을 이루게 해 준 점은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으나 의미를 둘 수 있는 행사였다고 하겠다.
1927년 한국 최초의 수채화개인전을 열었던 대구의 서동진과 이인성으로 이어지는 수채화 계보가 한국수채화의 출발선상이라고 볼 때, 경북의 수채화전통 역시 한국근대미술의 시작과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대로 양화도입기에 수채화가 각광받았던 것은 우리의 전통회화를 가장 닮은 장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우리의 정서에 쉽게 수용되었던 서양의 수채화가 실은 동양산수화에 자극을 받아 태어났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아돌프 라이히바인의 ‘중국과 유럽 : 18세기에 있어 지적 및 예술적 접촉’이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수채화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감정에 부합하여 풍경을 새롭게 묘사하기 위해 태어났다. 더욱이 이 매체를 사용한 최초의 수채화가가 영국인 존 로버트 코즌(1752~1797)이라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이 화가의 풍경화 채색법이 중국미술을 빼닮았음은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코즌은 갈색과 회색을 기조색으로 삼고 빛 효과를 내기 위해 청색과 적색 터치를 주었으며, 먹으로 윤곽처리를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다른 색과 마찬가지로, 먹을 펜이 아니라 붓으로 착색시켜, 심지어 세부묘사에서조차 중국 산수화 수법에 걸맞는 화법을 발전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상주의의 선구자 터너 역시 자신이 선보인 톤이 동양의 수묵톤과 동양화론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이며, 영국의 위대한 풍경화가 게인스보로도 후기 작품 속에서 동양의 영향을 짙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수묵화와 서양의 수채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드로잉이 전제된 것이 수묵화라면 페인팅이 전제된 회화가 수채화이기 때문이다. 수묵화는 채색을 가미하더라도 수묵의 기본은 훼손되지 않지만, 수채화는 모노톤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수묵의 정신과는 그 지향점이 다르다. 물성에 대한 실용의지나 합리성을 화면 위에 적용시키려는 의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색채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드로잉이라면, 수채화에서의 드로잉은 역설적이게도 색채로부터 출발한다. 색면과 색면을 이어주는 악센트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분해된 면처럼 흩어져서 존재하다가도 색채 위를 날렵하게 떠다니며 형상을 조율해 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묵화의 정신과도 일통한다고 보겠다. 한편, 이수창(1929~2013), 박기태(1927~2013), 김인수(1930~1991) 등에 의해 안동지역에 전파되었던 수채예술은 손일봉 선생의 화풍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수채라는 재료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 유채화의 두터움에 뒤지지 않는 화풍을 창출해 왔다. 강한 필선과 투명 · 불투명을 가리지 않는 독특한 필력중심 화풍은 경북 북부권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며, 이러한 화풍은 조광래 ‘경북수채화협회’ 고문 등 몇몇 작가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수채화는 동·서양화의 특징을 수렴하면서 다양한 화풍들을 진작시켜 나왔다고 하겠다. 수회(水繪)라는 큰 틀에서 보면, 수채화는 글로벌 회화로서의 비전과 보편성을 갖춘 이미 세계적으로 정착된 양식인 것이다.
