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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은 길을 묻지 않네 4

즈음 2020. 5. 24. 07:30

素宵齊

 

2001년, 울진에서의 첫 잠자리는 바다 위에 요를 깐 듯 난감했다. 연신 베게머리로 파도가 덮쳐왔던 것이다. 바다로부터 두 집 앞세운 골목 안이 나의 자취방이었지만, 몇 며칠을 노숙이듯 지샜다.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맞닥뜨린 홀로의 생활은 해방감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 불콰해진 기분에 메모지를 긁적였다.

 

먼 곳, 적적함으로 술병을 얻었네/ 날 아는 이 없는 이곳에는 파도만 오락가락/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를 않고/ 봄 밤 바람소리에 술이나 또 한잔

 

운문이었지만, 한시의 번역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옥편 하나를 샀다. 그리고 주섬주섬 아는 한자들을 꿰맞췄다. 며칠 만에 한문 번역을 완성했다.

 

棲于蔚珍

遠方寂寂得酲湎/ 處少知音波往來/ 終日待心遲消息/ 春宵風語又盈杯

 

시가 부적이 되었던지 바다는 방 안까지 밀고 들어오는 몽니를 더는 부리지 않았다.

20대 적 울진 바다는 한 편의 동화였다. 무턱대고 홀로 스케치 여행을 쏘다닐 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버스 차창으로 바다가 운동장인 학교가 스치고 있었다. 하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밀랍인형처럼 꼬물댔다. 앞이 보이지 않던 시절, 마음 한 켠엔 절망이라는 감정이 웅크리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이런데서 미술선생으로 한 평생 소박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임을 알면서도 돌아오는 내내 망상은 떨쳐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십 수 년이 지난 어느 겨울의 끄트머리, 불혹의 한 사내가 울진의 남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비로소 알아차렸다. 목적지가 그 날의 동화 속 삽화였음을!

 

공립교원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된 그곳은 바로 기성중학교였다. 비록 1년밖에 머물지는 못했지만, 울진 바다를 나의 바다로 각인시키기에는 결코 모자람이 없던 시간이었다. 사계절의 바다를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바다가 내 감성을 주재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여름날, 정병주의 대하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 속에 들어있던 공자진의 시 한 편을 불러냈다.

 

夜起數山川 浩浩共月色 不知何山靑 不知何川白

 

공자진의 시는 바로 이 날을 위해, 이 순간의 나의 감정을 이입해내기 위해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우연히 맞닥뜨린 7월의 기성리 밤바다는 황홀, 아니 감격이었다.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신비의 순간이었다. 그 이틀간의 정경을 나는 하얀 밤(素宵)으로 기록했다.

 

‘열대야에 떠밀려 밖으로 나와 보니, 문득 골목 밖이 눈부시다. 바다는 은빛 호수, 목성만한 달이 덩그렇게 떠있다. 삼삼오오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밀랍인형 같다. 어두컴컴한 곶 봉우리엔 솔질하다 만 것 같은 구름이 푸른 바탕 위에 도드라져 있고, 더 먼 구름들은 평붓으로 바림해 놓은 듯하다. 수평선 위로 한 덩이 구름이 다가오면 달은 쏜살같이 내닫는다. 동천엔 북두칠성이 찍혀있다. 2001.7.4’

 

‘소나기 물러난 밤, 다시 바다에 섰다. 아직 잿빛 구름덩이가 꿈틀 꿈틀 몸을 풀고 있지만 개인 바다엔 노을이 얼비친다. 파스텔톤 에메랄드빛 하늘엔 우주선 같은 구름 한 조각 유영해 온다. 바다와 하늘이 한 빛깔로 평화하다. 먼 데 산 위로는 검은 장막을 찢듯 乳白의 구름덩이가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바다가 경쾌한 선을 긋고 있다. 2001.7.5’

 

그때로부터 먼 훗날, 그날의 기억이 작업실 이마에 이름표를 달게 했다. 과정(果丁) 김동진이 써 준 ‘소소재(素宵齊)’ 글씨를 마침내 현액 했다. 2008년 7월1일의 일이다.

 

늦은 밤, 모처럼 술에 동해 넌지시 취기를 희롱한다. 나의 애인은 소소, 소소가 사는 집은 나의 화실이다. 환한 달빛을 마음으로 품었지만, 문 밖 기척도 소소가 분명할 터. 문득 죽림선자 대나무 밭에 바람소리가 서늘하다. 화제 글씨를 자형이 읽어주기 전 까지는 한갓 벽 치장의 족자에 불과했으리. 별일이다, 오늘 따라 소소가 나에게 술을 다 권하니. 2015

 

 

울진에서

 

어느 날 문득 바다에 이르다 육지와 바다사이 비무장지대 바다의 비무장을 확인하고도 내륙인은 긴장을 풀지 못하다 내륙에선 바다는 분단된 강토 금강산 다녀오듯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듯 참 막막하기만 했던 수평선 바다와 맞서기 위해 자원입대한 불혹의 사내 내륙인의 추억은 동쪽으로 향하던 길은 어느 통로든 낯설지 않았다는 것 뿐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 내륙인은 온몸으로 파도 꽃을 부둥키다 끝끝내 사사로움으로 평화협정을 맺다 달빛 아래 술잔을 들면 술잔 속에서나 바다 위에서나 달은 공평하게 내려 화해를 주선해주다 백사장에 앉아 마셨을 때나 방파제에 앉아 취했을 때나 다시 내륙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노라 굳이 말하지 않았을 때나 2001

 

죽변등대 1997
항구 2000

 

망 2003
울진가는 길 55x42cm 2011

 

울진가는 길2 76x54cm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