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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북부권 미술의 현황과 전망

즈음 2011. 12. 22. 15:39

 

경북북부권 미술의 현황과 전망


송재진(한국미협영주지부 회장)



1. 들어가는 말


경북미술은 경북미협의 탄생과 더불어 성장하고 화합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발원지는 경주지역이다. 삼십여년 미협 역사의 초중반의 시기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에서 기반조성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 말 구미지역에서 지회장(임대일)이 배출되고 이어 안동(이병국), 문경지역(장진경)으로 협회의 중심부가 이동하면서 경북미술은 바야흐로 성장에서 화합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하겠다.


경북 북부지역은 국토 면적의 11%나 되는 넓은 지역이면서도 안동, 영주, 문경, 상주, 예천, 봉화, 영양, 청송, 의성 나아가 울진, 영덕까지 포함한다 해도 인구는 포항시를 겨우 상회할 정도이다. 경제적 기반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예술 분야의 낙후성은 중남부지역 도시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도시슬로건들도 대체로 유교적 성향인 정신문화, 충효, 선비 등이 주된 메뉴여서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방향성도 ‘현대’보다는 ‘전통’에 경도되는 감이 없지 않다.


북부지역의 현대미술은 자생이나 토착이 아닌 교류와 유입에 의해 보편화의 과정을 밟아왔다. 현대미술이 ‘토착’보다는 ‘정주’라는 실제에 의해 한 지방(지역)의 정체성을 재편해 왔다고 볼 때 타의든 자의든, 거주의 개념은 매우 현실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주’의 개념이 도시 생존의 필요조건인 만큼 도시이미지 개선을 위한 현대미술의 브랜드 서비스는 정주 미술인들의 몫이다. 한편으론 지역적 특성이라 할 ‘전통’에 현대미술을 접목시켜 상생할 수 있는 모델의 개발 또한 불가피하다.

 

어떠한 지역이든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시ㆍ도 분리 전의 경상북도는 대구가 중심이었지만 그 이후엔 단위 지자체별로 성장과 발전의 모델을 독자적으로 구축해 왔다. 그러나 경제기반에 따른 도시별, 권역별 차이는 더욱 벌어졌고 열악한 지자체는 지자체끼리 서로가 보완하고 협력하는 상생의 방법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지역 미술계에도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에 본고는 각 지역마다 현대미술이 어떻게 뿌리내리게 되었는가를 약사로 짚어보고, 경북북부권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있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해보고자 한다.    


2. 각 지역의 미술 현황 및 역사


경북북부권의 미술을 논하기 전에 경북미술문화권, 다시 말해 경북과 대구의 분리 전의 경북미협부터 간략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1962년「한국미술협회경북지부」가 대구에서 결성되었고, 1981년 시ㆍ도 분리가 되자 「대구미협」이 곧바로 9대 지부장을 선출함으로써 그 정통성을 이은데 비해 대구에서 떨어져 나온 경북은 3년간의 표류 끝에 1984년에서야 현재의「한국미술협회경상북도지회」를 재창립하게 되었다.


당시 경북권에서 인적 자원이 월등했던 경주지역이 도지부를 결성한 대구에 이어 2년 뒤인 1964년 지방최초의 한국미협경주지부(초대지부장 손일봉)를 결성했고 1975년에는 두 번째로 안동미협지부가 결성됐다. 1981년 대구에서 분리된 경북은 도지부를 만들기 위한 최소요건인 3개 지역 지부를 갖추지 못한 상태여서 월성지부를 급조하여 도지부 인준을 받게 되었다. 1984년 경주의 박재호, 최원태, 안동의 김인수, 이수창, 월성의 조희수 등 다섯 분의 창립발기인에 의해 경북지부가 탄생됐고 초대지부장엔 경주의 박재호씨가 선임됐다. 10년 뒤인 1994년 ‘지부’ 명칭이 ‘지회’로 승격되었고 현재에 이르게 된다.     


