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경주, 한국 근현대미술의 중심'
경북미술의 시작과 전파 경로
-60년대 이전, 회화 분야를 중심으로
1. 서
근대기 경북미술은 도청소재지였던 대구와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다. 현재의 시ㆍ도 분리 상황에서 바라본다면, 미약하나마 미술적 자장을 형성했던 또 한 지역으로 김천을 떠올릴 수 있다. 김천은 경주에서처럼 정주작가들에 의해 미술 분야에 대한 토착화 과정을 보유했던 지역으로 보아지기 때문이다. 경북지역에서 출생한 많은 근대기 작가들은 서울이나 대구에서 중ㆍ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혹은 구미로 유학을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며 귀국하여 정주지로 정한 곳도 대구가 아니면 서울이었다. 그나마 경북지역, 그 중 출신지로 귀착하여 지역화단의 뿌리로 자리매김했던 경우는 경주가 거의 유일하다.
2. 경북미술의 전파경로
근대기 경북 1세대 작가들은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통해 입지를 넓혀가면서 비록 식민통치를 위한 일본의 술수에 의해 ‘향토색’을 강요받았을지는 몰라도, 내재적인 자의식과 계몽정신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황술조는 포비즘 계열의 작가로 분류될 만큼 자유분방한 기법의 탐구와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전후 대부분의 2세대들은 1세대 작가들의 서정적 화풍만을 충실히 계승, 각자의 화풍을 진작시켜나가면서 경북 각지로 향토색을 구사하는 구상회화 방식을 전파해 나갔다.
경북 출신들 중 일본이나 구미로 유학을 떠났던 미술가로는 경주지역의 황술조, 손일봉, 김준식, 손동진, 포항 출신의 장두건, 칠곡 출신의 이쾌대, 구미 출신의 김용준, 청도 출신의 박일주, 김수곤 등을 꼽는다. 그들 중 일부만이 지역에 정착하여 근대기 지역미술의 초석을 놓았을 뿐이다. 손일봉이 일본에서 귀국한 1946년, 남한 최초로 <경주예술학교>가 설립됐다. 손일봉(교장), 김준식, 김만술, 윤경렬, 주경 등 지역작가들이 대거 강사로 참여하여 1951년 미술과 첫 졸업생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이 경북미술 2세대 작가군으로 교직을 통해 흩어지면서 불모지와 같았던 경북 각지에 서양미술을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서부권을 대표하는 김천이나 인근 지역들이 대구화단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다면, 경주예술학교 1회 졸업생들인 이수창(1929~2013), 박기태(1927~2013), 김인수(1930~1991) 등이 교편을 잡은 안동지역은 경주화단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전시회가 개최될 때면 두 지역의 작가들이 서로 방문하여 축하와 격려를 나눌 정도로 동질감이 강했던 것이다. 조희수는 1980년대 초 경주로 귀향하여 경북미협이 결성될 때 월성지부장(‘84)으로, ‘87년에는 포항미협 초대지부장으로 경북미술의 밑거름 역할을 다했다, 포항의 배원복은 60년대 대부분의 작가들이 지역을 떠나 포항화단이 침체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유일하게 지역을 지킨 장본인이다. 손일봉 역시 2세대 작가군과 더불어 대구, 영주, 문경, 경주, 의성 등지에서 중등교장으로 재직하며 경북 각지에 미술의 씨앗을 뿌리는데 앞장섰다.
일제강점기 후반, 경북미술의 전파경로 중 또 한 축은 대구사범 심상과 졸업생들이 맡았다. <대구사범학교>는 일본인 교수의 지도하에 미술수업을 받은 학생들이 일선학교 교육자 겸 서양화가로 배출되는 요람이기도 했다. 금경연, 권진호, 김수명, 최현태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4기 졸업생인 금경연은 영양출신으로 5년제 심상과를 졸업한 후 ‘38년 안동으로 초임 발령을 받은 뒤, 경산, 경주, 영양 등지로 임지를 옮겨 다니며 교육자와 화가의 길을 병행했다. ’42년 경주 <계림공립보통학교>에 근무할 때는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경주중학교> 미술교사를 겸임했다. 그 해 ‘경주향토미술협회’를 창립하고, 이듬해부터 ‘경주향토미술전람회’를 개최했으며, 작품 출품과 심사를 맡는 등 경주미술 발전에도 큰 힘을 보탰다. 권진호는 영주출신으로 5년제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사범>심상과를 1년 수료한 후 곧바로 향리지역으로 교사 발령(1936년)을 받게 됨으로써 대구화단에서 잊혀지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두 분 다 30대의 나이로 요절하는 비운을 맞으면서, 북부지역에서 <경주예술학교> 출신들과의 상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수명은 칠곡 출신으로 <대구사범> 심상과(6회)를 졸업했으며, 유화뿐만 아니라 수채화에도 독자적인 경지를 이룬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39년 <남산정심상소학교> 및 <김천고등여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대구교육대학> 교수(1962년~1983 재직)로 전임해 가기까지 김천미술의 기반을 다졌다. <김천문화원>의 전신인 <김천문화의집>에 ‘53년 미술반을 개설했는가 하면,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미술활동이 대중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최현태는 경주로 낙향하여 40여 년 간 교직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며 경주미술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분들은 초창기 화단의 보편적 현상이었던 초등․중등학교 교사라는 신분을 바탕으로 후진양성과 더불어 지역화단을 일구었던 일꾼들이기도 했다.