이제 경북수채화 화단은 그 뿌리와 맥을 온전히 이해하고, 온고지신의 자세로 붓을 의미있게 벼루어야 할 시점에 왔다고 하겠다. 지금부터는 경북수채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본고의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2
손일봉(孫一峰 1907~1985)
경주 월성출신이며, 1928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재학시절인 1925년~1928년 사이 선전(鮮展)에 입선 1회, 특선 3회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거두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우에노미술학교(上野美術學校)>를 1934년 졸업했다. 역시 재학기인 1928년~1931년 사이 일본 제전(帝展)에 4회 입선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북해도(北海道)에서 10여 년 간 교편을 잡았다. 이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기록이던 제전 연 입선의 비범한 신예작가로 주목을 받는 가운데 1934년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였던 손일봉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변방인 북해도로 가서 미술교사 생활로 안주하며 일본에 계속 머무르게 됨으로써 작가적인 자기도약의 정체는 물론, 서울의 민족미술계와의 유대도 필연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책으로 귀결되게 하였다.”고 평했다. 또 세종대학교 김창락 교수는 “귀국 후 한 때는 지난날의 선전과 제전 등에서의 활약으로 인하여 친일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화단에서 다소 소외된 입장에서 지나게 되었다.”라며 손일봉이 귀국을 늦춘 것에 대한 아쉬움을 에둘러 서술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귀국 후 작가의 길을 걷기보다 지방에 머무르며 교육자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것이 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사료된다. 손일봉은 1946년 <경주예술학교> 교장을 비롯, 1971년 정년퇴직 때까지 경북 각지에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다가 그해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1971~1974)로 부임하면서부터 작가로서의 본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정적인 아카데미즘과 왜곡된 인상주의가 서양화 수용기 우리의 화단을 누비고 있을 때 손일봉은 그러한 범주를 뛰어넘어 세잔의 새로운 조형방법을 연구했던 작가로서의 치열함을 단숨에 회복해 갔던 것이다. 경북대학교 박남희교수는 손일봉의 공직생활 시기를 2기로 분류하며, 이 시기를 붓을 꺾고 공직생활에만 몰두했던 예술적 공백기가 아님을 강조했다.
서울로 올라간 뒤, 1974년 뒤늦게 국전 초대작가가 되었으며, 1975년에는 ‘신미술회’ 창립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1985년 <조선화랑>에서 열린 「신미술회소품전」전시 중 타계했다. 작고하기 전까지의 15년이 손일봉을 한국화단의 거목으로 각인시켜 준 후반기 삶이라고 하겠다. 손일봉은 화우나 후배들에게 “北海道 이후 30년 헛되었던 세월을 어찌 되찾겠느냐”고 마음 속 회환을 자주 토로했었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예술적 자기회복에 대한 의지와 다짐이 얼마나 절실하게 그를 사로잡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김창락 세종대학교 교수는 신세계미술관이 기획했던 유작전 서문에서 선생의 예술세계를 다음과 같이 몇 마디 말로 정의했다. “평범한 주변의 소재를 완벽한 기초 위에서 탁월한 심미안과 확실한 표현방법으로 강한 실재감을 주는 그림이다.” 평론가 이경성은 “그의 회화작품의 특징은 인물이나 정물, 풍경 등 구체적인 대상물을 선택하여 그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묘사의 범위를 최대한 축약시켜 빠르고 큰 붓으로 작업하는 데에 있다.”라고 평했다.
2014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기획한 ‘영남의 구상미술’전은 손일봉이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현장을 기록했던 그림 다수가 처음으로 전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시를 기획했던 박경숙 학예사는 “이번 전시의 백미는 유일하게 지역출신 종군화가로 활동하였던 손일봉의 1951년 포항 ‘형산강 전투’를 기록한 작품과 ‘병사들의 드로잉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굴곡진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작품으로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전쟁기록화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우리 근대미술사에서 자료의 공백 상태로 남겨진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라고 서문에 쓰고 있다. ‘형산강 전투’(1951. 33.5x50cm, 재생지 위에 수채)는 속필로 그린 수채화지만, 포탄이 떨어지는 물기둥 사이로 상륙작전을 펼치는 국군의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펜과 연필, 담채로 그린 ‘병사 시리즈’ 4점 역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과 수류탄을 던지는 자세, 총을 맨 병사 등 다양한 상황을 정확한 데생력을 바탕으로 그린 소묘들이다.