가. 안동시의 미술


초창기 경북미술의 양대 산맥이자 경북북부권역의 중심도시라 할 안동은 어느 지역보다 현대미술의 정착이 빨랐다고 할 수 있다. 안동 화단의 제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임규삼ㆍ권영호ㆍ이수창ㆍ김인수ㆍ박기태 등이 안동 지역 최초의 미술 단체인 향미회를 결성하고 1964년 11월 창립전을 개최했으며 1970년 제7회전까지 이어갔다. 1965년 안동교육대학, 1974년 상지전문대학의 개교는 전문교수진에 의한 안동지역 미술계의 질적, 양적 발전의 토대를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됐다. 1973년 천주교 안동교구청이 부속건물인 문화회관을 건립, 안동지역 최초의 상설화랑인 문화회관 화랑이 문을 열었다. 1975년 6월 한국미술협회 안동지부창립전이 개최된 이후 1993년 안동시민회관이 들어서기까지 안동미술문화의 요람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또 ‘안동서도회’가 그 해 창립되었다.


1979년 안동교육대학이 4년제 국립 안동대학으로 승격되고, 미술학과가 설치되었다. 재학생들의 전공별, 출신지역별 각종 연구동아리들인 ‘채전’ ‘강전’ ‘미채회’ ‘모서리회’ 등이 생겨나 활발한 활동들이 이어졌고, 1983년부터는 졸업작품전이 해마다 개최되었다. 대학의 에너지는  안동미술의 미래를 좌우할 잠재력이라 보아 마땅하다. 동년 6월 향미회 회원이었던 서양화가 권영렬의 주도로 ‘향미일요화가회’가 창립전을 개최했고, 12월에는 서양화그룹인 ‘토전’도 창립되었다. 문화회관 화랑이 개관된 이후 김영철 동양화전, 이수창 수채화전, 인상파1백주년기념전, 7미회전, 한국미술협회안동지부전, 권순일 동양화전, 황인길 동양화전, 권영호 유작전 등이 개최되었다.


1980년대는 안동미술의 성장기라 할 수 있다. 1983년 안동대학교 미술학과가 첫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1987년에 들어서는 이들이 대거 안동미술협회 회원으로 영입되면서 신진 작가의 활동 무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또 해마다 개최되는 교수작품전은 지역성을 탈피한 다양한 장르와 사조의 작품들을 선보여 안동미술을 더욱 풍성하게 꾸몄다. 동년 10월 안동대학교 출신 젊은 수채화가들을 중심으로 ‘경북수채화연구회’가 창립됐고, 작가적 기질이 확고한 안동대학교 미술학과 동문들로 구성된 ‘심현회’ 역시 창립전을 열었다. 1985년 12회, 1986년 13회, 1988년 15회 경상북도미술대전이 안동시립도서관에서 개최되면서 오랜 개최지였던 대구를 제외하고는 제20회까지의 미술ㆍ서예 통합대전인 경북미술대전은 거의 경주와 안동에서 번갈아가며 개최되었다. 응용미술분야의 활동도 활발해져서 1981년 상지전문대학 산업디자인과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동아리인 ‘아미회’가 결성되어 안동문화회관에서 창립전을 가진 이래 매년 전시회가 이어졌으며, 이듬해에는 동대학 공예디자인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도도회’ 도 창립전을 개최했다. 1989년에는 ‘안동조각회’가 결성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한국화그룹인 이수회(1990년)가 창립되었고, 제1회 ‘아름다운 안동그리기 사생대회 및 강습회’가 안동미협 주관으로 시작되어 2000년 도대회로 격상하기까지 10회 동안 이어졌다. 1997년 신세기청년작가회, 1998년 경북청년작가회 등이 잇달아 창립되어 젊은 작가들의 발언에 힘이 실리기 시작하는 것도 이시기이다. 경북도전도 몇 차례 더 유치되었으며 1999년 성곡동 일원에 안동조각공원이 조성되어 20여 점의 국내유명조각가들의 작품이 설치되었다. 그 외에도 응용미술분야나 전통예술 분야의 활동들도 활발히 전개됐다. 안동미술의 개화기가 시작된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 미협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서 기존의 사생대회 외에도 ‘전국탈춤그리기 대회’, ‘유교문화서예대전’ 등 전국공모단위의 행사를 탄생시켰다. ‘전통’의 테마를 미협이 주관함으로써 ‘전통’과 ‘현대’를 접목하는 모범사례가 된 것이다. 또 2003년 40대의 이병국 회원이 안동지부장에 이어 최연소 한국미협경북지회장에 당선됐다. 이는 변화에 둔감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해줄 줄 아는 협회의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겠다. 이러한 센스가 인구 대비 가장 많은 회원 수를 가진 안동미협의 저력이 아닌가 싶다. 2010년 다시 예총경북연합회 회장에 당선된 이병국 회장은 영남예술대학이라는 1년제 예술아카데미를 개설, 예술 전 분야에 대한 강좌를 통해 안동을 중심으로 북부권 지역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또 대한민국 대표축제가 된 국제탈춤페스티벌은 전통과 현대, 그리고 세계를 한데 아우르는 성공사례로 안동의 이미지를 한층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매머드화 되어가는 안동미협이 간과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평론분야임을 지적하고 싶다. 한편의 연극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배우와 관객, 무대가 있어야하듯 한 지역에 진정한 화단이 성립되기 위해서도 작가와 갤러리 그리고 평론가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안동엔 전업작가들도 여럿 있고 미술대학이 있으며 또 미흡하나마 준미술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안동문화예술의전당도 있다고 볼 때 평론분야만은 여전히 논외의 대상인 것 같다. 한국평론가협회 회장을 맡고있는 서성록교수가 바로 안동대학교에 재직 중이고, 경북도지회의 김수영 평론분과장 역시 안동사람이다. 안동미술이 한층 더 업그래이드 될 수 있는 기회를 도외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안동화단의 회화성향은 대체로 구상이다. 그러나 표현 형식에 대해서 서성록 교수는 표현방식의 정체, 즉 하모니 중심의 화면구성이라든가 중성톤의 색채, 정밀감의 부족 등 옛날 패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는 개개인의 작업 성향을 비판했다기보다는 구상회화를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고 창작하는 작가군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많은 지역의 현실처럼 안동지역 역시 무풍지대라면 작가안일 또한 팽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는 비평부재의 한 폐단일 수도 있다.