이렇듯 두 갈래 전파통로와는 달리 영주의 계삼정, 포항의 서창환, 김천의 최근배(1910~1978) 등과 같이 월남을 했거나, 안동의 임규삼, 김천의 송병돈처럼 외부에서 발령을 받고 내려온 작가들 또한 50년대 이후 각지에서 경북미술을 태동시키는데 일조했던 선각자들이다. 나무화가로 널리 알려진 서창환은 ‘48년 포항지역 최초로 군청회의실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서창환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45년 월남, 풍기에 정착하여 ‘46년 <영주농업중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하다 ’47년 포항으로 이주했다. <포항여중·고> 등에서 근무하다 ‘59년 <경북중학교>로 전출하면서 대구에 정착했다. 김천지역 최초의 근대미술인으로 평가받는 송병돈(宋秉敦)은 일본 <동경미술대학>을 졸업하고 ’33년 <김천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교내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던 인물이며,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최근배는 ‘40년 <김천중학교> 교사로 김천지역과 인연을 맺었으며, 60년대 이후 <효성여대>(현 대구카톨릭대 1969~1977 재직)로 전임하면서부터 대구에 정착했다. <동경예술학교>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다 3학년 때 일본화(채색화)로 전향했던 이력대로 주 장르인 채색화 외에도 다수의 유화작품을 남기고 있다,
3. 결
지방미술사는 한국미술사의 저변이자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중앙의 이야기와 지방의 이야기가 동시에 흥미로운, 그러한 서사구조를 가질 때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이다. 한국미술사에 거론되는 중앙무대의 화가들 대부분이 어느 한 지방을 출신지로 갖고 있다. 중앙무대를 선점한 작가들의 문화권력과 어떻게든 지방을 벗어나 중앙에 끼여 보려는 일부 지방작가들에 의해 지역미술사는 더욱 ‘관심 밖’이 되어 왔지만, 이젠 ‘장소성’이 문제될 것은 없다. 작가의 향기란 숨어있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향기의 원천이 곧 중심인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작가의 분권의식일 것이다. 한국미술사가 배척했거나 외면했던 지방 정주 작가들, 그들 역시 한국미술사의 보이지 않는 한 축, 이면임을 인식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한국미협영주지부장 송재진
‘경주, 한국 근·현대미술의 중심’ 세미나 성황
조병준 기자 | press@srbsm.co.kr 2015.11.17. 서라벌신문
‘경주, 한국 근·현대미술의 중심’이란 주제의 학술세미나가 지난 14일 오후 경주현대호텔에서 관계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미협 경주지부가 경주솔거미술관 개관전 행사의 하나로 준비한 이번 세미나에서는 ‘실크로드 경주 2015’ 행사에 맞춰 전시됐던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전’의 주인공들인 경주출신 작가 황술조, 손일봉, 김만술, 박봉수, 김준식, 손수택, 손동진 선생에 대한 예술적 발자취를 더듬고 경주미술의 역사를 제조명하는 성격으로 진행됐다.
이날 학술세미나는 박경숙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사의 ‘한국근대미술사에서의 경주의 재발견-1세대 작가 7인을 중심으로’란 주제발표와 송재진 미협 영주시지부장의 ‘경북미술의 시작과 전파경로-60년대 이전, 회화분야를 중심으로’, 최용대 서양화가의 ‘경주예술학교의 꿈과 좌절’,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의 ‘문화정책의 새로운 변화를 필요로 하는 천년고도 경주’란 주제의 논문발표 순으로 진행됐다.
특히 이날 경주예술학교 운영의 전말을 설명한 최용대 서양화가는 개인적으로 수집한 자세한 자료들을 토대로 “경주 예술인들의 꿈이었던 경주예술학교가 1946년에 개교한 뒤 1952년에 제2회 졸업생 배출과 그해 6월 개교 5주년 기념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지만 광복 뒤 지방미술의 활기가 미술대학의 교육을 통해 대학교수들과 이들이 배출한 젊은 작가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생각해 볼 때 경주예술학교의 좌절은 경주미술계의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