권진호(權鎭浩 1915~1951)
영주시 부석면 출신이다. <대구공립농림학교>(5년제, 1935년 졸업)와 <대구사범학교>(1936년 심상과 1년 수료)를 거쳐 교육자로의 길을 걷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936년 <부석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1945년 해방 직후 교장으로 승진했다. 1951년 <옥대초등학교> 교장 재직 중 36세라는 젊은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교육자 겸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방학이 되면, 한 달 내내 화구를 싸들고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고 하니 작가의 작품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대구농림 졸업반 때(1934년) 제13회 선전(鮮展)에 수채화 「계림의 조춘」을 출품, 영양 출신의 금경연, 대구 출신의 김용조, 최화수 등과 함께 첫 입선을 했다는 것이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그 후 교육자로 봉직하는 동안에도 1939년 선전에 「소한(小閑)」이, 1940년 19회 선전에서 「손거울」이 연거푸 입선되는 저력을 발휘했다. 권진호의 발굴은 영주지역의 현대미술사를 근대기까지 소급시킨 의미도 있지만, 경북미술을 선도했던 선각자로서도 그 의의가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유화 대작들도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데, 특히 「엿장수」(1944년 작)와 한복을 입은「소녀」(1942년 작)는 수작으로 꼽힌다. 「소녀」는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다. 이 그림들을 바라보면 한 시대의 리얼리티와 마주하고 있다는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미술평론가 오광수에 의하면, 30년대는 향토적 소재가 특히 만연하던 시대였다고 한다. 향토적 소재로서 소녀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한복에 기인된 것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건너와 많은 풍속적 단면을 그렸던 영국인 엘리자베스 키스가 남기고 있는 작품 가운데도 특히 한복의 우아함에 매료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 권진호 역시 그러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에서 40년대에 걸쳐 그려진 작품들 중 향토적 소재로서의 소녀가 대상이 되고 있는 예로 이영일의 「시골 소녀」, 정현웅의 「소녀」, 김종태의 「노란 저고리」, 오지호의 「시골 소녀」, 김기창의 「가을」, 전찬영의 「소녀」, 심형구의 「물가」, 장욱진의 「소녀」, 김세용의 「소녀」 등과 함께 꼽은 것이다. <대구문화예술회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채화 ‘거리 풍경’은 1930년 15세 때 그린 것으로, 굵은 붓터치로 투명수채의 맛을 잘 살린 그림이다. 작가의 알려진 그림으로는 가장 오랜 것으로, 기본기가 탄탄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림 속에는 한복을 입은 조선소녀와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상가마다 걸려있는 태극기는 해방 후 가필한 흔적으로 보고 있다. 수채화를 그린 종이 중에 어떤 것은 대학시절 필자 또한 자주 사용했던 자보루지여서 흥미롭다. 요즘엔 찾아보기 힘든 마분지의 일종인데 한 면에 붉은 색을 먹여 놓아 자보루지라고 불렀다. 불투명기법에 잘 먹히는 재질인데 막지인데도 불구하고 중성지라 안동의 원로 화가들이 애용하던 화지기도 했다.
금경연(琴經淵 1915∼1948)
영양군 수비면 출신으로 대구사범 재학 중인 1934년 제13회 선전에서 ‘양파와 능금’으로 첫 입선한 후 제14회 때 ‘시가지’로, 제17회 때는 ‘신록의 계절’로 입선했다. 제18회 선전(1939년)에서는 안동성소병원 건물을 소재로 그린 ‘붉은 건물’로 특선을 받았으며 이것을 기점으로 뚜렷한 형상파악과 강렬한 색채구사로 야수파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미술평론가 권원순) 금경연이 선전에 출품했던 작품들 모두가 수채화였던 것은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대부분의 작가들이 수채화를 그렸던 데에 기인한다. 또한 수채화에 열중했던 것은 <대구사범학교> 일본인 미술교사의 교육과 무관치 않으며 국내 최초로 수채화개인전을 열었던 서동진과 박명조의 수채화개인전에서도 영향을 받은 바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9회 때는 ‘庭’, ‘慶山(붉은 집의 풍경)’ 등 2점이 동시에 입선하기도 했다. 이미 초기 작품부터 과감한 선묘와 표현주의적 성향이 나타나는 것은 권원순이 지적한대로 사범학교 시절 익혔던 화풍 때문이었다. 일본화단의 거장이자 ‘이과회’(二科會) 화가들인 야수이 소오타로(安井 太郞 1888~1955)와 우메하라 류우자부로(梅原 龍三郞 1888~1986)의 작품을 모델로 삼았던 데서 잘 알 수 있다. 이들은 일본 화단에서 아카데믹한 화풍이 아닌 반관전의 기치를 내건 ‘이과회’의 맴버들이었으며, 그들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금경연 외에도 김수명, 강홍철 등 사범학교 출신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금경연은 1938년 <안동중앙공립보통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았다. 