안동은 수채화의 전통이 뿌리 깊은 지역이다. 타지역과 달리 투명ㆍ불투명을 가리지 않는 水繪적이자 필력중심 화풍으로 몰개성화되어가는 한국수채화 화단에 ‘전통’과 ‘개성’이라는 두 개의 화두를 동시에 던져준다. 안동미협의 이수창, 조광래 고문의 화풍은 한국 양화 1세대인 손일봉 선생의 화풍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수채라는 재료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 유채화의 두터움에 뒤지지 않는 화풍을 창출해 왔다. 이러한 화풍은 영남수채화작가회의 몇몇 작가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2010년 안동문화예술의전당(관장 하영일)이 문을 열었다.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과감한 개관전에 이어 경북의 원로작가들을 초대한 ‘초예운전’ 등 임정혁 큐레이터의 역량이 돋보인 행사들이 이어졌다. 매달 예술 각 분야(문학, 사진, 회화, 공예, 서예 등)에서 6명의 작가를 초대하여 부스전을 열어주는 ‘열린초대전’은 경북북부권의 중심센타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안동지역 이외의 작가 1명을 초대하고 또 신진작가 부스도 개설하여 신인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안동지역은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문화콘텐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2006년 안동문화콘텐츠 사이트를 오픈했는가 하면, 영상미디어센터를 개관하고 또 예술의전당과 같은 미래지향적 시설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다는 점이 경북북부권 중심도시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북부권 전체의 문화예술소비층이 빈약하고, 지자체 역시 재정자립도  면에서 취약점을 보여 투자의 지속성에 대한 일말의 불안요소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으로 좀 더 적극적인 콘텐츠 개발과 기획력으로 대도시 문화예술소비층을 끌어들이는 유인책의 개발 또한 절실하다 하겠다.


