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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즈음 2014. 10. 31. 21:09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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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 고문으로부터 영주지역 뿐만 아니라, 경북지역 미술계에 대한 초창기 일화들을 채록할 기회가 있었다. 기술되어 있는 문건이 충분치 않을 때, 이런 대담조차 하지 못했더라면 후대의 역사서술은 참으로 건조체로 일관되어졌으리라. 좀 과장되긴 했어도 이런 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노인이 한 명 죽는 것은, 도서관이 하나 사라지는 것과 같다.” 라는 아프리카 격언일 것이다.

 

2010년, <안동문화예술의전당>이 개관되었을 때 개관 특별전으로 마련된 것이 ‘초예운’전이다. 서성록 교수의 말처럼 척박한 지역에 미술문화를 개척하고 미술밭을 조성한 공로를 기리는 뜻을 담았다. 전시명으로 삼은 ‘艸·埶·云’은 ‘나무를 심는 사람’ 또는 ‘나무 심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藝자를 분해하여 음과 뜻을 풀어놓은 것으로 바로 지역의 ‘원로’미술가들을 지칭했던 것이다. 현재의 경북화단에 ‘경험을 갖춘 사람의 지혜’라는 뜻을 가진 고사 ‘노마지지(老馬之智)’를 기대했다고도 볼 수 있다. 지난 10월에 서울 인사동에 개관한 <갤러리 경북>의 개관전 역시 ‘원로작가 특별전’으로 이를 ‘경북미술’의 화두로 내밀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전통이야말로 경북지역의 유전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이 존경받고 행복한 나라가 선진복지국가의 기본이라는 명제는 카피성 짙은 수사일 뿐이다. 특히 복지예산이 첨예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오히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에 나오는 단편 ‘황혼의 반란’ 같은 내용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게다.”로 끝맺는다.

 

젊은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에서 저자 김난도 교수가 제시한 인생시계를 떠올려 보자.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80으로 잡았을 때, 10년을 3시간 단위로 환산하는 것이다. 50세면 15시, 즉 오후3시가 될 것이며, 60세는 오후6시, 70세는 오후9시가 된다. 9시면 ‘메인 뉴스’ 시간대이며, 술 한 잔 나누며 한창 대화가 무르익어갈 시간대다. 그럼 80세는 끝인가? 평균수명을 80으로 잡았을 때의 ‘가정’일 뿐이다. 현재는 100세 시대다. 82살 먹은 제자를 맞은 98세 스승이 말했다. “참 좋은 나이지”, “좋은 나이야, 아주. 내가 70에 첫 전람회를 하고 80에 파리에 나가 있었어. 80대에 중요한 일이 많았지.” 이 대화의 주인공이 한국미술사의 살아있는 징표라 할 김병기*와 정상화다.

 

또 노년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長壽’다. 예부터 오복 중의 으뜸을 ‘長壽’로 쳤으며, ‘십장생도’는 민화의 주된 소재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평균수명이 40세였으며, 국왕의 평균수명 또한 46세에 불과했으니 장수에 대한 열망은 남녀귀천이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장수를 하려면 우선 건강해야 한다. 일찍이 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나는 인간의 길인 ‘생로병사’ 중 아무나 이를 수 없는 길이 바로 ‘老’임을 깨달았다. 

나이 든다는 것이 ‘멋’이라고 여기는 예술가 중에 만화가 박재동은 “100세까지 개구쟁이! 동심 잃지 않고 싶다.”고 했고, 작가 오정희는 “몸은 메말라가도 마음과 정신의 영토를 확장하는 중”이라고 했다. 디자이너 이상봉은 “화려한 날이 가면 즐거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했으며 배우 나문희는 ”시간이 주는 나이테에 감사하자. 그런 자유로운 마음가짐이 노년기를 황금기로 만들테니.“라고 했다. 우리 지역의 김종한 화백도 오랜 교직생활을 마치면서 오히려 지금부터가 재미있고 더 기대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초대된 작가 모두가 건강하시고, 장수하시며, 좋은 작품 많이 남기시기를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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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 김태균 선생과 이민자 화백은 부부 사이다. 김만용 선영여고 교장이 아들이며, 그 또한 화가이다. 석계 선생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선비 같은 분이다. 몇 해 전 석계 선생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사모님이신 이민자 화백께서 다과상을 내어오셨다. 소파가 맞닿은 팔걸이부분이 편평하고 넓어서 다과상이 앉기에 그만이었다. 뒤늦게 나오신 선생께서 다과상을 보시고는 예가 아니다하시며 얼른 탁자를 치우게 하셨다. 한 쪽 손에는 두툼한 서예도록을 정성스레 싸신 보자기가 들려있었다. 늦게 맞아주신 연유였던 것이다.