그 때 안동성소병원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이 바로 이듬해 ‘선전’에서 특선을 하게 되는 ‘붉은 건물’이다. 1939년 경산 <하주공립보통학교(현 하양초)>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대구의 ‘향토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향토회’는 대구미술은 물론 한국근대 서양화의 선구적인 단체로 이인성, 박명조, 김용조, 최화수, 김병기, 장점복 등이 참여했던 역사적인 단체였다. 1940년 경주로 발령받아, <계림공립보통학교>와 <경주중학교> 미술교사를 겸임하며 경주미술 발전에 헌신하였다. 1942년 ‘경주향토미술협회’ 결성에 앞장섰으며, 1943년 ‘제1회 경주향토미술전람회’ 출품 및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1945년, 29세 때 고향인 영양의 <입암공립보통학교>교감으로 발령받았으며, 이어 교장으로 승진했다. 해방 후인 1946년, <수비공립보통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 과로로 얻은 폐결핵으로 1948년 4월11일 33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작고했다. 1993년, 전국 최초로 고향인 수비면에 화가비가 세워졌으며, 2003년에는 후손인 금태남에 의해 ‘금경연기념관’이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뛰어난 화가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유족이 제시하고 있는 작품은 4점인데, 이중 1940년대에 그린 수채화「여름정원」(66.5x44cm)과 연대미상의 유화「경산 가로수 풍경」(44x66.5cm)등 2점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금경연화백기념관>에서 보관하고 있는「약천정」(27.3x34.8cm)과 「경주안압지풍경」은 종이의 앞뒷면에 그린 양면화이다. 2008년 11월, ‘대구 미술 작고 작가 4人展’이 <수성아트피아>에서 개최된 적이 있으며, 2014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도 영남구상의 뿌리를 찾기 위한 '영남의 구상미술'전을 통해 금경연의 예술세계를 조명하기도 했다.
김수명(金壽命 1919~1983)
김수명의 호는 소봉(素峰)이며 칠곡군 왜관 출신이다. 1934년 <대구사범학교> 심상과에 입학, 1939년 6회로 졸업했다. 재학 중 17회 ‘선전’(1938년)에 입선했으며, 졸업 후에도 1940년부터 3년 연속 입선하는 등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해방 후에는 1952년 제1회 ‘국전’ 입선을 시작으로 1962년까지 총 4회의 입선 경력을 쌓았다. 졸업하던 해인 1939년 <김천남산정심상소학교>와 <김천고등여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하면서 김천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1940년, 첫 개인전을 김천상무관에서 개최하는 등 김천 현대미술의 1세대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김수명은 유화뿐만 아니라 수채화에도 독자적인 경지를 이룬 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경북대 사범대 국문과를 졸업한 다방면의 재능을 갖춘 예술인이기도 했다. 김천에서 오래도록 후진양성과 창작활동을 해왔던 김수명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김천미술인들 중에는 문학을 겸비한 작가들이 많다. <김천문화원>의 전신인 <김천문화의집>에 1953년 미술반을 개설하여 미술 분야가 대중화되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1956년에는 김천문화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57년 <대구상고> 교사로 발령받아 대구로 옮겨간 뒤, 1962년부터는 <대구교육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하여 작고할 때까지 재직했다. 1967년 ‘자유미협’ 창립전(경북공보관)과 1978년 누드화를 추구하는 ‘나상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카톨릭미협’에도 1회부터 9회까지 출품했다. 1993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기획한 유작전에서 정점식 계명대 명예교수는 “저 어려운 시대적인 상황을 체내에서 연소시키고 겉으로는 무사무난하게 보이는 낙천주의”를 거론하며, 그러한 태도가 김수명이 훌륭한 예술가임과 동시에 존경받는 스승이 된 동인이라고 평가했다. 해방 이후 근·현대 과도기 미술의 특징을 간직한 작가로 평가받으며, 2011년 ‘작고작가발굴전’(대구문화예술회관기획)을 통해 다시 한 번 김수명의 예술세계가 조명되기도 했다. 1939년에서 1978년 사이에 제작된 유화, 수채화 수묵화 등 미발표된 작품 50 여점이 전시되었는데, 그 중 20점의 수채화작품은 1939~40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미술평론가 김영동은 김수명 화론에서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에 제작된 김수명의 수채화에는 수묵화적인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는 전통서화에 익숙했던 정서가 남아있었던 까닭이라고 보여진다.”고 평했다.