나. 영주시의 미술


영주의 현대미술은 계삼정, 손일봉 선생과 같은 대가들에 의해 발아되었다고 하겠다. 계삼정 선생은 평양출신으로 동란 전 풍기에 정착해 현 금계중학교를 설립했으며, ‘61년 향토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했던 분이다. 손일봉 선생은 경주 출신으로 1952년부터 56년까지 영주여고 초대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영주지역 현대미술의 싹을 틔웠다. 60년대에 들어서는 영주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던 박기태, 영주중학교의 오세영, 영광고의 고영수 선생 등이 이두식, 류윤형, 김종한 등 제자들을 길러내며 영주미술의 초석을 놓았다. 한편 영주시 이산면 출신의 김호걸 선생은 한국인물화의 전통을 확립한 화가로 서울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70년대 후반부터 학생들의 미술대학 진학이 본격화되면서 중ㆍ고등학교마다 미술부가 활성화 되었고, 학교연합 고교생동아리인 영주미술학우회가 1976년 결성되면서 학생문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1973년에는 중등교사들을 중심으로 영주미술협회가 결성(회장 오상목)되어 전시회와 함께 학생사생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전시회는 1978년에 가서야 개최되는 등 성인단체의 활동은 여전히 정체된 감이 없지 않다. 1977년에는 현재까지 가장 오랜 연륜을 지닌 영주서도회가 창립되었다. 


80년대는 향토화단의 형성기라 볼 수 있겠다. 벽두부터 많은 그룹들의 창립이 줄을 이었다. 비록 일찍 해체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다 세분되고 다양한 활동들이 전개되었다. 1980년 4월 영주미술학우회 출신들이 ‘모듬두레’를, 12월에는 풍기에서 안동교대 동문들이 중심이 된 양화모임인 ‘나령회’가 창립됐다. 1981년에는 안동대학 미술학과 재학생들이 모서리회를 만들었고 이듬해인 1982년에는 안동대학총향우회에서 시화전, 음악회, 미술전시회(모서리전) 등으로 종합예술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어 1984년에는 영주미술동우회(현 영주미술작가회)가, 1985년에는 소백한국화회가 창립전을 가졌다. 1987년에는 영주미술협회가 영주ㆍ영풍ㆍ봉화 중등미협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미술협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중등교사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0년 당시 영주군이 영주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었던 영풍군과 함께 봉화군의 교사들(주소지는 영주에 두면서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았음)이 동참했던 것이다. 1988년에는 서양화 모임인 백향회가 창립전을 가졌으나 의욕과는 달리 1회전을 끝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1984년에는 영주시민회관이 준공되어 이듬해부터 센타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영주문화원 주관의 소백문화제가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 전반적으로 80년대는 많은 단체의 결성과 함께 개인전시도 여러 차례 개최되는 등 지역예술인들의 다각적인 노력이 돋보인 시기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한편 지역문화를 대표하던 학생동아리활동들은 학교별 종합예술제로 흡수되면서 동력을 상실해 갔다.


90년대에 들어서 주목할 일은 한국미협지부(`90년)와 예총지부(`93년) 인준을 꼽을 수 있겠다. 당시 미협지부 설립은 지역미술발전의 초석이 될 거라는 기대감 속에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추진된 결과였다. 재향작가 김종한이 초대지부장으로 추대되었고 `90년 6월 29일 창립전을 개최했다. 또 90년대는 개인전시회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시기인데 정주작가 외에도 출신작가나 타지작가들의 개인전도 자주 개최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역작가들의 나들이 전시회도 활발해 졌으며 특히 영주미술작가회 소속 재외 작가들의 개인전 활동은 주목할 만했다.  한편 아마추어 단체의 창립도 이어졌는데 1990년 사군자동호회를 시작으로, 1991년 한그리메, 1992년 예우회, 2000년에는 미사모(미술을 사랑하는 모임)가 풍기문화의 집에서 소백문화제 초대전을 통해 데뷔했다. 1999년에는 안동대학을 졸업한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진사조공’(진지한 사색의 조형 공간) 창립전이 개최됐다. 그밖에도 1993년 12월, 소백한화회가 제작한 대형벽화(영주여객)와 1999년 미협에서 제작한 시민회관 벽화 ’예향의 노래‘는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좋은 예로 평가된다.