<소소제(素宵齊)>는 필자의 작업실 제호이다. 소소제에서 자형과 차를 나누다가 석계 선생에 대한 일화 한 토막을 듣게 되었다. 오래 전 서도회 사무실에서 어떤 제자 한 사람이 아무리해도 안 되니 이제 글씨공부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했다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석계 선생께서 “글씨 쓴 종이가 한 키를 넘겼는데도 안 되면 그때 그만 두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모든 후학들이 깨닫고 뉘우쳐야 할, 죽비가 아닌가.

 

이민자 화백은 홍익대 출신으로 고 이두식 화백의 선배이다. 경북전문대학(유아교육과)에서 오랜 교편을 잡았다. 영주에서의 작품 활동은 ‘영주미술작가회’가 고문으로 모시면서 시작되었다. 한글을 조형화하는 작업의 주된 도구는 붓이 아닌 가위다. 조형적으로는 전통적인 그리기에서 벗어난 오리기라는 수법을 쓰고 있지만, 방법적으로는 전통적인 천연염색에 천착한다. 2009년 제25주년을 맞은 ‘영주미술작가회’의 기획물 ‘색채야 놀자’ 이벤트는 이민자 교수의 아이디어와 열정의 산물이었으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2011년에도 개최되기도 했다.

 

김종한 화백과 문경의 원로화가 신상국 화백 간의 젊은 시절 교유했던 일화는 감동적이다. 김종한 고문이 1970년 문경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신상국 화백은 점촌중 교사였다. 신상국 선생이 국전이나 목우회전이 열릴 때면 으레 상경하여 작품들을 관찰한 뒤 새롭게 느껴졌던 그림들을 편지지에 스케치하여, 목우회에 가보니 이런 그림이 그려져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한다. 서로 답장을 주고받으며 화가의 꿈을 키워나갔으니, 그 시절의 소박하면서도 간절했던 장면이 한 편의 영상처럼 살갑다.

김종한 화백은 영주중 시절, 오세영, 미진부 선생께 사사했다. 특히 마선생은 자신을 미술부로 스카웃했던 분으로 더 각별하다. 고인이 된 이두식 화백이 2년 선배가 된다. 영광고로 진학해서는 2년 선배인 류윤형(고), 만화가 김판국 화백 등을 만났다. 당시 미술교사는 고영수 선생(서울대 조각 전공. 미국이민)으로, 현재 영광여중에 선생이 그린 성화 한 점이 남아있다. 안동교대(4기)를 졸업한 뒤 초등교사(71~72년)로 재직할 때, 안동교대 김인수(고) 교수로부터 “한순경이 중등에 합격했는데 그대도 그 길을 걸으라.”라는 장문의 편지와 함께, 대구의 주경 선생께 보낼 추천서도 동봉해 왔다. 마침내 74년, 10대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중등고시검정에 합격(4기)했다. 실기시험의 화제는 ‘우산을 들고 있는 여인’이었으며, 용지와 재료는 4절 수채화였다. 당시 중등교사와 초등교사의 급료차이가 거의 두 배였으며 화가로서의 겸직이 가능했던 조건이 탐이 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인수 교수께서 김화백의 재능을 아껴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김화백의 진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한 해 전에 합격했던 류윤형선생은 의성 춘상중으로 발령을 받았지만, 김종한 화백은 울릉도로 발령을 받자 고민 끝에 지역에 있는 사립 대영중을 선택했다. 이후, 안동대학교 학예사를 거쳐 공립학교 교장(영주여고)으로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으니 관운 또한 뒤따랐다고 하겠다. 김화백의 화풍은 외광파이다. 즉, 대부분의 작업이 현장사생으로 이루어진다. 교직생활 중에도 전업작가 이상으로 다작을 해왔으며, 지금은 잘 보기 어려운 전통방식의 고추건조물이 있는 풍경은 수많은 풍경화가들 중 김화백이 가장 많이 그린 소재일 것이다. 2013년 경북미술대전 초대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서양화 부문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로 추대되었다.

 

전성진 화백의 호는 火童이다. 전화백의 그림을 보다가 문득 재료나 소재나 모두 물 덤벙이라는 생각에 웃음을 머금는다. 불장난하는 아이라는 호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불장난을 멈추지 않으면서 스스로 소방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화동 형은 지역화단의 여명기에 한국화라는 장르를 불붙게 한 사람이다. 기행에 가까운 언행과 거리낌 없는 작가기질은 조용하기만 하던 지역 미술계에 파문을 던지기에 충분했다. 2000년대 초반, 재직하던 중앙고에서 명예퇴직를 한 뒤, 전업작가로, 자유인으로 분방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작업실은 문수면 무섬마을 인근의 내성천이 내려다보이는 고소에 환하게 숨어있다. 소설가 최대봉 형은 화동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그림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그냥 그의 그림 속의 푸른 소나무 아래에나 일엽편주 떠가는 강가나 그의 붓끝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 옆으로 들어가 ‘그림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금강 송윤환 화백은 영광고 출신으로 고 류윤형 선생과 동기동창이다. 철도에 근무하는 동안, 문인화 분야에 천착하여 ‘경북미술대전’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를 획득했다. 1987년 첫 개인전 이래 서울, 영주, 봉화 등지에서 8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은퇴 뒤에는 이산면 원리에 작업실인 <금강산방>을 지어 주재하면서 작품활동과 후진양성을 병행하고 있으며, 2014년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선정한 문인화 부문‘명인’에 선정됐다. 저서로는 ‘추월만정(2004)’이 있다. 시인 권서각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선비는 한학에 능통하거나 옛 법도에 밝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옛 선비들이 지녔던 선비정신의 핵심을 잃어버리지 아니한 사람”이라면서 그런 사람으로 금강 화백을 지목했다.