박기태(朴基台 1927~2013)
울산 출신으로, 19세 때 <경주예술학교>에서 손일봉으로부터 처음 수채화를 배웠다. 졸업 후 안동과 영주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교사로 재직하다 전업작가가 되기 위해 교직을 포기하고 상경했다. 1967년부터 1981년까지 수채화 작품으로 국전에서 10차례의 입선과 두 차례의 특선(1973, 1976)을 했다. 처음 국전에 출품할 때 유일한 수채화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배가된다. 1979년 ‘한국수채화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국내외 여러 수채화단체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경북수채화협회’에는 1998년 창립 때부터 고문으로 참여했다. 박기태 수채화의 특징은 ‘일필’과 ‘여백’이다. 주된 소재는 인물이며, 탄탄한 소묘력을 바탕으로 연필 스케치 없이 바로 그려나간다. 이러한 필력의 변화무쌍함은 정적인 포즈를 취한 인물에게서 이 자세를 취하기 직전의 움직임마저 포착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한 번에 그어버리는 일필의 흐름은 여백으로 남겨지기도 하고, 서로 뭉개진 흐름들은 면처럼 넓게 자리잡아 배경이 되기도 한다. 2001년 상화랑에서 개최했던 전시회가 화가의 전성기 때의 작품들을 집대성했던 개인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큐레이터 신혜영은 “선생의 작품 특징 중 여느 수채화와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시원스레 여백을 남기면서도 짙은 색상의 면을 칠할 때는 단번에 그어버린다는 데 있다. 색면으로 묘사된 공간이며 인체의 머리칼이며 의복 등은 그어버린다는 표현에 알맞게 순간적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기법은 이미 완숙한 소묘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작품의 성실도가 매우 떨어져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평했다. 화가가 즐겨 그렸던 모델은 주로 젊은 여성들이었는데, 2000년대 초반, 포항에 낙향한 이후 인물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던 것과 무관치 않다. 친구인 이수창 화백의 농담이 뼈있는 웃음을 준다. “이 사람의 호가 해암(海巖)인데, 조개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바위가 해암이 아닌가.”