2000년대는 지역화단의 성립기라고 보겠다. 2004년 도단위학생실기대회인 ‘선비정신 함양을 위한 도학생그리기대회’가 미협주관으로 실시됐고, 2006년에는 제33회 경상북도미술대전과 서예대전이 체육관에서 개최됐다. 한편 중앙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직선제의 영향으로 영주미협에도 2007년과 2010년 경선을 통해 지부장을 선출했다. 또 다양한 층위의 개인전들이 대내외적으로 확산되면서 쟝르도 유화, 수채화, 서예, 조각 등 평면과 입체가 망라되었으며 내용 또한 자연주의적 풍경에서부터 설치나 현대적 감각의 오브제회화에 이르기까지 다변화 되었다. 새로운 단체의 창립 역시 계속되었는데, 2003년 묵연회가 창립전을 열었고, 2005년에는 구 영은초등학교에 둥지를 튼 작가들이 영은회 창립전을, 2009년엔 그룹 나비(회장 이석희)가 날개바람을 일으켰다. 그룹나비는 안동, 영주에서 활동하는 작가들로 평면, 입체를 불문, 형식의 틀보다는 열린 사고를 공유한다는 취지를 내걸었다. 또 처음으로 고등학교 동문전도 개최되었다. 1975년에 개교하여 명문고의 길을 걷다가 2001년 현재의 영주제일고등학교와의 통합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중앙고등학교 동문전인데, 첫 전시회의 타이틀이 ‘forget me not!'이었다.


2010년 3월, ‘향기로 가득한 민화/일상의 관조’전이 개최됐다. 이는 향토의 대표기업 소디프신소재(현 OCI 머티리얼즈)의 기업과 사회 간의 문화나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년 5월는 열린공예사랑전이, 6월에는 공예분야의 다양성을 소개하기 위해 창립된 ‘크라페 영주’가 “동화를 만나다”라는 타이틀로 창립전을 개최했다. 80년대의 ‘미술동인 경북선’처럼 경북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남수채화작가회도 경북 북부지역을 순회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2006년, 영주지역 사상 첫 국제전(영주미술작가회-파리작가 교류전)이 영주미술작가회에 의해 개최되었다. 파리 1대학에서 조형예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김은주 회원에 의해 세계적 명성을 지닌 프랑스 작가 9명의 작품을 초빙했던 것이다. 2009년에는 25주년을 맞은 영주미술작가회가 ‘열린 시각과 소통의 지역미술’이라는 타이틀의 기념전을 통해 자료집 형식의 도록을 발간했고 전시회 외에도 체험마당과 미술세미나 등을 개최했다. '알록달록 색채야 놀자‘는 어린이를 위한 체험마당으로 이민자 고문이 주도했는데, 원래 하루 동안 시행하려던 것이 뜻밖의 성원에 힘입어 전시기간 내내 실시되기도 했다. ‘한국 미술시장의 현황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현대미술경영연구소 박정수 소장이 강연한 미술세미나 역시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2010년은 20주년을 맞은 미협이 ‘미협 20년, 지역을 발언하다’라는 기획전을 통해 ‘영주현대미술 50년사’라는 논단과 더불어 도록의 파격적인 표지 디자인을 선보였다. 개막행사를 휘호퍼포먼스(서예가 김동진)로 대신했으며, 전시기간 동안 아트상품전, 공예체험 한마당 등부대행사를 병행했다. 전시회를 1, 2부로 나누게 된 것은 지역시설인프라의 한계점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것이다. 2011년에는 ‘동서지역미술의 차이와 공감’이라는 타이틀로 자매도시인 전라남도 목포시와의 미술교류전이 영주에서 첫 테이프를 끊었다. 


다. 예천군의 미술


1980년대 후반기는 예천미술이 지역의식의 기저 위에서 본격적인 용틀임을 시작했던 시기라 볼 수 있다. 1987년 창립된 미술동인 ‘텃밭’은 10명도 채 되지 않은 인원이었지만 열악한 환경에 좌절하지 않겠다는 정주미술인들의 신념의 표출이었다. 1991년에는 지역출신 안동대학 재학생들이 ‘예맥’회를 창립했다. 이후 선배 졸업생들의 찬조출연과 지역의 기성작가들을 초대하면서 점차 예천지역의 대표적인 단체로 성장해나갔다. 1999년 제9회 전 때는 20명의 정회원과 6명의 준회원이 참여할 만큼 숫적인 팽창도 이뤘다. 한편 미술동인 ‘텃밭’은 1988년 창립된 미술동인 경북선과 예맥회의 중복활동 탓인지는 몰라도 자연스럽게 도태의 수순을 밟아갔다.