 

최광희 화백은 2000년대 초 한국전력영주지점장을 퇴임하면서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영주에 정착, 전업작가로서 인생의 제2막을 열어온 작가이다. 퇴직 후 후반기 삶을 작가로서, 지역미술계의 드러나지 않은 리더로서 열정적인 삶을 개척했던 작가는 현재 영주미협에서 가장 고령이지만, 구순이 넘는 어머니를 지극으로 봉양하고 있는 효자이기도 하다. 작업실은 풍기 금계동에 <우설화실>을 두고 있으며, 2000년 이후 개인전을 8회 개최했다. 수상경력으로는 1984년 개천미술대전 대상(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민경수 화백은 사업가이다. 60대에 그림에 입문하여 구상 인물화를 통해 ‘경북미술대전’을 조기 졸업하였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에도 입선을 했다. ‘한유회’, ‘전업작가회’, ‘영은회’ 등에서 노익장을 발휘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 동안 서울, 대구, 영주, 안동 등지에서 개인전을 개최해 왔으며 중국에서도 2회의 개인전을 가지기도 했다. 현재 영주시 이산면 운문리에 개인 작업실인 <청계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서예가 박기진은 초정 권태륜 선생의 문하로 이른 시기에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를 획득했으며, 안동대학교 한문학과와 경기대학교 전통예술대학원 서예학과를 졸업한 그야말로 예·학을 겸비한 작가이다. 경북전문대학에서 한문강사로, 초정서예연구원과 영주 유림회관에서 서예 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경북서예대전, 경남서예대전, 영일만서예대전 등 전국 각지의 공모전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안동에서 개최되는 국제유교서예대전에서는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김주백 화백은 일찍이 고향 영주를 떠나 원주에서 50여년을 사업가로 살아오면서 미술인으로의 역량도 더불어 키워왔다.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으며, 홍익대학원 최고의미술상(총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개인전을 4회 개최하였으며, 원주에서 <흥송미술관>을 운영했다. 2012년 영주로 낙향하여 미술관을 짓기 위해 순흥 등 여러 곳을 탐색하다가, 상망동에 터를 잡고 <흥송김주백미술관>을 2013년 개관했다. 장학사업 뿐만 아니라, 기부 및 봉사활동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작가로 존경받고 있다.

 

주)

1)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 과거를 통해 현재를 새롭게 하며, 그 사표로 삼는다는 뜻.

2) 김병기=1916년 평양 출생. 광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가와바타(川端)화학교와 문화학원에서 미술 공부. 귀국 후 1945년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 서기장을 하다 47년 월남. 서울대에서 예술론·회화실기 강의(1953∼58). 64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65년 미국으로 이민 후 뉴욕주에 정착. 김병기의 아버지는 고희동·김관호에 이은 서양화가 1세대 김찬영(1893∼1960)이다.-중앙일보 2014.10.21 권근영 기자

3) 정상화(1932~ 영덕출생) : 1956 서울大學校 美術大學繪科 卒業. 1967-68 渡佛, 1969-76 渡日,

1977-92 渡佛. 50년대 후반 이후 전개되어온 현대미술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60년대, 70년대를 건너 최근까지 큰 영향을 미쳐왔다. 정상화씨의 초기 작품 경향을 한마디로 말하면, 앙포르멜로 요약된다.-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4) 중앙일보 2014.10.21 권근영 기자 ‘82세 제자 맞은 98세 스승이 말했다, 참 좋은 나이지’

5) 2012년 제26회 소백문화제 특별초대 “화동 전성진”전, 발문 중에서-소설가 최대봉

6) 금강 송윤환전(2000) 발문 ‘금강 송윤환의 문인화 읽기’ 중에서-권석창

 

2014.10.31

 

 

좌로부터 민경수, 이산 박기진, 최광희, 화동 전성진, 이민자, 금강 송윤환, 김종한, 흥송 김주백 초대작가

 

 

 

박성만 도의원(좌에서 첫번째)과 서원 부시장(두번째), 신수인 시의원(네번째) 참석

 

이섭열 회원과 권오수 경북미협 회장

 

김종한 초대작가의 건배사

 

박기진 초대작가의 작품설명

 

기념촬영. 뒷즐 좌로부터 박기진, 전성진, 김주백, 최광희, 민경수, 송윤환, 김종숙, 이민자, 송재진, 김동진, 앞줄 왼쪽부터 이섭열, 박정서, 강준, 김승호, 김소영, 김선옥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