이수창(李洙昌 1929~2013)
의성 출신으로 1951년 <경주예술학교>를 1회로 졸업했다. 젊은 시절, 스승인 손일봉의 회화론을 충실히 계승하여, 박기태와 함께 사생을 다니는 등 화가로서의 기량을 닦았다. 1954년 <안동사범학교> 교사로 교직에 첫발을 내디뎠으며, 1962년 사범학교가 폐교될 때 <경북고등학교>로 잠시 전임했다가 1965년 <안동교육대학>설립 때 교수로 부임하여 이후 <안동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개인전은 공식적으로 5회 개최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81년부터 2년간의 일본 <쯔꾸바(梵波)대학> 교환교수 시절 다섯 달 간격으로 다섯 차례나 개인전을 개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 기간이 이수창에게 있어 가장 화가다운 시간이었으며, 전 생애를 걸쳐 가장 왕성하게 작품을 제작했던 시기였다고 하겠다. 안동미술 1세대로 지역화단의 토대를 만든 주인공이며, 수채화 예술의 전파에도 힘을 기울여 1998년 ‘경북수채화협회’의 전신인 ‘영남수채화작가회’ 고문을 맡아 창립을 이끌기도 했다. ‘한국수채화작가회’ 창립회원으로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대한민국수채화대전’ 심사위원을 엮임 했다. 화풍은 투명과 불투명을 넘나드는 묵직함이 특징이며, 이러한 필력중심 화풍은 경북 북부권에서만 계승되고 있는 독특함이다. 특히 중성 톤의 색감, 닦아내기 기법, 리드미컬한 윤곽선의 설정 등은 이수창만의 화어이다. 그렇다고 대상의 실재감이 필선에 의해 훼손되는 법도 없다. 물결은 몇 개의 둔탁한 선으로 결정되고, 물빛은 발랄해진다. 역광에 의해 실루엣이 된 산과 전경의 표정들이 이야기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시라기보다는 시 형식의 산문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노년기에 제작했던 안동 도산면 가송리 풍경인 ‘녀던길’시리즈는 수채풍경의 백미로 꼽힌다. 서성록 교수는 이수창 화론에서 그림에 기조를 이루는 요소들, 즉 부분보다는 전체에 강조점을 찍거나 세기(細技)를 배척하는 것에 대해 진경성의 추구라고 보았으며, 서양화의 기본 틀로서의 사실성이 정도를 벗어나 있다는 점까지도 서양화를 동양화의 수법으로 해소하는 것으로 보았다. 작가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사실의 진실성’이 아니라 ‘자연의 진실성’ 즉 ‘진경성(眞景性)’의 추구였던 것이다.
김인수(金仁洙 1930~1991)
울산 출신이며, 박기태와는 동향의 후배가 된다. 박기태, 이수창 등과 <경주예술학교>를 1회로 졸업했으며, 이후 <서라벌예술대학>과 <계명대학교>대학원을 졸업했다. 1950년대 초반 안동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다 1966년, 이수창에 뒤이어 <안동교육대학>으로 전임했다. 1979년, 4년제 국립대학으로 승격하여 <안동대학교>교수로 재직 하던 중 1991년, 홀로 스케치를 나섰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영면했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 3회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1987년에는 일본 <쯔꾸바(梵波)대학> 초청 개인전을 가졌다. 제2대 ‘한국미협경북도지회’ 회장을 엮임 했으며, ‘한국수채화협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 등 여러 소재를 두루 즐겨 그렸는데, 특히 탄탄한 소묘력을 바탕으로 한 인물화는 정돈된 필선과 중후한 색감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투명수채화임에도 불구하고, 유화와 같은 묵직함이 특장이다.
주)
1) 손일봉(1906~1985): 경주 출생. 1928년 경성사범 졸업. 1925∼28년 선전 입선 1회와 특선 3회, 1928∼31년 일본 제전 입선, 1932년 광풍회 F씨상 수상, 1934년 동경 우에노미술학교 졸업, 북해도에서 10여년 교직. 1946년 귀국. 경주, 대구, 영주, 문경 등에서 중등학교 교직. 1971∼74년 수도여사대 회화과 교수, 1975년 국전 초대작가. 4년간의 서울 생활을 청산, 대구에서 말년까지 활동. 1979년 한유회 창립회장.