1988년, 예천, 영주, 상주의 젊은 작가들이 ‘미술동인 경북선’을 창립하고1), 3개 지역을 순회하는 전시회을 개최했다. 창립선언문에서 박용진은 “우리의 지역미술은 어떠한 가치 기준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한국적인 주체성을 지니고 있는가?” “지역주민들과 공감의 폭은 어느 정도인가?” 등의 문제점을 자문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미술은 양적ㆍ물적 확대에도 불구하고 국제성이라는 유령 같은 흐름에 주체성을 상실하여 뿌리를 잃고 문화적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 이에 뿌리 있는 자생적 미술은 지방에서 길러져야 하며 중앙에 대비되는 변두리라는 뜻의 지방이 아니라 주체적인 가치를 지닌 지역미술의 활성화에 경북선 창립의 의미를 두고자 한다.”고 선언하였다. 처음 발기된 지역이 영주, 예천, 상주지역이다보니 자연스럽게 경북선을 회명으로 삼았다. 1993년에는 제5회 전시를 서울 관훈미술관에서 개최하면서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와 스스로가 자임했던 역할에 대한 반성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이후 매너리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1994년 제7회전을 마지막으로 결국 자기반성의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미술동인 경북선’의 활약이 찻잔 속의 태풍이었을지는 몰라도 지역작가들 간의 연대를 통한 지역미술운동의 시금석을 놓은 것만은 틀림이 없다. 


미술의 해인 1995년에는 서본리 언덕 위에 예천문화회관이 건립됐다. 다소 접근성이 떨어지는 흠이 있긴해도 제대로 된 전시공간이 확보되었다는데 의미가 크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예천문화원이 새로 건립된 문화회관에다 향토작가 초대전을 개최했다. 1998년에는 작가 최도성이 보문면의 폐교에다 천호예술원의 터전을 닦고 군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들을 유치하고 또 자체 기획전을 여러번 개최했다. 상설전시장에는 항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언제든지 관람이 가능하다. 현재 예천지역의 또 하나의 문화아이콘으로 각광받고 있다. 한편 용대리 폐교에도 권상헌, 김상진, 현범구 등 지역작가들이 입주하여 작가촌을 만들었다. 2004년에는 도립 경도대학에서 경도미술초대전을 주최하기도 했으며, 순수회화 중심의 순수미술작가회가 창립되어 미협과 더불어 예천미술의 현주소로 자리매김 되었다.


마침내 2007년 한국미협예천지부가 19명의 회원으로 창립전을 가졌다. 초대지부장에 임환재가 추대되었고, 5년 재임동안 미협을 예천미술의 중심으로 업그래이드 시켰다. 2009년에는 지부주관으로 장학기금마련소품전을 개최하여 전작품 매진이라는 대성황을 거두며 공적단체로서의 위상을 일궜으며, 경북지역의 미협 지부장과 작가들을 초대하여 소통의 중심역할을 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경상북도미술대전에서 현범구 회원이 대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또 그해 경북도청유치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예천군이 지원하고 미협이 주관한 예천조각공원이 조성되어 12점의 작품이 진호양궁장 앞 공원에 설치되었다. 2011년 제8회 정기전은 예천미술의 수준을 또 한 번 대내외에 각인시켜준 기회였다. 다양성과 독특한 작품세계가 소수정예라는 평가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1) 미술동인 경북선 : 1988년 영주(김석현, 송재진, 임부기, 임춘상), 예천(권상헌, 박용진, 임환재, 현범구), 상주(민경호, 이건훈, 이승현)의 작가 11명으로 창립됐다. 1989년 상주에서 박한, 황명옥, 1990년 정두영이 가입했다. 그해 문경에서 김강록, 김용호 등이 참여함으로써 지역이 추가됐고, 1992년 김천에서 김창길이 동참 경북선 노선이 완성됐다.


 

 

라. 봉화군의 미술


봉화의 미술은 비나리미술관 개관과 봉화미술발전연구회가 창립된 2004년을 기점으로 성인단체 활동이 본격화 된다. 낙후된 지역일수록 중앙화단이나 인근 지역과의 대등한 관계로 교류와 소통이 가능한 한국미협지부 설립에 대한 열망이 클 수밖에 없다. 영주미협의 2대 지부장을 지냈으며 봉화가 고향인 최영두 회장의 바램 또한 미협지부가 유치되는 일이었다. 봉화미술발전연구회가 발기된 2004년 여름, 귀농부부 송성일ㆍ류준화씨가 명호면 비나리에 미술관을 개관하고 개관전으로 ‘유쾌한 파종전’을 개최했다. 농촌에 접목되는 문화실험이라 봉화군의 지원과 각종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2009년 마침내 6개 분과 17명의 회원으로 도내 14번째로 한국미협지부인준을 받고 그해 11월 창립전을 봉화문화원에서 개최했다. 1989년 최영두지부장이 첫 개인전을 열었던 옛 문화원 건물은 오래전 철거가 됐고, 현재 포저리 언덕 위에 지어진 문화원건물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채 20평도 되지 않는 좁은 전시실 사정으로 로비에도 임시 파티션을 설치해야 했다. 2010년 9월에는 자매도시인 경기도 부천시 미협을 초대, 봉화송이축제장 야외부스에서 교류전을 개최했다. 현재 봉화미술의 당면과제는 무엇보다도 전시시설의 확충이 될 것 같다.


마. 기타 지역의 미술


안동, 영주, 예천, 봉화 미술은 글쓴이의 동참 또는 연관이 짙은 지역이라 독립적인 개괄이 가능했으나, 문경, 상주, 영양, 청송, 울진 등의 지역에 대해서는 글쓴이의 역량 밖임을 밝힌다. 하지만, 영양의 일월산맥전이나 울진의 송울진전 같은 행사에는 글쓴이도 초대된 적이 있어 행사의 취지나 성격에 공감하고 있다. 청송엔 군립 야송미술관이 경북최초의 공립미술관으로 개관되었고, 관장 이원좌화백의 대작들은 청송의 재산으로, 또 문화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영양, 청송, 울진 등의 지역은 비록 군 단위의 작은 고장이지만 문화예술적 역량은 여느 시 지역보다 뒤떨어지지 않는 저력을 갖추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지역의 미술도 공부해 싶은 것이 글쓴이의 바램이다.


3. 지자체의 역할과 미술주체와의 관계


위에서 살펴본 대로 각 지역 별 현황은 대체로 미술주체에 대한 역사기술이 대부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현재의 지역별 예술 환경(시설이나 지원책 등)이 안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큰 변화를 보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동의 경우 유교문화권 특성화를 위한 도시이미지 창출과 관련, 콘텐츠 개발과 더불어 현대예술 분야를 파트너로 삼으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비해 다른 지역은 여전히 ‘문화자원은 지역경제 활성화의 원동력’이라는 원론적인 시각에서 행정 따로, 지역문화예술계 따로의 행태에 머무르고만 있는 듯이 보인다.