2) 경주예술학교; 1946. 4월 남한 최초로 예술학교 개교. 초대교장 손일봉, 강사진; 김만술(조각), 김준식, 주경, 윤경렬, 최기석, 김영일, 손수택, 박봉수(한국화) 등 지역작가와 이응로(동양화), 배운성, 한상억(서양화), 윤승욱(조각), 김영기(동양사) 등이 강사로 참여. 1951년 미술과 제1회 졸업생 배출; 김인수, 박기태, 박재호, 박해룡, 배원복, 사공침, 이수창, 정상진, 조남표, 조희수, 최동수 등
3) 대구사범학교(경북대 사범대 전신)는 일제시대, 전국 각지에서 최고의 수재가 모이는 학교였다. 면내 소학교 전체에서 1, 2등을 해야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졸업하면 당시 ‘엘리트’ 직업인 교사직이 보장되는데다 5년간 학비가 전액 면제되기 때문에 빈곤층이 절대다수였던 조선인들의 입학경쟁이 치열했다는 것이다. 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사범학교에서 5년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소학교로 발령받아 훈도(訓導·현재의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심상과’의 ‘심상(尋常)’이란 ‘보통’이란 뜻이다.-신동아(2004.9.1 통권 540호 글: 허만섭 기자)
4) ‘경북수채화의 뿌리와 맥’ : 2014.6.17.~21 영주문화예술회관, 6.24~7.5 예천청소년수련관갤러리. 주최 경북수채화협회(회장 송재진)
5) 동서양 미술의 지평(도서출판 재원. 서성록 p18~20)
6) 조선화랑 청담전시장 개관기념 ‘손일봉유작전’(1991.5.17.~28) ‘만년기에 확연히 재구축된 손일봉 예술’-이구열(미술평론가)
7) 신세계미술관 기획 ‘손일봉화백유작전’(1987.6.16.~25) ‘손일봉 화백 유작전에 부쳐’-김창락(세종대학교 교수)
8) ‘손일봉화백유작전’(1990.3.19.~25 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 ‘생애와 작품세계’-박남희(경북대학교 교수)
박교수는 손화백이 거주 지역에 따라 스스로 세분했던 시기를 크게 3기로 재분류하고, 공직생활을 했던 2기의 작품세계를 세잔 적인 구축적인 구도와 대상의 양괴적 파악에 중점을 둔 시기로 파악했다.
9)『현대미술가인명사전-한국미술가편-/ 이경성(李慶成)』(열화당, 1977)
10) ‘영남의 구상미술’(2014.1.16.~3.23 포항시립미술관) 조명작가 : 서동진, 황술조, 박명조, 주경, 손일봉, 배명학, 서진달, 김용조, 권진호, 금경연, 김수명, 이인성, 이쾌대, 장두건, 김만술, 김준식, 박봉수, 손수택 등.
11) ‘근대기 미술작품 속에 나타난 아이들’-오광수
12) 김영동 ‘근대의 아뜨리에’(한티재, 2011)
13) ‘한국서양화대관’(미술공론사/1991)-권원순(미술평론가)
14) 이과회 : 일본재야미술단. 이과(二科)란 전통적인 서양화의 화풍을 일과(一科)라 하는 데 반해 진취적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 제국미전이 1과 중심으로 운영되는 관전(官展)인 반면, 이과미전은 제국미전과 쌍벽을 이루는 2과 중심의 민전(民展)이었음.
15) 포항시립미술관 세미나 ‘영남구상의 시원과 태동’ 지명토론자 박민영(대구문화예술회관 학예연구사)-‘대구·경북지역의 근대미술에 미친 영향관계; 교육기관, 교사, 정보매체, 교육서, 교류 등’ p19
16) ‘연두빛 정열 금경연화백의 생애와 예술’(예술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2003)-권원순(미술평론가)
17) 문화예술회관 기획 ‘소봉 김수명화백유작전’(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1993.4.27.-5.16)-‘김수명 교수의 인품과 예술’(계명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정점식)
18) ‘제11회 경북수채화협회전’(2014.6.17.~7.5 영주문화예술회관, 예천청소년수련관갤러리) ‘경북 수채화의 뿌리와 맥’-송재진
19) ‘박기태 수채화전’(2001.4.28.~5.7 갤러리 상) ‘진정한 인물 수채화의 회화성’-신혜영(큐레이터)
20) ‘서양화가 이수창’-KBS TV미술관(1992.2.2.)
21) 이수창 화집(ART in KOREA 1994)-‘진경성의 궤적, 이수창 교수의 회화’(서성록 미술평론가)
'art n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미나 '경주, 한국 근현대미술의 중심' (0) | 2015.11.10 |
---|---|
2013 경북도-하남성교류전 (0) | 2015.11.05 |
영주ART2015 (0) | 2015.11.05 |
`영남 구상미술 시원과 태동` 학술세미나 (0) | 2015.11.04 |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0) | 2014.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