문화예술자원이 녹색성장시대의 고부가 가치를 지닌 훌륭한 자원이라는 인식을 공감하면서도 어떻게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은 지역 특성화에 발맞춘 독자적 모델이나 콘텐츠의 개발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축제 따위는 이미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지 오래다. 경북북부권의 공통된 지표인 유교문화권 산업 역시 각 지자체의 입장에 따라 역량의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전통’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이라는 것이다. ‘전통’이 산업화되고, 관광자원화 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 즉 전통을 해석하고, 가치부여를 하며, 그것을 소비해내는 모든 것들이 현대인-주민-의 몫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지자체는 이점을 주지하고 언제나 주민들의 문화욕구에 반보라도 앞서는 정책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행정적으로도 지역예술계에 대표성을 가진 단체와 저변단체의 구별을 통해 일률적인 지원정책을 지양해야 한다. ‘집중’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한 투자는 곧 장소이미지를 강화하는 전략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부잔치가 아니라 외부의 관심을 유도하여 문화예술을 지역경제와 결부시킬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전략적 접근은 민심에 반하는 차별정책이 될 수 없다. 계속사업 위주의 분산지원을 고집하는 한 새롭고 참신한 신규사업은 한계예산에 부딪혀 언제나 배정에서 밀려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사업규모나 기대효과가 확실한 사업조차 선심성 행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골고루 나눠주어 민원소지를 만들지 않겠다는 안일한 발상은 이제 청산해야 한다. 신규사업에 대한 제대로 된 심사와 기존사업이라도 사업성과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통해 예산분배의 차별화를 정착시키야 한다. 가치창출이 확실하다고 판단될 땐 자부담을 전제로 한 사회단체보조금이 아닌 과감하게 본예산을 책정해주어야 마땅하다. 지역 대표단체의 자생력 강화는 곧 지역의 문화예술 아이콘을 만들 수 있는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중소도시의 입장에선 대도시와의 격차는 따라잡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한계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경쟁이 불가능하다면 차별화된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글로컬리이제이션(glocalization)이라는 말이 있다.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역화 (localization)의 합성어로 세계화와 지역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상을 말한다. 글로컬리제이션은 기업경영에 있어 세계화를 추진하되 현지의 기업풍토를 존중하는 경영전략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세계와 만나기 위해서는 서울을 통해서야 가능했지만, 지금은 세계적 네트워크 체제의 기본단위가 로컬일 수 있다. 경주와 안동에서 개최되는 엑스포나 축제 등이 모두 세계를 직접상대하고 있다. 국제행사가 없는 지역이더라도 지방자치단체마다 맺고 있는 국제 자매결연 도시와의 문화예술교류를 주요 교류 조항으로 설정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 하겠다.


벤치마킹은 대도시나 자신보다 조건이 보다 나은 도시에서만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인근 시군의 귀감이 되는 문화예술정책이나 사업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려는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청송군에서 경북최초의 공립미술관을 개관한 일이며, 울진이나 영양군에서는 전국의 화가들에게 자신의 지역을 그리게 하고, 또 찬양할 수 있게 하는 전략을 오래전부터 시행해 오고있다. 결코 예산이 넉넉해서가 아닐 것이다. 영양군에서는 철거하려던 문화원건물에다 영양미술관이라는 간판을 바꿔 달았다. 결코 거창한 마인드가 아니다. 


현대예술, 특히 미술주체들의 동참 역시 다양화되고, 세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작가 개인의 역량강화는 물론이고, 미술단체의 역할 또한 공적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유교문화’라는 아이콘이 지자체의 대표전략이라면, 지역의 미술주체들 역시 전통을 재해석하고, 그것을 현대적 작업에 반영하는 노력을 해주어야 한다. 문화예술소비층의 빈곤현상은 중소도시들의 공통된 현상이다. 그러나 도시의 문화예술소비층의 눈을 돌리게 할 수 아이템이 개발된다면, 지역 작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순수성과 지역성이라는 이미지가 오히려 어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4. 맺는 말


경북북부지역은 여전히 도시규모나 인구, 시설인프라 등이 남부지역의 경주나 포항, 중부지역의 구미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게 딜레마이다. 북부지역의 어느 도시도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화단형성은 만만치가 않다. 인적 자원이나 시설, 지자체의 지원규모 등 여러 면에서 많거나 조금씩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부지역엔 광역화단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분야별 지역별 작가지도를 작성, 우수 작가를 공동 발굴하고 지원하면서 내부적으로 인적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그것이다. 준미술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안동문화예술의전당은 안동작가들뿐만 아니라 북부권 작가들에게도 지원책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도청 이전에 따른 신도시에로의 문화예술 집중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그럴 때에도 배후도시로서의 지자체, 그 중 안동시의 역할은 지대하다고 본다. 또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경상북도만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는 문화재단 설립에 대한 의견도 경북미협 차원에서 시급히 개진해야 할 사안이다.  



참고자료


1. ‘근ㆍ현대 역사 속의 대구ㆍ경북미술 100년’-김태곤(경북미술총람 2007)

2. ‘1981년 이후의 경북미협’-배한기(경북미술총람 2007)

3. ‘안동의 공연, 전시예술 어떻게 이어져 왔나’-엄재진(안동예술 2005)

4. 디지털안동문화대전-정순임

5. ‘영주현대미술 50년사’-송재진(한국미협영주지부 도록 2010)

6. 안동, 영주, 예천, 봉화미협 각종 도록

 

경북예술(2012)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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